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59
200척의 조운선과 10만 석의 쌀.
두 가지 모두 고려에겐 상당히 중요했다.
지난해 극심했던 가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그것마저 뺏길 수는 없었다.
10만 석의 쌀을 구휼미로 풀면 수십만 명이 보릿고개를 넘길 정도는 되었다.
당연히 그걸 내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미리 모든 해군을 동원했다.
어느 시기에 어느 지역으로 온다는 것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우위에 설 수 있었다.
만약 그런 기억이 없었다면 진행할 수 없는 작전이었다.
원래의 역사대로 흘러갈 경우.
올해와 3년 후에 각각 2백 척과 3백 척의 조운선을 잃게 되는데 그 여파가 꽤 컸다.
엄청난 양의 쌀을 잃는 것도 당장은 뼈아픈 일이지만, 그보다 조세가 제대로 운반되지 않게 되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세금이 올라오지 않게 될 경우.
국가의 행정력은 급속하게 악화된다.
내가 아닌 원래의 공민왕은 어쩔 수 없이 녹봉 지급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삭감하는 등의 고육지책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에서는 녹봉을 먼저 받겠다고 시비가 생긴 탓에 살인이 벌어졌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육로로 옮길 수 있을까.
솔직하게 말하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소와 말로 달구지를 끌고 올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더구나 각지에서 개경까지 오는 길이 험해서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괜히 터널과 다리가 많은 게 아니다.
우리나라의 국토에서 산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다들 알 것이다. 아무리 돌아가는 길을 찾더라도 고갯길이 무수히 많다.
거기에 육로 운송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하천과 강도 생각보다 많았다.
‘괜히 조운선이 있는 게 아니지.’
당장은 그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어쨌든 낭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은 해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하지만 그걸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김휘남과 주덕유는 승전의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움직여야 했다.
아직 순천부 앞바다에는 김휘남의 함대와 바꿔치기한 이백 척의 조운선이 있었다.
쌀이 실린 조운선을 호위해서 무사히 개경까지 올라와야 임무가 끝난다.
그래도 모처럼 집으로 향하는 길이라 피곤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해군에 소속된 두 개의 함대.
그리고 이백 척에 달하는 조운선까지.
모두 합치면 무려 사백 척의 대형 선단이 움직이자 고려의 서해안은 난리가 났다.
끝이 보이지가 않을 정도로 줄지어 움직이는 모습은 꽤 장관이었다.
그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서 해안가로 백성들이 몰려와서 지켜볼 정도였다.
“와··· 저게 정말 고려의 해군이야?”
“전부 다는 아니고 절반은 조운선이잖아.”
“오래 살다 보니 이런 장관을 보는 날이 오는구나.”
“요즘처럼 마음 편하게 살아본 적이 없어. 이게 다 해군 덕분 아니겠는가.”
확실히 해군이 만들어진 뒤.
백성들은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간혹 해군의 눈을 피해서 쳐들어오는 왜구가 아예 없지는 않으나 예전에 비해서 현저하게 줄어들기는 했다.
해군도 백성의 응원에 부응했다.
그들은 규모가 큰 항구가 보이면 조운선 한 척을 보내서 백성에게 쌀을 나눠줬다.
당연히 미리 허락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단순한 구휼미는 아니었다.
쌀을 나눠주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들은 쌀을 나눠주며 현재 전국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모병(募兵)을 홍보했다.
“전하와 고려를 지킬 병사를 모집 중이니 관심이 있는 자는 관아로 가서 지원하시오!”
상시 유지되는 병력이 더 필요했다.
원나라에서 귀국하고 있는 2천 5백 명의 정예 병사를 합쳐도 현재 고려가 보유한 병사는 아직까지 2만 명을 넘기지 못했다.
전국적으로 징집을 하면 이야기가 달라지나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병사는 머릿수를 채우는 용도일 뿐이다.
심지어 그중의 3할이 해군 소속이다.
지난 5년 동안 원나라의 눈치를 보면서 서서히 늘렸는데도 아직 그 정도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고려군은 존재했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걸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강력한 해군과 승전보.
두 가지는 홍보로 쓰기 참 좋았다.
조금씩 바다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덕분에 아이들은 해군을 선망했다.
귀신과 거의 동급 취급을 받고 있던 왜구를 매번 때려잡고 있는 덕분이다.
심지어 농번기 때는 대민지원까지 하고 있으니 인식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중에도 항해는 멈추지 않았다.
해군과 두 장군은 머지않아 개경의 주민이 보내는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입궐을 하였다.
“정말 고생이 많으셨소.”
내가 그들을 보내기는 했지만,
그걸 직접 실행한 것은 두 장군이었다.
세부 작전까지 짚어줄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김휘남과 주덕유는 지금까지 쌓은 경험과 해전에 대한 높은 이해도 덕분에 커다란 피해 없이 작전을 마쳤다.
손실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되었다.
이번 작전을 수행하며 수십 명의 병사가 사망했는데 왜구 탓이 아니라 화포가 못 견뎌서 폭발한 탓에 생긴 불상사였다.
그리고 폐기 직전인 낡은 조운선 이십 척이 수장된 것이 전부였다.
처음부터 질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정도의 실력은 충분히 있었다.
보유하고 있는 전선의 수만 보더라도 우리 쪽이 훨씬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피해를 최대한 줄여야 했다.
앞으로 해군에 대한 투자가 대폭 줄어들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기존처럼 막대한 돈을 들여서 조선할 여유가 없었다.
3년 사이에 백 척이 조선됐다.
거기에 배에 싣는 화포와 화약의 양까지 고려하면 해군은 돈 먹는 하마였다.
이제는 뭍에서 싸울 준비를 해야 했다.
그래서 두 달 가까이 시간을 들여서 완벽한 함정을 파고 기다렸던 것이다.
“전하의 선견지명(先見之明)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사옵니다.”
김휘남은 모든 공을 내게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인근 해역을 미리 답사하고 어선까지 동원해 모의전을 하며 준비한 덕분이지 내가 한 일은 없다고 여겼다.
문무백관이 모인 자리에서 그들은 이번에 대승을 거둔 전투를 보고했다.
이미 서면으로 보고를 받았지만,
모두에게 이게 어느 정도의 승리인지 알려야 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에 내가 만든 해군을 반대한 이들도 있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왜구의 침구가 막 시작되었을 때라 심각하게 보지 않았다.
나도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긴 했다.
하지만 뒷문을 활짝 열어 놓고 멀리 나들이를 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남부 지역은 안정되어야 한다.
그래야 북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완파된 왜선 : 64척
-나포한 왜선 : 91척
-포로로 잡은 왜구 : 600여 명
마흔 척 남짓 도망치긴 했지만,
낭도 대첩이라 불러도 될 성과였다.
유독 이번에 많은 왜선이 나포된 이유는 쌀을 싣고 돌아가기 위해서 거의 비어있던 배가 상당히 많았던 덕분이었다.
이 정도면 왜구도 타격이 있을 것이다.
지난번에 이키섬 등을 타격하고 돌아온 것과 소규모 왜선을 처치한 것까지 합치면 최근 2년 사이에 4백 척이나 없앴다.
이게 상당히 중요한 대목이었다.
과연 왜구에게 배가 얼마나 남았을까.
개경에 오는 길에 포로로 잡은 왜구를 주덕유가 심문하니 사이카이도(西海道)의 거의 모든 배를 끌어모은 것이라고 했다.
그걸 고려하면 당분간 백 척 단위의 대규모 약탈을 오는 것은 힘들 것이다.
원래의 역사에서 벌어졌던 진포 해전과 황산대첩 이후에 왜구의 침략이 크게 줄었던 것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이게 완전한 끝은 아닐 것이다.
훗날 500척 단위로 쳐들어오는 것을 떠올리면 고작 몇 년 정도의 여유를 얻은 것이다.
“준비한 것을 내오거라.”
신소봉을 향해 고개 돌려서 말하자.
그는 두 자루의 장검을 가지고 돌아왔다.
얼핏 보아도 일반적인 고려의 검보다 조금 긴 것이 독특한 형태였다.
고려 최고의 야장에게 특별히 주문한 것인데 자루에는 남쪽 바다를 수호하라는 의미로 주작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앞으로도 고려의 바다를 잘 지켜주시오.”
“분골쇄신(粉骨碎身)하겠사옵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김휘남과 주덕유는 무척 기뻐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왕에게 직접 검을 하사받는 것은 드문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고려 최고의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명검이었다.
공식적인 치하는 그걸로 끝났다.
그 이후에 나는 두 사람을 따로 불렀다.
같이 식사를 하기 위함이었는데 오늘은 특별히 사선서(司膳署)의 제점에게 부탁한 포계(炮鷄)를 비롯해 진수성찬을 내왔다.
여기서 말하는 포계는 굽고 지지는 닭고기를 의미했다.
하지만 기름에 담가서 튀기는 것은 아니라 프라이드 치킨과 비교는 어려웠다.
마음 같아서는 기름에 완전히 담가버리고 싶었는데 기름값이 워낙 비싸니 나조차 쉽게 엄두를 내지 못 하는 일이었다.
괜히 나라 사정이 안 좋아지면 유밀과 등을 금지하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두 사람은 만족했다.
해군으로 임명된 이후부터.
식단이 해산물 위주니 그럴 만도 했다.
실제로 그들은 연탄에 구워온 생선구이와 해산물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 차후 해군의 운영에 대해 이야기를 한참 나눈 뒤에 나는 김휘남을 내보내고 주덕유만 남겨두었다.
따로 할 이야기가 있었다.
“서달의 소식은 들었느냐?”
“개경에 들어와서 북부 지역으로 부임했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사오나 작전 중이었기에 직접 서신을 주고받지는 못했사옵니다.”
“머지않아 서달을 비롯해 고려군이 옛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 나설 것이다.”
“소신은 무엇을 하면 되옵니까?”
주덕유는 상황 판단이 꽤 빨랐다.
홀치로 있으면서 내 곁에 가까이 있었다.
그 기간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북벌에 함께하지 못할 거란 사실은 알아챘다.
오히려 지금까지 일궈낸 해군을 다른 이에게 맡기라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초반에는 멀미 때문에 고생했지만,
알게 모르게 정이 많이 든 탓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불러냈다는 것은 따로 시킬 일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과인이 시키는 일이라면 그게 뭐든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일이라도 시켜만 주시옵소서.”
“너의 명예가 더럽혀질 수도 있다.”
“대도에서 전하께 충성을 약속했던 그 날 이후부터 제 이름 따위는 이미 버렸습니다. 더구나 소신의 본명은 따로 있지 않사옵니까.”
주덕유에게는 이름이 참 많았다.
주중팔로 인생을 시작해 주흥종까지.
여러 이름 중에 역시 가장 유명한 것은 주원장인데 언젠가는 그 이름을 다시 그에게 되돌려줄 생각이었다.
“그럼 과인이 약조하마. 모든 일이 끝나게 되면 직접 이름을 새롭게 지어주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오늘부로 귀면 함대는 잠시 부대기를 내리고 해군에서 제외할 것이다.”
주덕유도 이건 생각지 못한 것 같았다.
부대기를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했던 그에게 오늘부터 쓰지 말라는 것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이야기였다.
더구나 이제 그의 함대를 해군에서 제외한다는 말에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부터 나는 지금껏 구상했던 사략 함대에 관련된 내용을 주덕유에게 털어놓았다.
“과인은 당한 만큼 되돌려 줄 생각이다.”
약탈과 방화 그리고 납치.
뭐든 상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다행히 주덕유는 내 지시를 그다지 꺼려하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상당히 반기는 눈치였다.
지난번에 이키와 대마도 등을 습격할 때 상륙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던 것 같았다.
벌레를 박멸하려면 알집부터 털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원나라는 제외되는 것이옵니까?”
“해보고 싶으냐?”
“아닙니다. 제가 증오하는 것은 원나라의 황제와 관리들이지 힘들게 살아가는 백성에게 불똥이 튀는 것은 원치 않사옵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거라.”
어차피 나도 원나라는 생각도 안 했다.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 수 없었다.
생각보다 왜구는 상대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해전에서 화포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중이었다.
뭍에 내리는 순간부터는 절대다수가 아닌 이상 오히려 당할 가능성도 컸다.
당연히 대마도와 이키를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3천 명의 해군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은 왜구처럼 움직여야 했다.
치고 빠지는 히트 앤 런 작전이 필요했다.
주덕유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이 사실을 문무백관이 알게 될 경우에 반발할 것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냐며 따지기 시작하겠지.
그럴 만한 이유는 당연히 있었다.
전쟁 물자를 모으는 것은 일차적인 목표에 불과했고 거기에 한 가지를 더하면 왜구 준동을 대비한 억제기 같은 역할이었다.
계속해서 대마도 등을 돌면서 바다를 건너올 수 있을 정도의 크기를 가진 선박은 무조건 부숴야 했다.
거기에 노동력 확보도 필요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생명은 소중한 것이라 배우고 그렇게 살아온 나였으나 왜국의 사람들에게는 동정심이 안 생겼다.
이 무렵부터 시작된 왜구의 약탈과 임진왜란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보였던 만행을 떠올리면 더한 것도 할 수 있었다.
훗날 악명을 얻더라도 상관없었다.
내게는 지금이 더 중요했다.
“가서 싹 쓸어오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