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60
포상은 해군 병사에게도 내려졌다.
녹봉 외에 쌀과 저화가 주어졌으며,
열흘 가까이 휴가를 받아서 개경의 시전은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
주점에는 빈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주모! 여기 아락주 한 병 더 주시게.”
“이걸 누구 코에 붙이나. 계속 주문하기 귀찮으니 아예 항아리째 가져오라고.”
“에헤야 디야~! 오늘 개경의 술은 우리가 남김없이 다 마셔서 없애자. 하하!”
“캬아. 팔도 다 돌아다녔으나 술은 역시 안동과 개경의 것이 최고야.”
술주정뱅이 3천 명을 개경에 풀어놓은 덕분에 순군만호부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병사가 사고를 치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무시당한다는 기분이 들면 일단 상부터 엎고 주먹질을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 외로 조용했다.
목소리만 클 뿐이지 싸우지는 않았다.
오히려 정신 나간 술꾼이 시비를 걸어도 웃어넘길 정도로 절제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휴가를 나가서 문제를 일으킬 경우.
엄중한 문책이 뒤따를 거라 경고했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걸리면 갑판 청소나 오물을 치우는 거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조심해야 할 때였다.
백성의 환호를 받으며 돌아왔다.
그게 분노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다.
민심이란 원래 촛불과 같아서 작은 바람에도 어떻게 흔들릴지 모른다.
최근 들어 모병을 하기 위해서 해군과 고려군은 쌀까지 나눠주며 홍보 중이다.
그런데 여기서 물의를 일으킬 경우.
지금까지 했던 고생이 의미가 없어진다.
그렇게 떠들썩한 시전의 고급 주점 이층에서 앉아있던 주덕유는 부관인 윤호와 함께 부하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연히 두 사람 앞에도 술상이 있었다.
한동안 아래를 내려다보던 둘은 술잔을 채워서 동시에 입에 털어 넣었다.
“출항 준비는 어찌 되고 있는가?”
“병사들이 휴가에서 복귀하는 이레 뒤에는 문제없이 출항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 임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직 늦지 않았으니 빠져도 좋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윤호는 이번 출정을 기다렸다.
언젠가는 당한 만큼 돌려주고 싶었다.
지금까지 어명을 오매불망 기다려 왔다.
본격적인 토벌은 아닌 것이 조금은 아쉬우나 그 토대를 마련하는 일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마 주덕유가 자신에게 한 말도 그 때문일 것이다.
명예로운 제복과 자랑스러운 귀면문도 감추고 당분간 이름 없이 살아가야 했다.
어떤 전공을 올리더라도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 가능성도 무척이나 컸다.
일부 무관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런 이들은 대부분 윤호처럼 문관으로 시작해 무관이 된 이들이다.
그런 이들의 수는 많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병사는 반기고 있었다.
애초에 주덕유의 함대는 독특했다.
국적도 다양하고 복수심에 가득 찬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들은 왜구라면 일말의 동정심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약하게 굴었다면 애당초 귀면 함대가 공포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부수입도 무시할 수 없었다.
왜국에서 약탈을 하게 될 경우.
고려에서 대부분을 가져가겠지만,
병사들도 적게나마 각자의 몫을 챙긴다.
그건 일종의 생명 수당에 가까웠다.
어찌 됐든 큰돈을 만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뜻이다.
“달가워하지 않는 이들은 해군 원수께서 받아주기로 했으니 그쪽으로 보내시게.”
“하오나 그리하면 전선을 이끌 이들의 수가 상당히 부족해질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주덕유에게 소속된 배만 백 척이다.
이번에 나포한 배에 선원만 채워도 당장 백오십 척까지 늘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걸 이끌 이가 너무 적었다.
아직 인적 자원이 폭넓지 않았다.
최대한 많은 이들을 키워보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바다에서 항해하는 이들을 한두 해 만에 양성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더구나 배만 모는 직책도 아니다.
전투 상황에서는 적어도 서른 명이나 되는 병사를 지휘하는 역할도 해야 했다.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 고급 인력이었다.
경험 적은 이에게 배를 맡겼다가 암초를 들이받아 좌초하는 경우도 흔했다.
당장 대책이 있지는 않았다.
선원들 가운데 가장 경험이 많은 이들 중에 하나가 물려받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있다면 육상 전투를 위해 지난해에 새로 모집해서 1년간 훈련받은 응양군의 일부를 지원받았다.
홀치보다는 등급은 낮지만,
상당히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화포를 쏘며 해상 전투를 벌이는 것과 상륙해서 싸우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해군도 꾸준하게 육지에서 훈련도감 출신의 홍귀에게 훈련을 받고 있어도 응양군 출신과는 차이가 있었다.
“우리 쪽에 배치되기로 예정되어 있는 응양군은 언제 합류하는가?”
“출항 이틀 전까지 오기로 했습니다.”
“훈련장이 코 앞인데 뭐 그리 늦는 거지?”
“소식을 들어보니 얼마 전부터 천리 행군 중이었습니다.”
천리 행군 이야기를 듣자.
주덕유는 자연스럽게 몸서리쳤다.
그 역시 홀치에 몸담고 있었을 당시에 여러 차례 경험했다. 발바닥에 물집이 가득한 상태로 걷는 것은 지옥이었다.
졸면서도 계속 걸었던 것 같았다.
정해진 시간 이내에 도착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윤호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 역시 임관되기 전에 두어 차례 해봤다.
종3품 이상의 지휘관을 제외하면 누구나 한 차례 겪는 일이었지만, 누구도 달가워하지 않는 무척 고된 훈련이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각자가 경험한 천리 행군을 안주 삼아서 술을 마셨다.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자.
주덕유는 더는 술잔을 들지 않았다.
평소 술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을 잘 아는 윤호는 왜 그러냐고 물었다.
그러자 주덕유는 쑥스럽게 웃었다.
“모처럼 집에 왔는데 매일 술에 취한 모습만 보여줄 수는 없지 않나.”
윤호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전투에 나설 때는 누구보다 용맹했지만, 정작 아내에게는 쩔쩔매는 애처가다웠다.
주덕유의 처인 이연은 자신의 남편에 대한 내조를 상당히 잘하고 있었다.
성격이 불 같은 주덕유도 그녀의 앞에 서면 순한 양처럼 바뀔 정도였다.
심지어 이연은 왕후마마의 총애를 받아서 궁궐에 출입하는 일도 잦은 편이었다.
단 하나 아쉬운 게 있기는 했다.
그건 바로 아이가 아직 없다는 것이다.
금실 좋다고 소문난 두 사람이 혼례를 올린 지 몇 해가 지났으나 소식이 없었다.
윤호가 혹시나 싶어서 슬쩍 물어보자 주덕유는 한숨을 내쉬었다.
“임을 봐야 별을 따지. 내가 집에 있는 기간이 얼마나 길다고 그러는 건가.”
해군이라면 다들 하는 고민이었다.
한번 배를 타고 남해안까지 나가면 최소 몇 개월 정도 걸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번에도 석 달 넘게 남해안에서 작전을 수행하다가 돌아왔는데 앞으로는 왜국까지 오갈 테니 더 심해질 것이다.
“에휴··· 저도 그 때문에 고민입니다.”
“자네는 그래도 딸이라도 있지 않은가.”
“요즘 들어서는 자녀가 서넛은 되어야 애국한다는 말을 듣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지.”
열 살 미만의 아이가 많은 집의 경우.
나라에서 부역을 면제해줄 정도였다.
그 기준점이 조금 높기는 했으나 혜택을 보는 이들이 적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윤호의 이야기를 들으며 주덕유는 꽤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두어 해만 더 지나면 이립(而立)이 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비슷한 시기에 혼례를 올린 변안열의 처는 벌써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다.
“전하께서 기자치성(祈子致誠)을 올리셨던 곳이 어디라고 했소?”
“복령사라는 곳입니다. 최근 이야기를 들어 보니 마마께서 원자 아기씨를 보신 후부터 발 디딜 틈도 없이 바글거린다고 합니다.”
역시 사람 마음이란 게 똑같은 것 같았다.
탁발승을 했던 시절의 상처가 아직 깊게 남아 있는 탓에 그 이후로 사찰에 찾지 않고 있었으나 조금 솔깃하기는 했다.
잠시 고민을 하던 그에게 윤호가 가볼 거냐고 묻자 주덕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밑져야 본전 아닌가.”
*
그로부터 6주 뒤.
더위가 찾아올 무렵.
주덕유의 처인 이연이 입궐했다.
그녀가 가진을 만나기 위해서 궁궐에 들어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평소 고관대작의 부인들과 잦은 만남을 가지는 것은 아니나 그녀는 특별했다.
가진이 회임을 할 당시부터.
공방을 이연이 관리하고 있었다.
그녀가 직접 운영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고 공방에서 일하는 인력을 통솔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공방의 특성상 짐을 옮기는 몇 명의 노비를 제외하면 모두 여성인 곳이다.
내수사의 관리가 그녀들의 고충에 공감해주고 융통성 있게 관리를 해주지 못할 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어서 오시오.”
이연을 보자 가진은 무척 반겨줬다.
나이도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 터라 가진에게 이연은 동무 같은 이였다.
고려에서 맺은 몇 안 되는 인연이었다.
곁을 지키고 있던 궁녀에게 다과를 내오라고 시킨 뒤에 가진은 곧장 공방부터 어떻게 되고 있는지 챙겼다.
“공방은 아무 문제 없소?”
“마마께서 신경을 많이 써주신 덕분에 아무런 문제 없사옵니다.”
“다행이오. 이제 곧 바깥나들이도 가능하다고 하니 조금 더 수고해주시오.”
출산한 지 벌써 6개월쯤 되었다.
원래는 3개월이 지난 뒤에 공방에 복귀하려고 했으나 그게 쉽지는 않았다.
출산 이후부터 어지러움과 함께 하복부에 통증이 잦아 거동하기 쉽지 않았다.
이연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가진은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날이 좋을 때는 후원까지 산책도 자주 나가니 걱정할 필요는 없소. 이미 전하께서도 허락을 해주신 일이오.”
“마마께서 돌아오시면 공방에 있는 모든 이들이 크게 기뻐할 것이옵니다.”
“그나저나 이번 달에도 일을 잠시 그만둔 이들이 꽤 많다고 들었소. 달포 이내에 출산을 앞두고 있는 이들이 몇이나 되오?”
“일곱 명이옵니다.”
공방에 소속된 이들이 이백 명이다.
그런데 그중에 회임한 이가 수십 명을 넘어서고 있으니 열풍을 넘어 광풍이었다.
대부분 가임기의 연령대인 영향이 컸다.
일부러 그렇게 선발한 것은 아니었으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혹시···”
이연에게 좋은 소식이 있냐고 물어보려고 했지만, 가진은 그건 아닌 것 같아서 중간에 말을 흐렸다.
원자가 태어나 압박이 조금 덜해졌으나 그녀도 회임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후사에 대한 부담을 알게 모르게 받아왔다.
이연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가진은 급하게 주제를 돌렸다.
“지난해 수확한 목화는 다 소진되었소?”
이연도 살짝 눈치는 챘다.
당연히 그녀도 신경이 쓰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있다면 주덕유에게 가족은 몇 명 안 되었고 아직은 그들이 압박을 주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조만간 면포를 만드는 것은 끝날 것 같사옵니다. 확실히 목화 생산지에서 조면(操綿) 과정을 끝내고 실까지 만들어서 보내니 일거리가 많이 줄었사옵니다.”
목화송이는 부피가 크다.
그 상태 그대로 남부 지역에서 개경까지 옮기는 것은 무리다. 요즘은 목화송이에서 씨를 분리하고 실잣기까지 마쳐서 왔다.
당연히 그에 관련된 노임(勞賃)이 지급되었는데 그 덕분에 목화 생산을 희망하는 지역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그때 다과상이 안으로 들어왔다.
가벼운 차와 함께 과일 몇 종류가 놓여 있었는데 담소를 나누며 맛있게 먹던 이연이 갑자기 입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숙였다.
“우읍···”
그걸 본 궁녀들은 사색이 됐다.
음식에 문제가 있는 걸 수도 있으나 최악의 경우는 독까지 염두에 둬야 했다.
당장 어의를 불러오라며 다들 허겁지겁 움직였는데 정작 가진은 살짝 웃었다.
아무리 봐도 음식 문제는 아니었다.
그런 것이라면 자신도 똑같은 증상이 있었을 것이다. 이연도 상황이 심각한 것을 깨닫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갑자기 속이 안 좋아서 결례를 범했사옵니다.”
“얼마 전에 복령사를 다녀왔다더니 그곳이 정말 영험하긴 한가 보오.”
“설마 회임한 거란 말씀이시옵니까?”
“주덕유 장군이 개경을 떠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으니 시기도 맞지 않소.”
일리가 있는 말이었으나.
아직 이연은 믿기지 않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최근에 여러 징조가 있기는 했다. 가진은 확실히 하기 위해서 겁령구를 불러 곧장 어의를 데려오라 했다.
일단 확인부터 해야 했다.
경솔하게 축하를 해줄 수는 없었다.
괜히 기대를 했다가 아니라면 실망이 매우 클 것이다. 하지만 정작 기다렸던 어의는 오지 않고 내관 하나가 뛰어왔다.
그는 다급하게 엎드리며 방금 들어온 소식을 가진에게 전해주었다.
“마마, 출정을 떠났던 이방실 장군님과 병사들이 드디어 개경현에 들어섰다고 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