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54
어쩐지 아침부터 싱숭생숭했다.
지난밤에 꿨던 꿈 때문인 것 같았다.
한낮이 되었는데 아직도 너무 생생했다.
꿈속에서 내가 본 것은 거대한 거북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거북이는 아니었다.
머리와 꼬리는 뱀과 같았는데 그걸 보는 순간에 곧장 떠오른 것은 사신도의 ‘현무’였다.
고구려 벽화에서 보았던 것과 흡사했다.
현무의 위용은 오금이 저릴 정도였지만,
그 눈동자는 온화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다가가서 등껍질을 만져봤다. 윤기가 흐르는 등껍질은 절대 부서지지 않을 것처럼 딱딱했다.
하지만 정작 현무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오로지 북쪽만 계속 바라볼 뿐이었다.
뭔가를 염원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현무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한 번 바라본 뒤에 분화구에 고인 투명한 물에 뛰어 들어갔다.
그곳에 한바탕 물장구를 치다가 물속으로 현무가 사라졌는데 그와 동시에 꿈에서 깼다.
확실히 범상치 않은 꿈이기는 했다.
‘설마 내가 태몽을 꾼 것인가?’
태몽(胎夢)은 아이의 미래를 예언한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이걸 누구한테도 말하지는 못했다.
일부 태몽은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남에게 알리면 역효과가 난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그런 미신을 믿는 것은 아니었으나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기에 입을 꾹 다물고 산실로 향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출산을 무사히 마친 뒤에 가진에게만 해줄 생각이었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며 걷자.
머지않아 산실이 마련된 곳에 도달했다.
원래 산달이 다가오면 친정 부모가 궁에 들어와 산바라지를 한다던데 가진은 그런 이가 없었다.
그나마 겁령구 몇 명이 그녀의 곁을 지켜주고 있었는데 그곳에 다가서자 추녀 끝에 달린 방울이 바람에 흔들리며 청아한 소리가 났다.
대애앵··· 대앵.
오늘 하루만큼은 듣지 말아야 할 소리였다.
대청에 걸린 방울의 목적은 가진이 출산 과정 중에 위급할 때 어의를 부르기 위함이었다.
벌써 산실은 상당히 분주해 보였다.
산통 때문인지 문 너머에서 가진이 고통에 겨워 신음하고 있는 것이 들리고 있었다.
마침 산실 안으로 들어가려던 궁녀가 보였기에 신소봉을 보내서 현재 상황을 물었다.
잠시 후에 돌아온 그는 내게 설명을 해줬다.
“이제 막 산통이 시작되었기에 적어도 한두 시진 정도 후에 해복(解腹)하실 것이라 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들어본 것 같았다.
진통이 오는 간격이 점차 짧아지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아기가 나온다는 것이 기억났다.
팔자에도 없는 왕 노릇을 하기 전에 내가 결혼을 했던 것도 아니고 당연히 자녀를 키워본 적도 없기에 모든 것이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는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산실에 들어가서 같이 있어 주고 싶었으나 왕실의 법도가 아니란다.
내가 그 앞에서 서성이고 있어서일까.
신소봉을 비롯한 안도치 등의 환관과 내관도 덩달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무통분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이 시대는 바랄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제왕 절개가 가능한 것도 아니다.
무조건 자연 분만을 통해 출산을 해야 하기에 가진이 힘을 내줘야 했다. 그런 탓에 혹시 잘못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역사에서 그녀가 죽는 이유가 난산이었기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출산 전에 준비한 게 있었다.
이번에 산실에 들어가는 이는 무조건 손을 씻는 등의 청결에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아직 세균이나 그런 개념이 없기 때문에 그걸 왜 하는 건지 제대로 이해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다들 오해를 했다.
부정을 씻어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걸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어떻게 생각하든 결론만 같으면 되었다.
세균이란 게 눈에 보이지 않았고 이 시대의 사람들은 질병도 괴력난신의 하나로 보았다.
그때 신소봉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잠시 들어가셔서 쉬시지요. 여기에 계신다고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안에서 저렇게 힘들어하고 있는데 잠시 서 있는 것이 무엇이 힘들다 할 수 있겠는가?”
“전하께서 계속 여기 계시면 산실에서 마마님과 아기씨를 돌봐야 하는 이들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신소봉이 낮은 목소리로 지적해준 덕분에 그제야 주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들 나 때문에 상당히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심지어 뜨거운 물을 들고 산실까지 뒷걸음질 치다가 넘어질 뻔한 궁녀도 있을 정도였다.
어쩔 수 없이 잠시 그곳을 나와서 자리를 옮기자 밖에서 대기하던 어의 몇 명이 보였다.
다들 긴장한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그중에는 이인복의 외종질인 설주도 있었다.
이인복의 말에 의하면 명의로 소문났던 설경성의 의술을 물려받은 어의인데 상약국(尙藥局)에서 의침사로 일하고 있다고 알고 있었다.
가진의 진료 때문에 종종 보기는 했으나 지금껏 직접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어차피 기다리는 시간이 무척 길어질 테니 그에게 다가갔다.
“감찰 대부의 외종질인 설주라고 했던가?”
“그러하옵니다.”
“의술이 뛰어나다는 말은 익히 들었소.”
“아주 작은 재주에 불과하옵니다.”
설주는 겸손하게 대답을 했다.
하지만 자신이 없어 보이진 않았다.
자세를 낮추어 공손한 자세로 있었으나 말투나 눈빛만 봐도 자부심이 느껴지는 이였다.
나는 한동안 그의 곁에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당연히 의학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의술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아니기에 주된 관심사는 의서에 있었다.
“의서를 구하기는 쉬운 편이오?”
이 시대는 서책이 무척 귀한 편이다.
책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필사하는 일은 상당히 지난(至難)한 일었고 아직은 활자를 이용해서 서책을 찍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기술이 없는 게 아니라 시간과 비용이 워낙 많이 들어가기에 솔직히 엄두가 안 났다.
애초에 한자는 활자에 어울리지 않았다.
알파벳과 달리 책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만들어야 하는 활자가 워낙 많은 탓이었다.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불심과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절실함 덕분이었다.
더구나 의서는 전문 서적이다.
성리학의 경서(經書)처럼 대중적으로 많이 찾는 분야는 확실히 아니었다. 그걸 알기에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고 설주는 예상대로 답을 했다.
“쓸만한 의서를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이며 대부분은 스승에게서 물려받고 있사옵니다.”
“요즘 어의들은 어떤 의서를 보고 있소?”
“소신의 경우에는 운 좋게 신라 시대에 편찬된 제중입효방을 구할 수 있었사옵니다. 그것 외에 어의촬용방과 향약구급방 그리고 요즘 유행하는 여러 향약방서를 구해서 공부를 하였사옵니다.”
향약(鄕藥)이란 국내의 약재를 뜻한다.
이 무렵에는 당약(唐藥)이라 불리는 원나라 약재가 아닌 고려 약재를 쓰는 것을 장려했다.
바다 건너오는 약재는 당연히 값이 비싸기에 의원들은 가능하면 국내에서 자라는 저렴한 약재를 찾아내서 약으로 쓰려고 했다.
그게 벌써 백 년 정도 전의 일이다.
시간이 적지 않게 흘렀기에 고려에는 향약을 이용한 방서가 적지 않게 시중에 돌고 있었다.
200년이 지난 뒤에 허준이 쓴 동의보감도 향약의 기조를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바꿔 볼까?’
이야기를 나눌수록 욕심이 났다.
곧 있을 전면적인 개혁에 의학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지만, 하루아침에 바뀔 문제는 아니기에 빨리 준비할수록 좋기는 했다.
고려가 세워질 당시에는 의학 교육에 상당히 많은 힘을 쏟았다. 그 중심에는 태의감이 있었는데 인종대 즈음에 의학(醫學)으로 분리를 하면서 제대로 후학 양성이 안 되고 있었다.
요즘 의원 대부분이 사적인 도제 형식으로 배출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나는 일단 그것부터 되살리고 싶었다.
아무리 인구가 늘어나고 있더라도 전염병이 크게 한 번 돌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와 함께 영유아의 사망률만 잡아도 고려의 인구는 대폭 늘어날 거라 예상되었다.
더구나 고려는 앞으로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르게 될 텐데 외상에 특화된 치료 기술을 가진 이들도 훨씬 더 많이 필요할 것이다.
당연히 이 시대에도 군의(軍醫)가 있었다.
하지만 그 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종군을 하는 것은 상당히 고된 일이라 의술을 가지고 있더라도 꺼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아예 군대 소속으로 양성하고 의무 복무로 20년쯤 묶어둬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이 들자 나는 슬쩍 설주를 떠봤다.
“과거 태의감에서 관리하던 의학을 성균관에 새로 만드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당연히 설주는 무척이나 반겼다.
생각보다 쓸만한 의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체계적으로 배우는 이들이 손에 꼽을 정도고 지방에서는 터무니없는 진료를 보는 의원이 명의 취급을 받고 있을 정도였다.
적어도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 제대로 배워서 의술을 펼칠 필요가 있었다.
“그럼 맡아서 해보시오.”
“소신보다 의술이 더 뛰어나고 그 자리에 더 어울릴 다른 어의도 많사옵니다.”
“의술을 펼치는 것과 알려주는 것은 또 다른 일이 아니겠소. 당분간은 현재 맡고 있는 상약국의 의침사와 의학박사를 겸직으로 맡으시오.”
내가 그를 성균관 박사로 제수시키자.
설주는 물론이고 인근에 있던 어의 대부분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다. 신소봉은 또 시작됐다며 고개를 젓다가 나한테 딱 걸렸다.
뜬금없이 관직을 제수하는 버릇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도 할 말이 있기는 했다.
어차피 맨땅에 헤딩하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것들이었기에 일단 시켜보고 안 되면 담당자를 바꾸면 되는 일이다.
그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적임자를 찾겠다고 머리를 싸매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뒤늦게 신소봉이 옆에서 눈치를 주자.
설주는 엎드려서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그의 뒤에 있던 다른 어의들의 눈에는 부러움이 가득했지만, 막상 저들이 설주의 자리에 앉으면 그런 생각은 안 들 것이다.
왜냐하면 설주가 앞으로 어떤 생활을 할지 눈에 뻔히 보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에게 당장 생각나는 것부터 지시를 내렸다.
의학을 배울 의생들을 위한 교재.
그리고 4년 반에 걸친 교육 과정의 준비.
거기에 더해서 지금까지 나온 향약방서를 모두 모아서 다시 편찬할 것을 지시했다.
최종 목표는 동의보감 같은 의학서였다.
국내의 약재를 모두 찾아내서 정리하는 것도 시키자 그제야 설주는 사색이 되었다.
“송구하오나 저 혼자서는 무리이옵니다.”
“설마 혼자서 다 하라고 하겠소?”
“혹시 염두에 두고 있는 이들이 있으시옵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다른 어의를 바라봤다.
그게 의미하는 것이 뭔지 설주는 단번에 알아차렸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서 궁궐에 있는 어의를 데려다 쓰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서책을 만드는 일은 따로 사람을 하나 붙여줄 생각이었다.
내가 현재 염두에 두고 있는 이는 얼마 전에 을과에 급제한 권중화라는 이였다.
의약에 정통하고 훗날 삼화자향약방을 편집하여 향약간이방을 내놓게 되는 인물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자리를 잡겠소.”
의학 이야기는 그쯤에서 그만뒀다.
가진의 출산을 지키려고 왔는데 여기서도 일 이야기만 계속한 게 찔렸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렸는지 산실로 돌아가는 길에 기다렸다는 듯이 갓 태어난 아이의 울음소리가 산실 안에서 들렸다.
응애애!
왕족의 피가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고개를 돌려 신소봉을 바라보자 그는 당장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고 산실에서 문을 열고 나온 궁녀에게 다가가서 몇 가지를 물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긴장되는 마음을 쉽게 감출 수 없었다.
공주일까, 아니면 왕자일까.
아니 그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가진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되는 마음에 천천히 산실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신소봉은 조금 전에 들은 내용을 내게 전달해주었다. 다행히 가진은 탈진을 하였을 뿐이고 며칠 쉬면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일단 가진의 상태를 확인하자 아이의 성별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다. 내가 그걸 묻기 전에 신소봉은 환하게 웃으며 입을 뗐다.
“감축드리옵니다. 원자 아기씨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