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55
고려의 적장자가 태어났다.
그 소식을 전해 듣자 안도했다.
왕가의 피를 이어가는 것은 중요했다.
이번에 아들이 태어난 덕분에 후사에 대한 압박은 어느 정도 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시절의 영유아 사망률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상당히 좋지 않은 편이었다.
괜히 백일이며 돌잔치가 있겠는가.
첫돌을 맞이하기 전에 죽는 아이가 너덧 명 가운데 하나일 정도였는데 5세 미만의 아이들의 높은 사망률은 너무나도 뼈아픈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원자는 상당히 건강해 보였는데 울음소리가 어찌나 우렁차던지 민가에서 태어났으면 장군감이라 했을 것이다.
그날부터 고려는 축제 분위기였다.
백성들 모두가 원자의 탄생을 축하했다.
사흘째가 되던 날에 원자가 태어났음을 고하기 위해서 종묘에 다녀온 나는 관례대로 옥사에 갇힌 이들을 대부분 방면해주었다.
첫이래가 되는 날에는 백관들이 모여 축하를 해줬는데 가진과 약속했던 것이 있기에 복령사에 크게 시주를 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원자의 이름을 어떻게 짓냐는 것이었다.
가진이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린 뒤에 내가 꾸었던 태몽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확실히 범상치 않은 꿈이기에 그녀는 상당히 기뻐했다.
태몽에서 현무(玄武)가 나왔기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은 검을 현(玄)이었다.
검다는 뜻도 있었으나 심오하고 깊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기에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러나 국휘(國諱)가 걸렸다.
왕의 이름은 백성이 쓸 수 없었다.
1029년 현종 시기부터 왕의 이름은 쓰지 못하게 했기에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보통 그런 이유 때문에 잘 안 쓰는 글자를 휘로 하는데 그래서 나온 대안이 ‘나타날 현(顯)’이다.
획수도 많아서 피휘를 하는 것도 수월할 것 같았는데 다행히 가진도 만족했다.
“왕현(王顯)이라··· 저는 좋은 것 같습니다. 대비마마께서는 어떠시답니까?”
“이미 허락을 받고 온 것입니다.”
“저에게 묻기 전에 답은 정해져 있었군요.”
“하하. 송구하오.”
그렇게 원자의 이름은 왕현이 되었다.
한동안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 무렵에 마침 식사가 들어왔다. 오늘도 해채(海菜)국인 것을 본 가진은 고개를 돌리며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해채는 미역을 뜻하는 옛말이다.
그녀의 식성을 알기에 소고기도 넣었지만,
해산물 같은 것은 그녀의 취향은 아니었다.
성인이 된 후에는 대도에서 지냈으나 태어나고 자란 곳은 내륙의 깊숙한 곳이라 바다의 향은 익숙하지 않았고 미끈거리는 식감도 싫어했다.
“오늘도 해체국이 나왔군요.”
“해복(解腹) 후에 몸을 풀 때는 이것만 한 것이 없으니 한동안은 어쩔 수 없소이다.”
“벌써 달포가 넘었으니 그렇죠.”
“보름만 더 노력해 봅시다.”
나도 미역국이 질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매일 같이 식사를 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이걸 도대체 언제까지 먹어야 할 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하루에 반 그릇 이상은 먹지 않아서 버틸 수 있었다.
뭐든 과하면 좋지 않았다.
내가 간곡하게 부탁하자.
가진은 어쩔 수 없이 수저를 들었다.
잠시 후에 식사를 마친 그녀는 옆에서 내가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자 눈을 흘겼다.
“여기서도 일하실 건가요?”
“하하. 미안하오. 돌아오는 봄에 성균관을 다시 개편할 예정이라 처리할 게 많구려.”
“저한테는 내수사 일을 잠시 미뤄두라고 하시더니 밉습니다.”
하지만 말과 행동은 조금 달랐다.
가진은 성균관 개편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지금은 한겨울이라 밖에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 그녀였기에 많이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그걸 잘 알기에 성균관의 개편에 대해서 천천히 하나씩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미흡한 부분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하자 가진은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였다.
“일단 가장 먼저 백성들의 건강을 위하여 의학을 성균관에 만들어서 의생과 의원을···.”
“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의학 외에도 군대를 이끌 무관을 위해서 방진과 전술을 교육하는 군사학 그리고 왜국과 천축국의 언어를 익힐 수 있도록 언문(言文)학도 만들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군사학은 훈련도감과는 조금 달랐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위 개념에 가까웠다.
지금까지 훈련도감에서 만들어진 전술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열심히 연구해도 그게 이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언문학도 상당히 중요했다.
고려의 해상 진출이 활발해지고 있기에 각국의 언어를 익힌 이들을 곳곳에서 필요로 했다.
그중에서도 마두라이 술탄국의 언어를 익히는 것이 중요했다. 현재 파견 나가 있는 정휘와 홀치를 교대해줘야 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가진은 한동안 내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그녀 역시 군사학과 언문학이 필요하다는 것은 동의해줬다. 고려의 물건을 원나라에만 팔 이유는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말이 통해야 흥정이라는 것도 해볼 것이다.
그나마 원나라의 말이 어느 정도 공용어처럼 사용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렇게 여러 이야기를 하던 중에 가진은 한가지 궁금한 게 있다며 내게 물었다.
“의학을 배우는 데 남과 여의 구분이 필요한 것입니까?”
가진은 의녀(醫女)가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번에 출산을 하면서 여러 가지 의문이 있었다.
남자인 어의에게 설명하기 난감한 것도 많았고 애매모호한 단어까지 써가며 소통하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제법 많았다.
그녀는 충분히 여자도 의술을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훗날 태종 때도 관노비를 뽑아서 의술을 가르치긴 했지만, 그녀가 바라는 것은 그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과연 성균관에 여자를 들일 수 있을까?
유교적인 사상인 가득한 그곳은 기술학부도 간신히 발을 들일 수 있을 정도로 폐쇄적이다.
이 시대의 여성은 조선과 달리 남성과 경제권과 가정 내 영향력이 대등해도 쉽지 않았다.
아직은 남녀유별(男女有別)과 삼종지도(三從之道) 같은 편협한 논리 같은 것은 없으나 나라가 들썩일 정도로 반발할 것이 뻔했다.
“성균관 내에 의녀를 들이는 것은 어렵소.”
“저도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떠하겠소?”
성균관 밖에 장소를 하나 마련한 뒤.
의학 교육을 똑같이 받게 하면 될 것 같았다.
어차피 교육 과정이나 의학박사가 가르치는 내용은 동일하나 소속만 다를 뿐이었다.
가진도 억지를 부릴 상황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그 정도에서 만족했다.
“의녀들이 입을 옷은 제가 만들겠습니다.”
가진은 아예 의녀가 입을 옷도 만들어주겠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회임 전부터 옷 만드는 재미에 홀딱 빠지더니 어떻게 만들지 궁금했다.
그녀의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주기 위해서 옆에서 연필을 잡고 스케치를 해줬는데 나름 내게도 마음의 평온을 되찾는 시간이었다.
‘이런 날만 계속 이어지면 좋겠구나.’
*
그러나 평화로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잠시 마음의 평안을 찾고 있을 무렵.
전라주도의 전주와 공주에서 일이 터졌다.
민심을 안정시키라고 보낸 안렴사 정지상은 자신이 휘두른 철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검무튀튀하고 육중한 철퇴에는 머리카락이 뒤엉켜 있었고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머리가 깨졌으나 아직 숨이 붙어있었는데 상처가 커서 조만간 숨을 거둘 것이 분명했다.
살인도 무척 위중한 범죄 행위였지만,
그 남자의 신분이 정3품인 상호군 서응려라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였다.
“이제 어쩌시렵니까?”
부관은 정지상을 바라보며 물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다시 돌이킬 수 없다.
아니 그들이 공주에 오기 전에 전주에서 서응려의 형인 야사부카의 금패를 빼앗고 홍원철 등과 함께 옥에 가둘 때부터 일은 잘못됐다.
정지상이 빼앗은 금패는 원나라의 황제가 사신의 신분을 보증하는 패찰이었다.
어향사(御香使) 야사부카.
그는 황제의 명을 받고 명산을 찾아다니며 강향(降香)이란 의식을 치르는 이였다.
원나라에서 보낸 관리가 고려의 땅을 돌아다니는 것은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어향사에게는 접반사라 하여 고려 내에서 온갖 편의를 봐주는 관원 하나가 따라붙는다.
그게 바로 같이 옥에 갇힌 홍원철이다.
문제는 그 두 사람의 횡포였다.
야사부카는 홍원철과 함께 각지를 돌며 방종하고 난폭하게 굴었고 심지어 안렴사인 정지상에게 온갖 모욕과 꾸지람을 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정지상은 꿋꿋하게 인내했으나 홍원철이 자신을 모함하면서 일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나빠졌다.
“자네도 내가 저들의 횡포를 더 감내하고 참았어야 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아니옵니다.”
“원나라에서 온 사신인 천사(天使)를 경멸했다는 누명만 아니었으면 나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네.”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치욕스러웠다.
있지도 않은 일로 포박당하여 관아에 무릎이 꿇렸다는 것만으로 분노하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이번 일이 홍원철의 청탁을 들어주지 않아서 생긴 일이기에 더 어이가 없었다.
심지어 야사부카는 원나라 출신도 아니고 고려인으로 원나라에 귀화해서 출세한 이였다.
“하지만 기씨 가문을 전하께서 주멸(誅滅)하셨고 압록강 부근에 군사가 배치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너무 과했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하셔서는 안 될 말이었습니다.”
관청에서 포박당했을 때.
정지상이 관아의 향리에게 한 말이었다.
천사인 야사부카를 두려워해서 포박을 풀어주지 않기에 어깃장을 놓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의 말은 효과가 있기는 했다.
향리들은 뒤늦게 정지상을 풀어줬고 그 덕분에 야사부카와 홍원철이 오히려 갇히게 되었다.
하지만 정지상은 그 모든 것이 아예 없는 말이라 생각하지는 않고 있었다.
“자네는 정말로 기씨 일가가 조일신이 동원한 패거리에게 당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보았던 전하는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을 분이시네. 머지않아 고려는 원나라의 손아귀를 벗어나서 다시 예전의 영광을 누릴 것이네.”
“기철 등이 죽고 난 이후에 엄청난 양의 공물을 원나라 황제에게 보낸 것을 잊으셨습니까? 항간에는 직접 대도로 달려가 머리를 조아릴 기세였다고 하더이다.”
절대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이었지만,
정지상은 부관의 그런 말에 오히려 웃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예전에 본 것이 있기 때문이다.
대도에서부터 호종하던 그는 요동에 접어들 무렵에 한 사람의 최후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건 현재 해군에서 함대를 이끄는 주덕유가 부원배인 최유의 머리를 쪼개 놓는 장면이었다.
당장 살인을 고발하려던 그는 주덕유가 신소봉을 만나는 것을 보고 참아야 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당시에는 무슨 일인지 전혀 몰랐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전하께서 꿈꾸는 미래에 원나라는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행하시는 모든 일을 하나씩 나열해보니 모든 조각이 들어맞았다.
그리고 그날이 멀지 않은 것 같았다.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으나 느낌이 그랬다.
잠시 정지상이 아무런 말이 없자 부관은 제 발이 저린 지 말실수를 자인하며 사과부터 했다.
그런 뒤에 그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서응려를 흘깃 바라본 뒤에 어떻게 할 건지 물어봤다.
“이 자는 어떻게 할까요?”
“그냥 놔두거라. 운이 좋으면 살겠지.”
“살아남으면 후환이 될 것입니다.”
“서응려가 대호군의 지위를 이용하여 군대를 일으킬까 싶어서 왔으나 이런 꼴로 뭘 할 수 있겠나.”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전하께 모든 것을 소상하게 자복하고 죄를 지은 만큼의 벌을 받아야지.”
숨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부관은 고개를 저었다.
원나라의 어향사를 가두고 그의 동생까지 반쯤 죽여놨으니 아마 정지상을 비롯하여 그와 연관된 모든 이들에게 엄중한 형벌이 내려질 것이다.
거기에는 자신의 목숨도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뒤.
정지상은 궁궐에 들어와 내게 죄를 고했다.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듣던 나는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정지상이 저지르는 일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고려사에서 본 기억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당시에 내가 관심이 있게 보지 않았다는 것은 전체적인 역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던 일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냥 그를 풀어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일단 정지상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