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52
고우성이 무너질 위기를 넘긴 뒤.
토크토아마저 경질되어 사라지자.
원나라의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보름 이상 공략했으나 무너지지 않은 고우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별로 의욕이 없는 것은 함락 직전에 퇴각 명령을 받은 고려군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원나라는 고려군을 아예 후방으로 돌렸다.
다시 내보냈다가 혹시라도 지난번처럼 성을 공략하는 데 성공하면 체면이 안 서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공략 직전에 물러서게 한 것도 억울한데 아예 공을 세울 기회마저 뺏겼다.
그래도 그 덕분에 고려의 병사들은 부상을 치료하고 숨을 돌릴 여유가 생겼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식량과 병장기 등의 보급 창고를 지키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모두가 침울한 것은 아니었다.
어딜 가나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원나라 병사 두 명이 뭐가 그리 좋은 건지 희희낙락하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두 병사 모두 꽤 젊어 보였는데 경쾌하게 걷던 그들은 누군가의 발에 걸려 크게 넘어졌다.
“아이고! 이걸 어째.”
넘어진 병사는 기겁하며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몸보다는 품에 있는 것부터 꺼내서 깨진 것은 아닌지 살폈다. 하지만 다행히 깨지진 않았는지 안에 담긴 것이 흐르지는 않았다.
화톳불 앞에서 지켜보던 병사들은 곧장 그것이 술병인 것을 알아보고 슬쩍 옆으로 다가왔다.
“그거 혹시 술 아닌가?”
“물을 담아 온 것이니 신경 쓰지 마시죠.”
“누가 물을 가죽 주머니가 아니라 그런 병에 담아서 다니나. 그러지 말고 우리한테도 조금 나눠주시게.”
병을 다시 품에 넣던 병사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혹시나 싶어서 고향을 물었다.
사투리가 꽤 익숙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혹시 요동 사람이시오?”
“어찌 알았는가.”
그들이 요동 출신이라고 밝히자.
두 명의 병사는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은 형제인데 어린 시절까지 요동에서 살다가 친척 집에 맡겨져서 현재는 북부 지역에 살고 있다고 밝혔다.
“말씀하시는 것만 듣고 딱 알아들었지요.”
“자자. 이쪽 자리에 앉으시게.”
“따뜻하니 좋네요.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실례는 무슨, 어서 와서 앉아.”
병사들은 서둘러 자리를 마련해줬다.
두 형제가 마음이 바꿔먹기 전에 앉혀야 했다.
그들이 마련해준 자리에 앉은 형제는 군관이 없나 주변을 살핀 후에 술병을 꺼냈다.
하지만 그걸 곧장 뜯지는 않았는데 그전에 주의를 시켰다.
“보시다시피 얼마 되지 않으니 다 같이 마시려면 양심껏 한 모금씩만 하시죠.”
요동의 병사는 모두 동의했다.
그런 뒤에 술병이 한차례 돌기 시작했다.
형제까지 모닥불에 앉은 이들은 여덟 명이었다.
하지만 한 바퀴 돌아서 다시 돌아온 술병은 1/3 정도만 비어 있었다. 다들 정말 입만 축일 정도로 마시고 옆으로 넘긴 것 같았다.
술병을 쥔 형제는 하소연을 했다.
“이거 구하느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어디서 구한 건지 우리한테도 알려주게나.”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선배님들은 배급을 제대로 받고 계신가요?”
“그럴 리가 있나. 승상께서 모함을 받은 후부터 보급 같은 것은 아예 신경도 안 쓰고 있잖은가.”
“빌어먹을 것들···”
안주는 뒷담화가 제격이었다.
술병을 들고 온 두 형제도 투덜거렸다.
그들은 모닥불 앞에서 여러 이야기를 했다.
모두가 요동 출신이라 고향 이야기가 많았는데 형제는 어린 시절에 고향을 떠났기에 대부분의 것들은 듣고만 있어야 했다.
“지난여름에 본계시 남쪽에 있는 관문이 산사태로 무너졌지 뭔가. 그래서 사람들이 왕래를 못해서 산길을 타고 넘어오다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이들이 허다해.”
“그걸 왜 그냥 놔뒀데요?”
“지방관이 마을 사람한테 공사비로 돈을 요구해서 그렇지. 자신이 원하는 만큼 주기 전까지는 그냥 놔둘 거라고 했다더군.”
“나도 그 이야기는 들었는데 마을 사람이 직접 하면 안 되는 건가?”
“원래 군대만 이용할 수 있는 통로에 세워진 군시설이라고 손도 못 대게 하니 어쩔 수 없지.”
주제는 상당히 다양한 편이었다.
술이 들어가서인지 다들 기분이 들떠서인지 각자가 받은 훈련이 어땠는지도 털어놨다.
역시 군대에서는 무용담과 함께 얼마나 자기가 힘든 곳에 있었는지 자랑하는 게 빠질 수 없다.
그들 사이에서 형제는 은근히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주제를 돌렸다. 이미 술맛을 본 이들은 그들의 손에 쥐어진 술병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상당히 독하기는 했으나 지금껏 맛보지 못한 맛과 향이 느껴지는 꽤 고급스러운 술이었다.
“어휴, 목 타시죠? 한 모금씩 더 하시죠.”
간혹 민감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잠시 머뭇거리면 술을 권하며 넘어갔다.
그들이 이렇게 술판을 벌일 수 있는 이유는 각지에서 군대를 끌고 온 이들이 편을 나누어 총사령관 자리를 탐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우성 공략은 이미 뒷전으로 밀려났다.
당연히 긴장감이 풀리고 군관들 역시 병사의 관리를 조금씩 소홀하게 하고 있었다.
심지어 일부 군대는 손을 털고 물러났다.
그렇게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자.
형제가 가지고 온 두 병의 술도 모두 끝났다.
그제야 병사들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일어섰다.
아무래 개판인 상태라고 하더라도 조만간 군관이 와서 취침 전에 인원 점검을 할 것이다.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괜히 밤에 싸돌아다니다가 오해받기 쉬우니 어서 가봐.”
“다음에 또 술이 생기면 올 테니 다치지 말고 몸조심하세요.”
“하하. 너희나 조심해.”
서로 덕담을 나눈 뒤.
형제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들은 곧장 자신들이 소속된 군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두 사람이 은밀하게 향한 곳은 인근에 있는 수풀이 가득한 덤불 안쪽이었다.
잠시 후에 그들이 다시 나왔을 때는 어느 사이에 고려의 군복이 입혀져 있었다. 두 사람은 그길로 고려군의 숙영지로 곧장 향했다.
가장 으슥한 곳에 있는 게르.
그곳에 도달한 두 사람은 주변을 살핀 뒤.
안으로 들어서자 감찰 어사 김첨수가 이인복과 함께 앉아서 뭔가를 살피고 있었다.
이번 출정에 포함되지 않은 김첨수까지 이곳에 있는 이유는 정보의 수집 때문이었고 조금 전에 들어온 두 사람도 그의 아래에 소속되어 있었다.
게르 안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다들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둘은 이인복 등에게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빈자리를 찾아 앉은 뒤에 종이와 연필을 꺼냈다.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이런 기회는 흔하지 않았다.
요동에 직접 간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정보를 캐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기밀에 가까운 정보도 아주 쉽게 내뱉을 정도였다.
같이 싸우는 한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무아지경에 빠진 듯이 적었다.
기억이 애매한 것은 서로 보완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지리에 대한 묘사와 군사의 현황 그리고 지방관의 성향과 각 마을의 인구 같은 것들이었다. 그렇게 적은 것은 감찰 어사 서호에게 정중하게 건넸다.
“요동에 관련된 정보입니다.”
“고생했네. 거기 놔두고 가서 쉬게.”
“수고하십시오.”
두 명의 병사가 게르 밖으로 나간 뒤.
서호는 그들이 적은 것을 한쪽에 분류했다.
현재 그는 모아진 정보를 요동과 요서 그리고 심양으로 분류해서 한글로 정리 중이었다.
쌍성총관부 너머까지 원래 고려의 땅이었다.
그곳은 지리 정보나 그런 것을 알아낼 필요가 없었으나 그 너머는 가지고 있는 정보가 많은 편이 아니었다.
이왕에 합법적으로 원나라에 들어왔으니.
가능한 많은 것들에 대해서 알아낼 생각이었다.
현지 출신의 병사들에게 들은 것들은 아주 단편적인 정보에 불과했으나 그걸 모아서 분석하는 것이 바로 감찰사에서 하는 일이었다.
그때 이인복이 서호에게 다가왔다.
“암호로 작성하는 것은 어디까지 되었소?”
“어제 들어온 것까지는 모두 정리해놨습니다.”
“곧 인안 장군이 고려로 복귀한다고 하니 그편에 보낼 준비를 해야 하오.”
“차질없이 준비하겠습니다.”
서호는 다시 연필을 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밖이 소란스러웠다.
한두 명이 내는 그런 소리는 아니었기에 서호와 이인복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곧장 느꼈다.
다급하게 게르 밖으로 나서니 멀리서 먼지구름이 커다랗게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거리가 멀어서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보통 저런 것은 병사들이 이동할 때 생긴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러는 거야?”
“혹시 외성을 함락시킨 것 아닐까.”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가깝잖아.”
병사들이 모두 걱정스럽게 바라볼 동안.
다른 게르에서도 이방실 장군 등이 모두 나와서 상황을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먼지구름을 뚫고 나타난 것은 원나라의 병사들이었다.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 달려야 할 이들이 혼비백산한 모습으로 역주행하고 있었다.
다들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뭔가 현실적이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고우성을 포위하고 있던 원나라의 병사는 거의 팔십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수의 대군이다.
성안에 틀어박혀서 농성을 하고 있는 장사성의 병사에 비해 수십 배나 많은 병력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쪽이 쫓기고 있었다.
이인복은 서둘러 이방실에게 다가갔다.
“장군, 지금 원나라의 병사들이 패퇴하는 것이 맞습니까?”
“누가 봐도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까.”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글쎄요···”
이방실은 잠시 상황을 파악했다.
현재 이곳에 있는 고려군은 약 2만 명이 조금 넘는데 그중에 1할은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그들 모두를 이끌고 나선다고 하더라도 밀려오는 장사성의 군사를 막는 것은 무리였다.
전쟁은 기세의 싸움이기 때문이었다.
“설마 퇴각하는 이들을 원호(援護)해주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몰살당할 각오를 하고 덤벼도 될까 말까 한 일인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서 고려군도 뒤로 물려야 합니다.”
하지만 이방실은 곧장 답하지 않았다.
아마도 뒤에 생길 일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
고려군을 지금 당장 뒤로 물리면 보급품을 챙길 시간은 없기에 상당수를 잃게 될 것이다.
그에 대한 책임을 물을 가능성이 있었다.
책임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이번 일 때문에 고려가 곤란스러운 일을 겪을 수 있었다.
이미 이방실의 주위에는 붕대를 감은 최영을 비롯하여 고려의 장수들이 모두 모여 있었으나 그걸 잘 알기에 누구도 재촉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명령이라도 따를 기세였다.
싸울 준비부터 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 순간이 되자 이인복은 출정을 떠나기 전에 전하께서 주었던 붉은 주머니가 떠올랐다.
만약에 이방실 장군이 머뭇거리거나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열어보라고 하셨는데 그게 지금인 것 같았다.
이인복은 서둘러 게르 안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평소 입지 않던 갑주가 있었다.
실을 봉해 놓은 것을 뜯어내고 안쪽으로 손을 넣자 손끝에 붉은 주머니가 잡혔다.
주머니를 열자 손바닥만 한 종이가 나왔는데 그걸 펼쳐본 이인복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안에는 계책 하나가 적혀 있었다.
“역시 전하는 종잡을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는 곧장 달려 나가서 그걸 건넸다.
이방실은 이인복이 손에 쥐여준 쪽지를 보고 뜬금없이 이게 뭐냐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뭡니까?”
“전하께서 출정 전에 이런 일이 있으면 장군께 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리 줘보십시오.”
이방실은 쪽지를 펼쳐봤다.
분명 전하의 글씨체가 맞기는 했다.
워낙 명필로 유명한 분이라 쉽게 알아볼 수 있는데 거기에 왕실 직인까지 찍혀 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만큼은 좀처럼 믿기 어려웠다.
곧 이방실도 이인복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순식간에 고민이 사라진 그는 서둘러 주변에서 명령만 기다리고 있던 장수들에게 명했다.
“고려군은 당장 최대한 보급품을 챙겨서 후방으로 물러난다.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라!”
이방실의 명령이 떨어지자.
장수들과 병사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이미 장사성의 군대가 근처까지 도달했는지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빨라도 고려군과 장사성 사이에 수십만 명의 병사가 있었다.
적어도 이곳까지 쉽게 밀고 들어오진 못 할 것이기에 아직 약간의 여유가 있기는 했다.
그 와중에 최영은 이방실 장군의 손에 쥐어진 쪽지를 살짝 엿볼 수 있었는데 거기에는 몇 글자만이 적혀 있었다.
[단공삼십육계(檀公三十六計), 주위상계(走爲上計, 전황을 살피다가 답이 없으면 도망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