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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58화 (58/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58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쬘 4월 무렵.

여수현과 창선현(남해)은 소란스러웠다.

두 지역의 앞바다에는 거의 이백 척에 달하는 대형 선단이 이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고기잡이를 위해 배를 타고 나온 어민들은 왜구들이 찾아온 것인 줄 착각하고 깜짝 놀라서 도망치려다가 뒤늦게 그 배의 정체를 알아챘다.

그 많은 배들 전부가 조운선이었다.

“뭐 저렇게 떼를 지어서 다니는 거지?”

“평소보다 몇 배는 되는 것 같은데.”

“왜구 때문이지 뭐겠어. 저거 석두창이랑 통양창에 있는 거 한 번에 옮기는 것 같은데 무사히 개경까지 갈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그런데 얼마 전까지 뻔질나게 드나들던 해군은 정작 어디 가고 조운선만 저렇게 몰려다녀?”

어민들은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이 시기는 왜구가 무척 활발할 때다.

조운선은 적어도 두 가지의 원칙이 있다.

가장 기본은 과적을 금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과기(過期)라 하여 태풍이 오기 전에 출발하는 시기를 지켜야 했다. 안전하게 가려면 적어도 3월 말에는 남해에서 출발해야 했다.

그게 최근에는 오히려 문제가 되었다.

조운선이 움직이는 시기가 정해져 있다 보니 왜구도 그때를 맞춰서 습격하고 있었다.

칼을 든 강도가 은행 앞에서 지키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랄까. 어차피 이동하는 조운로(漕運路)는 정해져 있으니 상당히 쉬운 목표이긴 했다.

쌀을 가득 실은 탓에 속도도 무척 느리기에 한번 따라붙은 왜선은 따돌릴 수도 없었다.

“저러다가 몽땅 털리면 어쩌려고 저러는 거지? 조마조마해서 못 봐주겠네.”

“그러게 말이야. 지난번에도 주덕유 장군님 아니었으면 40척 가까이 털릴뻔했다잖아.”

“소문을 듣기는 했는데 사실이었어?”

“마침 주변에 계셔서 다행이었지. 그때 살아 돌아간 왜구가 손에 꼽힌다고 하더라.”

“한 해 동안 뼈 빠지게 농사를 지으면 뭐 해. 다 털릴 게 뻔한데. 역시 생선이나 잡는 게 맘 편해.”

어느 지역에 왜구가 쳐들어왔다더라.

그런 소문은 생사와 관련된 일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빨리 인근 지역에 퍼지고 있었다.

그렇게 여수현을 지난 조운선은 마지막 조창인 해룡창(海龍倉)에서 양곡을 싣기 위해서 낭도(狼島)를 지나서 순천부로 들어섰다.

어부들이 조운선을 바라보는 동안.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는 또 다른 이가 있었다.

천천히 조운선의 뒤를 밟던 배 한 척은 순천부로 들어서는 것을 보자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머지않아 무수히 많은 왜선이 자라를 닮았다고 하여 금오도라 불리는 곳에 나타났다.

거의 이백여 척에 달하는 대규모 함대였다.

그러나 그들은 곧장 달려들지는 않았다.

“모두 이곳에서 대기하라.”

왜선을 지휘하는 오오쿠라 슌스케.

그는 가장 적절한 시기를 가늠하고 있었다.

괜히 안쪽으로 깊숙하게 들어가봤자 이득을 볼 게 전혀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순천부의 해안가에는 화포가 설치되어 있다고 했다.

조창을 지키기 위한 조치였는데 얼마 전에 왜선 몇 척이 멋모르고 접근했다가 화포에 얻어맞고 침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화포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이백 척의 배가 동시에 밀고 들어가면 아무리 해안가의 방어를 잘 준비했다고 하더라도 함락시키는 것은 순식간일 것이다.

하지만 쓸데없는 손실은 줄여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바다에서 경계를 서는 고려의 쾌선을 따돌리려고 꽤 힘들게 여기까지 왔다.

“그때 그 녀석들만 아니었어도!”

사람보다 배가 더 귀한 요즘이었다.

이게 다 1년 전에 벌어진 습격 때문이다.

당시에 이키섬과 대마도가 쑥대밭이 되면서 약탈을 하러 나갈 대부분의 배가 박살 났다.

그나마 살아남은 배를 타고 약탈을 나섰다가 고려의 해군에 의해 수장된 것도 수차례였다.

요즘에는 더러워서 해적질도 못 해 먹겠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나올 정도였다.

빌어먹을 화포가 문제였다.

예전에는 가지고 놀던 고려군이었지만,

이제는 쉽게 볼 상대가 확실히 아니었다.

같은 수로 붙어도 질 가능성이 커졌다.

그들이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피해를 감수하며 화포 세례를 뚫고 접근하는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용기 있는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이고 심지어 어떤 함대는 속도가 귀신 같아서 따라잡을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 때문에 고려는 점차 기피 대상이 됐다.

차라리 원나라로 가는 것이 훨씬 편했다.

재물도 넘쳐나는 곳인 데다가 약탈에 대한 저항도 고려에 비해서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다 보니 바람을 잘못 타서 고려에 도달한 이들도 배를 돌려서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하나 조운선은 포기할 수 없었다.

“아까 확인한 배가 몇 척이라고 했지?”

“대략 이백 척 정도는 된다고 했습니다.”

“보통 조운선 한 척에 오백 석 미만을 싣고 다닐 테니 모두 합치면···”

“십만 석쯤 될 것입니다.”

“이 자식이! 나도 그 정도 계산을 할 줄 안다.”

오오쿠라가 눈을 부라리며 말하자.

섣불리 나선 부하가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부렸다. 평소에 무식하다는 소리를 가장 싫어하는 대장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다.

괜히 말을 섞어봐야 좋을 게 없었다.

“십만 석이라···”

이번에 배를 이백 척 동원하며.

같이 온 이들이 삼천 명 정도는 되었다.

배 한 척에 서른 명이 타는 게 보통이지만,

약탈한 쌀을 가져가기 위해 절반 정도는 배를 모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만 타고 있었다.

조운선을 모조리 사로잡으면 각자 서른 석 이상을 가져갈 수 있다는 뜻이다.

작다고 말할 수 없는 양이다.

고향에서는 굶주리는 이들이 상당하다.

안 그래도 농지가 적은 땅인데 작년에 가뭄이 상당히 심했던 덕분에 식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심지어 어느 마을에서는 인육을 먹으며 연명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한동안 숨죽여 기다리고 있자 쌀을 다 실은 건지 마침내 조운선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신호를 보낼 준비를 해라.”

이번 작전은 꽤 단순했다.

섬과 섬 사이의 좁은 해로를 통과할 때.

해로를 배로 막아버린 뒤에 절반쯤이 뒤로 돌아가 퇴로까지 막고 털어먹는 것이 전부였다.

오오쿠라는 참을성 있게 쌀을 싣고 나오는 조운선이 모두 빠져나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많아 봐야 백 척 밖에 안되어 보였다.

“아까 이백 척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분명히 그렇게 들었습니다.”

“대장, 어떻게 할까요?”

오오쿠라는 잠시 고민이 됐다.

더 기다렸다가는 시기를 놓칠 것 같았다.

아무리 조운선이 느려도 뿔뿔이 흩어지면 이 지역의 해안선이 복잡해서 찾기 어려워진다.

그렇게 되면 몰이 사냥은 실패다.

우선 백 척이라도 확실히 털자는 생각에 오오쿠라는 부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배에 신호를 보내라는 의미였다.

그러자 얼마 후에 모든 배가 순천부를 빠져나오는 조운선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게 있었다.

“무슨 조운선이 저렇게 낡았어?”

“저런 배로 쌀을 옮기다가 파도만 조금 불어도 부서질 게 뻔한데 제정신이 아니네.”

“고려 놈들이 바다에 대해서 뭘 알겠어.”

“하긴 우리만큼 바다에 대해서 잘 아는 이들은 없지.”

“뭣들 하는 것이냐, 어서 배를 붙여라.”

확실히 낡은 배가 꽤 많기는 했다.

그렇다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일부 배는 조금 독특한 모양이었다.

요즘 고려에서 배를 많이 만든다더니 새로 조선한 것 같아 보였다. 뒤늦게 왜선을 발견한 조운선은 서쪽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아직 뒤쪽으로 돌아간 왜선이 도달하지 않아서 퇴로는 막히지 않았으나 뒤로 물러나 봤자 꼼짝없이 갇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선택의 여지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왜선의 속도는 조운선보다 훨씬 빨랐다.

좁은 해로를 통과하기도 전에 가로막혔다.

당연히 가장 가까운 배부터 목표가 됐는데 왜구들은 순식간에 배의 옆쪽으로 붙었다.

그들이 코앞까지 접근하자 배 위에 있던 고려인들은 갑판 위에 가득 쌓은 쌀가마니에 횃불을 던지고 곧장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던 걸까.

왜구들은 크게 웃으며 조운선으로 넘어왔다.

몇 명의 손에는 양동이가 쥐어져 있었는데 횃불 몇 개 정도는 금방 끌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생각보다 불길은 너무 빨리 번졌다.

그쯤 되자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서둘러 불길을 잡기 위해서 애를 썼으나 쉽지 않았다.

“이거 기름 냄새 아니야?”

코가 예민한 이가 킁킁거리자.

지독한 놈들이라며 다들 혀를 내둘렸다.

설마 기름까지 부어서 불을 지를 것이라 예상 못 했는데 빼앗길 바에는 태울 생각인 것 같았다.

심지어 그렇게 타오기 시작한 조운선이 이십여 척은 됐었다. 멀리서 지켜보며 지휘하던 오오쿠라도 그제야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가 뭐라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앙! 콰앙!

불타오르던 조운선이 터진 것이다.

그렇게 폭발하는 배가 한두 척이 아니었다.

불을 놓고 도망친 조운선은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하나같이 폭발하고 있었다.

조운선이 그냥 터지는 것도 아니다.

가마니 안에는 화약과 함께 자갈도 있었다.

터질 때마다 자갈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당연히 조운선으로 옮겨 타기 위해서 바싹 붙여놨던 왜선도 멀쩡할 리가 없었다.

옆면이 처참하게 뜯겨나간 뒤.

왜선은 천천히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그대로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주변에서 살아남은 이를 찾는 것은 어려웠다.

대부분은 몸이 산산조각이 났거나 팔과 다리 하나쯤 잘려 나간 이들이 무척 많았다.

심지어 어떤 왜구는 나무 조각이 온몸에 박혀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모골이 송연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부리나케 도망치던 조운선이 돌아섰다.

조금 전까지 보이지 않던 노까지 밖으로 빼서 회전하는 그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왜선들 대부분은 연달아 터진 폭발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로 그들은 배 위에 쌓인 가마니를 들췄는데 그곳에는 화포가 있었다.

“옜다 이거나 먹어라. 하하!”

“아귀(餓鬼) 같은 녀석들, 맛이 어떠냐.”

“밥값은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에게 내거라.”

“우리가 월척을 낚았구나!”

수십 척에 달하는 배에서 화포를 쏘자.

거의 이백여 발에 달하는 철환이 날아갔다.

그들은 김휘남이 이끄는 해군으로 진짜 조운선과 순천부에서 바꿔치기한 누전선이었다.

누전선과 조운선은 갑판 위에 설치한 누옥 외에는 외형적인 차이는 거의 없는 편이다.

더구나 최근에는 조운선 중에도 그런 형태가 있기에 왜구들이 간과한 것이었다.

초탄 발사가 이뤄진 후부터.

누전선에서는 계속해서 화포를 쏘았다.

사거리는 꽤 길었는데 기존에 쓰던 철환에서 납을 씌운 수철연의환으로 바뀐 덕분이었다.

당연히 왜선들도 맞고만 있지 않았다.

어떻게든 누전선과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서둘러 배를 붙여라!”

오오쿠라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서둘러서 화포를 쏘는 적선에 올라타야 했다.

일단 곁에 붙이면 다른 배에서 쏘는 화포를 맞을 걱정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야는 뒤로 돌아오기로 한 동료들 쪽으로 향해 있었다.

그들이 서둘러 와주면 승산이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때 섬 뒤에서 몇 척의 배가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섬 너머에서도 화포 소리가 났다.

다들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분위기였다.

자세히 보니 섬 뒤편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수히 많은 배가 줄지어 나오고 있었다.

잠시 후에 돛배 위에 걸린 깃발을 본 오오쿠라는 절대 피하고 싶은 이를 만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꿈에 나올까 두려운 귀면문이었다.

“거기에 매복하고 있었다니···”

오오쿠라는 그 순간 자포자기했다.

최근 왜구들 사이에서 가장 악명 높은 것은 귀면문을 걸고 다니는 고려군의 귀면 함대였다.

바다 위의 사신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가능한 그들을 피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으나 이곳에 매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워낙 빠른 배를 보유하고 있는 함대이기에 여기서 도망칠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정작 주덕유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이번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두 달 가까이 순천부에서 개고생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 올지 몰라서 한없이 기다려야 했다.

이번 작전만 무사히 마치면 개경에서 독수공방하고 있을 아내를 만나러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주덕유는 목청껏 소리를 쳤다.

“우리 마노라가 기다린다. 어서 끝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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