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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62화 (62/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62

개경의 시전은 언제나 붐볐다.

고려 최고의 상업 지역이니 당연했다.

상업이 발전하고 있는 덕분에 몇 년 전과 비교해도 확실히 규모가 커지고 있었다.

그 덕분에 기존의 시전은 너무 비좁고 확장할 공간도 없어서 포화 상태가 됐다.

인파에 밀려서 걷기도 힘들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곳이다.

물건을 파는 이들은 자신의 물건이 최고라 외치며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사는 이들은 조금이라도 깎으려 흥정했다.

당연히 시끌벅적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주점까지 있으니 날이 어두워져도 시전의 거리는 불야성을 이뤘다.

개경 외에 다른 지역에 온 이들에게는 완전히 다른 세상 같아 보였다.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의 중심지.

개경은 고려의 유행을 주도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유행한다는 것은 머지않아 고려 전체로 퍼질 가능성이 매우 컸다.

이 시대는 다른 지역으로 왕래하는 이들이 많지 않기에 조금 느릴 뿐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단발이었다.

상투를 자르고 짧은 머리카락을 드러내고 거리를 오가는 이들은 개경을 넘어서 고려 전체에서 흔하게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역시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맞았다.

병사들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았으나 자연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다.

일단 한 번 상투를 자른 후.

다시 기르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 편리함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목욕을 좋아하는 고려인답게 씻는 일이 잦아서 말리는 것도 일인데 짧은 머리카락은 공들여 말릴 필요가 없었다.

여름에는 그 장점이 극대화되었다.

심지어 요즘에는 이발소도 생겼다.

터럭을 다스리는 곳이라는 이름 그대로 머리카락을 잘라서 다듬는 곳이었다.

처음에는 다들 실력도 좋지 않았고 가위도 이발에 적합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수요가 있으니 그에 따른 개발이 뒤따랐기에 많이 개선된 편이었다.

그러나 진짜 명물은 따로 있었다.

개경 최고의 이야기꾼 조풍서.

요즘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얼마 전에 홀연히 나타난 그는 조소(調笑)와 골계(滑稽)에 무척이나 능했다.

그의 말에는 풍자와 해학이 있었기에 말을 할 때마다 사람들은 배를 잡고 쓰러져서 웃느라 바쁠 정도였다.

하지만 인기 비결은 따로 있었다.

허접한 사랑 이야기나 널리 알려져 있는 전기소설(傳奇小說)은 하지 않았다.

그런 것들은 이미 수많은 이야기꾼이 다뤘기에 결말은 다들 알고 있었다.

이미 아는 이야기.

그것만큼 재미없는 게 있을까.

아무리 해석을 달리해도 수십 번을 들은 이야기에서 재미를 찾을 수는 없다.

이야기꾼이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에 목말라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조풍서는 특별한 이야기를 다뤘다.

“성벽 위로 기어 올라오는 것들의 얼굴을 그냥 팍! 내리찍으니 감나무에서 감이 뚜욱 떨어지는 것 같았는데 그때 최영 장군님이 앞으로 나서며 이렇게 외쳤지.”

고우성과 회안성의 이야기였다.

그곳에서 고려군이 싸우며 생겼던 일을 맛깔나게 풀어주는 탓에 다들 환호했다.

아이들은 나무로 만들어진 장난감 칼을 손에 꽉 쥐고 있는데 표정만큼은 실제로 그곳에 있는 것처럼 결연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풍서도 그 현장에 있었다.

이번에 출정했던 명단에 있던 것은 아니었으나 현지에서 징집된 이였다.

처음에는 조풍서가 허풍을 늘어놓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돌아온 홀치와 응양군 소속의 병사가 종종 그를 찾아와 친한 척을 한 뒤로 그런 말은 완전히 사라졌다.

“과연 뭐라고 했을까?”

뜬금없이 옆에 있던 아이에게 묻자.

부끄러운지 엄마 뒤로 숨는 녀석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던 조풍서는 좌중을 한 차례 둘러보며 뜸을 들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아우성을 쳤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뜸 들이지 말고 어서 이야기를 해줘.”

하지만 그는 전혀 조급해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할 때 완급 조절을 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이야기를 시작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떠벌리는 것은 하수나 하는 일이다.

그쯤 되자 조풍서는 슬쩍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세 명의 아이가 주머니를 들고 이야기를 듣던 이들에게 다가섰다.

“이야기가 재미 있으셨다면 조금씩이라도 부탁드립니다.”

모두가 흔쾌히 내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주머니에 꽤 수북하게 저화가 쌓이기 시작했다. 저화의 최소 단위가 쌀 한 홉이니 부담될 수준은 아니었다.

다들 개경에 살고있는 이들이다.

같은 양민이라도 다른 지역보다 훨씬 부유했고 개경 내외에 여러 공방이 생기며 벌이도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어느 정도 저화가 걷힌 뒤.

아이들이 눈치껏 뒤로 빠졌다.

여유롭게 물을 마시고 있던 조풍서는 그제야 이야기를 다시 이어갔다.

“이미 장군님은 허리와 어깨가 창에 찔려서 온몸이 피로 물들어 있었지.”

“아이고··· 어째쓰까.”

“그런 몸을 하고도 가장 앞에 서서 싸우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네. 내가 죽기 전에는 누구도 이곳에 올라설 수 없을 것이다!”

조풍서는 비장한 표정을 한 채.

지팡이를 높게 치켜들며 외쳤다.

전쟁 중에 다친 다리 때문에 살짝 중심을 잃을뻔했으나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최영 장군이라도 된 것 같은 기세였다.

아주 훌륭한 연기였다.

한때 우인(優人)을 꿈꾸던 조풍서다운 모습이었다. 그걸 보며 사람들은 최영 장군을 대신하여 그에게 환호를 해줬다.

최근 들어 개경 사람들은 이방실 장군을 비롯해서 최영과 변안열 등을 무신처럼 여기고 있을 정도였다.

“아이고··· 다리야.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나머지 이야기는 내일 이 자리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깨알 같은 홍보까지 마친 뒤.

조풍서는 지팡이를 짚으며 물러섰다.

다들 아쉬워했으나 기다리는 재미가 있었기에 그를 순순히 보내줬다.

저화를 걷은 아이들과 함께 뒷골목에 들어선 그는 주머니 안을 살폈다.

“오늘도 제법 많이 걷혔구나.”

저화가 꽤 수북해 보였다.

간혹 한 되 단위의 저화도 섞여 있었다.

대충 오늘 하루 입을 놀려서 벌은 수입은 쌀 두어 말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그 외에도 여인네들의 가락지도 있었는데 아이 하나가 목각 패를 하나 꺼냈다.

“이건 도대체 누가 넣은 거야?”

글씨가 쓰인 것도 아니었고,

뭔지 알 수 없는 문양 하나가 조각되어 있었다. 그걸 본 조풍서는 아이에게서 목각 패를 받아서 품에 넣었다.

“누가 장난을 친 거겠지. 내일도 이 정도만 되었으면 좋겠구나.”

“최근들어 어르신의 유명세가 개경 전체에 퍼지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큭큭. 나와 함께 있더니 네 놈의 혓바닥만 가벼워졌어.”

“더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세 명의 아이는 조풍서의 제자였다.

어느 날부턴가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고 매일 같이 찾아오더니 그렇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머리가 굵은 아이는 총명한 데다 생김새가 단정하여 내심 조풍서도 꽤 기대를 하고 있었다.

“시끄럽고 이거는 가져다가 느그들 모친 약값에 보태거라.”

찻값으로 쓸 저화 몇 장을 뺀 뒤.

삼등분으로 나눠 제자들에게 줬다.

다들 가정 형편이 그리 좋지 않았다.

세 아이의 공통점이 있다면 얼마 전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마저 편찮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우성에서 함께 싸우던 동료들의 핏줄이었다.

아이들은 저화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 같았는데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돈을 거둔 것이 전부였는데 조풍서는 자신이 갖는 것보다 몇 배나 많이 쥐여줬다. 염치라는 것이 있다면 그걸 넙죽 받지는 못할 것이다.

“받기 싫으면 마라.”

조풍서가 다시 가져가려 하자.

그제야 아이들은 재빨리 품에 넣었다.

부끄러운 것은 잠시에 불과했고 현실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고달팠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조풍서는 너무 일찍 어른이 된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내일 다시 보자는 말을 남긴 뒤.

아이들을 보내고 조풍서는 인근에 있는 다점(茶店)에 들어섰다. 그곳에 들어서며 품에 넣어놨던 목각 패를 다점 주인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주인은 그를 가장 구석진 방으로 안내해 줬다.

그곳에는 한 남자 앉아 있었다.

조풍서는 곧장 그에게 다가가서 허리를 숙여서 인사를 했다. 목각 패는 그를 은밀하게 부르는 일종의 신호였다.

“어르신,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요즘 개경에서 잘 나가고 있다고 듣기는 했는데 확실히 대단하더군.”

“제가 한 일이 뭐 있겠습니까.””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어르신.

그는 바로 감찰 대부 이인복이었다.

이곳 다점 역시 감찰사에서 운영하는 곳이기에 말이 새어나갈 염려는 없었다.

그래서 은밀하게 만날 필요가 있을 때는 이인복이 종종 활용하는 곳이었다.

“제가 사정이 빈곤하여 찻값은 어르신이 내주시는 거로 알고 있겠습니다. 솔직히 이 다점은 다른 곳보다 너무 비쌉니다.”

“하여간 그 넉살은 여전하군.”

“그걸로 밥 빌어먹고 사니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소인을 부르신 것인지요?”

“이야기가 거의 끝나가고 있지 않은가. 약조했던 대로 대가는 치러야지.”

이인복은 품에서 은병을 꺼냈다.

이미 개경에서는 저화가 널리 사용되고 있으나 아직 은병도 유통되고 있었다.

거래 금액이 큰 상단 때문이었다.

조풍서는 사양치 않고 곧장 그걸 받았다.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아끼지 않고 나눠준 이유가 이 은병 덕분이었다.

“다음에 이야기할 것은 이것일세.”

품속 깊숙하게 은병을 챙기자.

이인복은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서책 하나를 조풍서쪽으로 내밀었다.

표지에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았는데 조풍서가 받아서 펼쳐보니 곧장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았다.

내용은 그리 심오하지 않았다.

천한 신분인 화척(禾尺) 출신의 병사가 공을 세워서 양민이 된다는 이야기다.

화척은 국경 밖으로 추방된 이들이나 여진 등의 귀화인의 후손을 의미했다.

고려에 대한 충성심.

몸 바쳐서 나라를 지켜내자.

뭐 그런 내용이라고 보면 되었다.

거기에 출신을 가리지 말고 하나가 되자는 것 같은 교훈도 있는데 아무리 선동용이라도 조금 과한 느낌이었다.

“이런 거는 재미가 없을 겁니다. 화척 출신이라고 하니까 뭔가 확 끌리는 게 전혀 없지 않습니까.”

“그걸 재미있게 만드는 것이 자네의 역할 아닌가. 그냥 읊기만 해도 되는 거면 아무나 시키면 그만이겠지.”

“결국은 은병의 값어치만큼은 하라는 이야기군요.”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네.”

조풍서는 오늘도 어르신에게 좋은 것을 배워간다며 아주 작게 투덜거렸다.

당연히 이인복도 들었으나 그 정도는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 후에 조풍서는 서책을 챙겼다.

돈을 밝히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싫어하는 이도 아니었다.

현재까지 그가 시전에서 하던 이야기들 전부를 감찰사에서 써준 것이었다.

말단 병사였던 조풍서가 전체적인 전황을 알아봐야 얼마나 알겠는가. 당장 눈앞의 적과 싸우기도 바빴을 것이다.

그렇다고 조풍서의 역할이 작진 않았다.

너무 과하게 각색하지 않는 선에서 조풍서는 먹힐만한 이야기로 바꿔놨다.

적재적소에 감동과 웃음 그리고 긴장감을 녹여야 하는 작업이 쉬운 것은 아니다.

이인복도 그 점은 인정하고 있었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어보는 거는 자유지만, 대답을 해줄 수 있을 거라 장담은 할 수 없네.”

“그리 어려운 질문은 아닙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이것은 언제까지 계속합니까?”

그만둘 생각이냐고 이인복이 묻자 조풍서는 그렇지 않다며 펄쩍 뛰었다.

다만,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건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팔자에도 없는 제자까지 생겼으니 염려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문제에 대해서 이인복은 평소답지 않게 대답을 흔쾌히 해줬다.

“이 나라에서 사대주의를 뿌리 뽑을 때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대국을 받드는 것은 당연하다.

소국이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

그런 논리를 펼치는 부원배가 많았다.

거의 백 년이란 시간이 지나며 패배 의식이 사회 전반적으로 깔려 있었다.

그걸 어떻게든 없애야 했다.

이 모든 일도 전하께서 내놓은 계책 가운데 하나였는데 이런 종류의 선동은 과거부터 자주 사용되고는 했다.

낙랑공주와 호동부터 시작해서 서동요라는 예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선동에 꽤 취약했다.

“늙어 죽을 때까지 계속할깝쇼···”

“이런 날도둑놈 같으니. 하루라도 빨리 끝낼 생각을 해야지 그때까지 은병을 계속 챙겨 먹을 생각이더냐.”

“그런 생각을 지닌 이들이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 같으니 하는 말입니다.”

“더 쉬운 방법도 있기는 하다.”

조풍서는 곧장 알아 들었다.

감찰사의 악명은 잘 알고 있었다.

뒤에서 은밀히 움직이는 그들의 진면목은 이미 직접 보고 겪은 바가 있었다.

애써 외면하며 모른 척을 하던 조풍서는 슬쩍 다른 쪽으로 화제를 바꿨다.

“개경에만 있을 게 아니라 서경 같은 다른 지역도 가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럴 필요 없다.”

“아무리 개경에 수십만 명의 백성이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서경과 계림부의 이들을 합치면 적지 않습니다.”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설마 내가 너에게만 이 일을 맡겼을 것 같으냐?”

거기까지 왜 생각지 못했던 걸까.

조풍서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자 이인복은 앞으로도 열심히 하라는 충고를 남긴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풍서는 서둘러서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서 깊숙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런 뒤에 고개를 드니 어느 사이에 나간 건지 이인복은 안 보였다.

“언제 봐도 도깨비 같은 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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