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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56화 (56/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56

신소봉까지 모조리 내보낸 뒤.

천천히 정지상의 말을 들어주었다.

대도에서부터 줄곧 호종했던 공을 생각하면 적어도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처결을 내릴지도 조금 생각해봐야 했다.

솔직한 내 심정을 말하자면 정지상의 행동 중에 잘못된 것은 전혀 없다고 생각되었다.

나에게도 귀가 있었다.

야사부카의 패악질은 유명했다.

임진정변에서 살아남은 부원배는 전생에 붕어였던 게 아닐까. 그때 개경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일을 벌써 잊은 것 같았다.

그들은 원나라를 등에 업고 여전히 행패를 부리고 있는데 나중에 그 모든 일을 계산할 때 후회할 것이 분명했다.

진짜 정변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조일신의 뒤에서 움직여야 했다.

그래서 탐관오리를 위주로 때려잡았는데 머지않아서 부원배를 모두 쓸어낼 생각이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죽고 유서 깊은 가문 몇 곳이 사라질 가능성도 있지만, 구더기가 무서워서 장을 못 담그는 것은 아니다.

지은 죄가 있다면 벌하면 그만이다.

내가 살던 시기에 친일파 척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사회적인 혼란이 수십 년 가까이 이어진 것을 생각하면 꼭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리 시기가 좋지 않았다.

만약에 정지상이 반년 정도 후에 일을 저질렀다면 당장 야사부카를 끌고 와서 목을 벴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야사부카는 어디에 있소?”

“접반사 홍원철과 함께 전주 관아에 가뒀습니다.”

“그들을 가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서응려까지 죽인 것과 고려가 반원의 기치를 들게 될 거라 말한 것은 문제가 상당히 크오.”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사옵니다.”

정지상은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날 답답하게 하고 있었다.

차라리 살려달라고 빌었으면 조금 더 단호하게 처벌을 내렸을 것이다. 나는 솔직하게 정지상에게 현재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눈 감고 안렴사를 풀어줄 수는 없소.”

“이미 각오하고 한 일이옵니다.”

“그렇다고 야사부카에게 내줄 생각도 없소. 원나라에서 죄의 유무를 판단할 단사관이 올 때까지 옥사에 가둬둘 생각이오.”

그것만으로도 정지상은 만족했다.

단사관이 공정한 판결을 내리진 않겠지만, 야사부카에게 직접 보복을 당하진 않을 것이다.

아무리 안하무인이라도 옥에 갇힌 죄인에게 해코지할 수도 없는 일이고 사신과 관련된 사건은 원나라의 단사관이 결정할 사항이었다.

그게 최선이라는 것은 정지상도 알고 있었다.

“서운하게 생각하진 마시오.”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사옵니다.”

“대신 전법판서 이달충에게 말해서 최대한 편의를 봐주겠소.”

“안 그러셔도 되옵니다.”

“옥살이가 생각보다 힘들 테니 사양치 마시오.”

그제야 정지상은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얼추 이야기가 끝났기에 그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기 위해서 사람을 부르려고 하자 정지상은 내게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말해보라고 허락하자 그는 머리를 숙인 채로 비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하, 소신이 얼마나 기다리면 되옵니까?”

정지상의 질문이 뭘 의미하는 걸까.

주어가 빠진 채로 두리뭉실하게 선문답을 하듯이 물었으나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

아마 그가 전주 관아에서 내뱉었던 추측성 발언이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글쎄··· 과연 어느 정도면 되려나.

내 예상으로는 앞으로 1년은 넘지 않을 거다.

기존의 공민왕보다 더 빠르게 반원 자주 정책을 펼치려고 했으나 여러 가지 걸리는 게 많았다.

일단 원나라로 떠난 병사가 돌아와야 한다.

그들이 북부 접경 지역에 배치되어야 이자춘이 위기감을 느끼고 고려로 넘어올 것이다.

쌍성 수복에 이자춘은 무척 중요했다.

그가 내부에서 적절하게 대응을 해줘야 우리 쪽 손해가 줄어들 것이다. 더구나 그가 보유한 군사의 수가 적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이자춘을 적대적으로 돌리지 않아야 이제 이십 대가 된 이성계를 품에 안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그 생각이 들자 나도 정지상이 했던 것처럼 두리뭉실하게 대답을 해줬다.

그 이상은 머지않아 단사관이 왔을 때 무슨 말을 할지 모르기에 말해줄 수는 없었다.

“곧 좋은 세상이 오지 않겠소?”

*

정지상이 물의를 일으킨 그때.

원나라의 회안성은 격전 중이었다.

고려군이 고우성에서 활약했던 것을 뒤늦게 인정받아서 휴식을 하라고 보낸 회안성이었다.

그런데 이곳마저 장사성의 군사가 몰려왔다.

최소 십만 명이 넘는 규모였는데 이방실이 이끄는 2만의 고려군과 소수의 원나라 병사들은 피 흘려가며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다.

그중에서 최영의 활약은 독보적이었다.

온몸에 상처가 생길 정도로 몸을 사리지 않고 성벽을 사수해준 덕분에 회안성은 여러 차례 수성에 성공했다. 하지만 언제 허물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고려군은 쉽게 성을 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공성은 조금 미숙한 게 사실이지만,

수성에는 정말 발군의 능력을 보여줬다.

대몽 항쟁을 하며 버티던 고려였고 본디 침략보다는 방어를 주로 하던 덕분이었다.

당연히 전술적인 이해도가 상당했다.

위로는 이방실 장군부터 아래로는 홀치까지.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해야 할 것들을 스스로 찾아가며 하고 있었다. 홀치는 개인적인 전투력 외에도 소규모 병사를 지휘하는 능력도 있었다.

장군들처럼 대규모 병력은 못 다뤄도 수십 명 단위는 한 몸처럼 움직이게 할 수준은 됐다.

더구나 다들 경험이 상당히 많이 쌓였다.

원나라에서 징집된 고려의 유민마저 이제는 전투에 어느 정도 능숙한 모습을 보일 정도였다.

벌써 고려군과 함께 전투를 반년 가까이 하고 있었는데 하루도 훈련을 쉬지 않은 덕분이다.

당연히 처음에는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훈련을 받을수록 살아남을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을 고우성에서 절실하게 느꼈다.

더구나 고국에서 온 무사들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싸우기에 모두가 그들을 존경했다.

반면에 상대편은 죽을 맛이었다.

꽈앙!

장사성은 탁자를 있는 힘껏 내리쳤다.

그의 손에는 사망자의 숫자가 적힌 서신이 쥐어져 있었는데 오늘도 그 수가 적지 않았다.

병사를 잃는 것은 뼈아픈 일이었으나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병사를 이끄는 무관의 죽음이었다.

누구 보다 앞장서서 지휘해야 하는 이들이 전투에 나설 때마다 엄청나게 죽어 나갔다.

회안성에 들어앉은 고려군이 문제였다.

그들은 전투에 나서면 일단 무관부터 잡았다.

십장이든 백장이든 직위에 상관없이 지시를 내리는 이들이라면 귀신같이 찾아냈다.

특히 한뼘 정도 되는 작은 화살은 병사들 사이에서 귀신 들린 화살이라 불릴 정도였다.

그들 때문에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고우성에서 있었던 일도 아직 잊지 않았다.

당시에도 고려군 때문에 외성이 함락되고 고우성이 무너질뻔했다. 때마침 원나라 안에서 분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끝장났을 것이다.

운 좋게 반격에 성공하며 무수하게 많은 원나라 군대를 잡았으나 회안성에서 다시 그들을 만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고려군이라···”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그들은 악착같이 싸우는 걸까.

어떻게 보면 원나라의 다른 징집병과 고려군은 다를 것이 없었다. 그가 알기로는 고려에서 온 이들은 황제의 명 때문에 억지로 왔다고 들었다.

심지어 병력의 대부분이 유민 출신이라 들었는데 정보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의심됐다.

그때 문을 열고 아우인 장사덕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절강의 상인 하나가 전하를 뵙고자 찾아왔사옵니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편하게 말해도 된다.”

자신이 이 자리에 오를 때까지.

동생들의 도움이 무척이나 중요했다.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였음에도 저마다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다. 장사신은 머리가 좋았고 장사덕은 용맹하여 명장이 될 거라 다들 말했다.

유일하게 장사의만 특출난 것이 없었는데 그래도 인간적인 면이 많아 인기는 좋았다.

“무슨 일로 날 찾아왔다고 하더냐?”

“물어보았으나 대답은 않고 자신의 이름이 심부라고 밝히더이다.”

“정말 그자가 심부라고 했더냐?”

현재 절강 최고의 상인은 누구일까.

몇 년 전에는 여러 이름이 거론되며 논쟁이 있었을 테지만, 이제는 심부라 말해도 반박할 이들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몇 년 사이에 그는 엄청난 부를 쌓으며 거부의 반열에 올라섰다.

안 그래도 장사성은 그를 만나고 싶었다.

계속되는 원나라와의 전쟁에서 물자의 보급이 생각보다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반기를 든 어느 군벌보다 부유한 편이나 물자를 구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여기서 심부가 자신의 편을 들어준다면 그가 보유한 상단이 꽤 도움이 될 것이다.

당연히 만남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당장 내게 데려오거라.”

장사덕은 알겠다며 머리를 조아린 후.

잠시 후에 30대가 안 되어 보이는 남자 두 명을 안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장사성은 심부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서 맞이해줬다.

두 사람은 초면이 아니었다.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이오?”

“즉위를 감축드리옵니다. 마지막으로 뵌 것이 5년쯤은 된 것 같사옵니다.”

“안 그래도 요즘 그대가 재신(財神)의 축복을 받은 것 같다고 절강에 소문이 자자하더이다.

“운이 좋았던 것이옵니다.”

“그런데 함께 온 이는 누구인가?”

장사성의 질문에 심부는 그를 소개해줬다.

함께 온 이가 고려의 장군인 서달이라고 밝히자 곁에 있던 장사덕은 칼이라도 뽑을 기세였다.

현재 고려군과 맞서 싸우고 있었는데 이번 방문이 암살을 위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충분히 그렇게 의심할 만했다.

하지만 서달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덕분에 팽팽한 기세 싸움이 이뤄졌는데 그걸 본 심부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며 서달과 장사덕을 만류했다.

“싸우러 온 게 아니니 그만들 하십시오.”

서달은 심부의 말을 곧장 따랐다.

하지만 장사덕은 물러날 기미가 없었다.

그쯤 되자 장사성은 아우를 타이르며 뒤로 물렸는데 그 역시 그리 달가워하진 않았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자신을 괴롭히던 고려군 때문에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심부 때문에 겨우 참는 중이었다.

“나한테 항복이라도 권하려고 온 것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장사치인 제가 여기에 온 이유가 뻔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전쟁 물자라도 팔려는 것이오? 그걸 가지고 고려군을 공격하는 데 쓸 텐데 그만큼 자신이 있다고 말하는 거라면 안 들은 거로 하겠소.”

“더 값진 것입니다. 저는 이곳에 책략을 팔려고 온 것입니다.”

심부는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지만,

말투나 몸짓에서 자신감이 묻어나왔다.

그런 여유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몸에 아예 베어 있는 것 같아 보였는데 그런 그를 옆에서 지켜보던 서달은 혀를 내둘렀다.

전하의 곁을 지키면서 심부를 꽤 많이 보았으나 오늘 같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언제부터 지재상인 노릇까지 한 것인가?”

“이익을 볼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 팔겠습니까. 제가 한 달 이내에 성왕께서 회안성을 가질 수 있게 해드릴 수 있다면 관심이 있으십니까?”

“십만 명이 넘어가는 병사도 하지 못한 것을 자네가 어떻게 가져다준다는 것인가? ”

“제가 말하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심부는 곧장 책략을 꺼내진 않았다.

거래에 있어서 주는 것이 있다면 받는 것도 당연히 있어야 했다. 심부가 그걸 거론하자 장사성은 껄껄거리며 웃기부터 했다.

“일단 조건이나 들어 봅시다.”

“제 계책이 성공하면 쌀 만 석을 주십시오.”

“지난해에 이 지역에 가뭄이 들어서 쌀값이 천정부지라는 것은 알고 말하는 거요?”

“회안성이 그 정도의 가치는 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잃은 병사가 도대체 몇일까.

대충 헤아려도 수천 명은 되는 것 같았다.

고려군이라면 이가 갈릴 정도였는데 만약 심부가 말한 것처럼 큰 희생 없이 회안성을 가져올 수 있다면 만 석 정도는 줄 수 있었다.

마침내 장사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래를 받아들이자 심부는 웃으며 계책을 밝혔다.

“간단합니다. 다음 공격을 나설 때 고려군에게 패퇴하는 것처럼 속여서 뒤로 물러서면 됩니다.”

“이 자식이! 감히 우리를 농락하려 드는 것이냐.”

장사덕이 길길이 날뛰었지만,

심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는 왜 아직 회안성을 공략하지 못한 건지 근본적인 이유부터 언급했는데 당연히 고려군이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고려군을 치워버리면 되지 않냐는 말에 장사성은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며 되물었다.

“어차피 고려군은 토벌에 성공하면 되돌아갈 이들입니다. 굳이 그들과 맞서 싸울 필요가 없지요. 차라리 크게 패한 것처럼 물러서면 고려군은 고국으로 귀환할 것입니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소리인가?”

“어차피 양국 모두 손해인 상황이 아닙니까. 고려군도 좋아서 저곳에 눌러앉은 것은 아닙니다.”

서달도 심부의 말을 거들었다.

무척 중요한 순간인 걸 알기 때문이다.

이번 회담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서 수백에서 수천 명의 목숨이 좌지우지된다.

하지만 그 계획은 문제가 있기는 했다.

만약에 후퇴하는 장사덕의 병사를 고려군이 약속을 깨고 쫓으면 커다란 손해가 생긴다.

반대로 고려에서도 추격을 하다가 역으로 습격을 당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서로 믿음이 없으면 진행될 수 없는 책략이었다.

당연히 그 부분은 심부도 인정을 했기에 서달을 바라보며 가지고 온 것을 달라고 말했다.

“여기 있습니다.”

서달은 품에서 서신을 하나 꺼냈다.

그걸 장사성에게 건네려고 하자 장사덕이 먼저 가로챘는데 혹시 독성이 있는 가루라도 묻은 것은 아닌지 필요 이상으로 꼼꼼하게 살폈다.

잠시 그런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서달은 적당히 하라고 말을 하려다 마침 장사덕이 그걸 장사성에게 건네자 입을 다물었다.

장사성은 잠시 서신을 읽었다.

한참 동안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읽던 그는 이 책략이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건지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제안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기에 모처럼 크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하하하. 고려의 왕이 청한 동맹이라··· 참 재미있는 분이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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