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51
염제신이 그냥 돌아온 것은 아니다.
우리 쪽에서 사신을 보낸 덕분에 가능했다.
원나라의 황제는 내 부탁을 들어줬고 나이 많은 염제신은 무사히 다시 고려로 돌아왔다.
이미 그의 나이가 지천명(知天命)인데 이 시대 기준으로는 적지 않은 나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가 이번 정벌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연장자는 아니었다.
이방실이 그보다 몇 살 더 많기는 했다.
하지만 무관과 문관의 차이가 분명히 있었다.
아직 이방실은 현역에서 병사와 같이 훈련을 하고 있을 정도로 여전히 건재했다.
궁궐 내에 따로 자리를 마련한 곳으로 들어서니 얼굴이 많이 야위어 돌아온 염제신이 보였다.
보물로 지정된 초상화로 워낙 많이 봐서 그런지 어떤 이들보다 더 호감이 가는 이였다.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소.”
“전하께서 해주신 배려 덕분에 무탈하게 돌아올 수 있었사옵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자리를 권하며 내가 먼저 상석에 앉았다.
그러자 염제신은 내 앞에 놓인 탁자 반대편의 의자에 앉았는데 다리가 조금 불편해 보였다.
원래 관절염이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출정하면서 상태가 안 좋아진 것 같았다.
그 무렵에 내관이 차를 내왔는데 그걸 마시며 이번 여정에 대하여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병사들은 무사히 잘 도착하였소?”
“큰 문제 없이 연경(燕京)에 도달하였사옵니다.”
“다행이오. 가는 길에 군사들이 횡포를 부리지 않게 금지시킨 것은 잘 지켜졌소?”
“물론이옵니다. 대부분이 전하의 곁을 지키던 이들이라 군기 하나는 원나라의 어느 병사들과 비교해봐도 뒤처지진 않았사옵니다.”
그런 지시를 굳이 내린 이유가 있었다.
원래의 역사에서는 출정한 군사가 연경까지 향하며 패악질을 상당히 부렸다고 했다.
민가의 말을 빼앗고 먹을 것도 남아나지 않을 정도였다고 전해졌다. 그게 설령 원나라의 땅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하더라도 불필요한 오점을 남길 이유는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우리 고려의 군사를 최전방에 배치할 거라 하옵니다.”
“출정 전에 이미 예상하고 있지 않았소.”
내가 같은 입장이라도 그럴 것 같았다.
다른 나라에서 보내온 이들을 가장 피해가 많이 생기는 전방에 세우는 일은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당하는 입장이 되니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보급은 잘해주고 있는 편이오?”
“쌀에 겨와 모래가 섞인 것들도 종종 들어왔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사옵니다.”
“그걸 먹고 어떻게 싸울 수 있겠소.”
“하지만 다른 원나라의 병사들도 비슷하게 받고 있는 상태라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사옵니다.”
“그건 그렇고 모처럼 원나라에 다녀온 거라 알고 있는데 소감은 어떠하오?”
염제신에게 원나라는 낯선 곳이 아니다.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고려로 돌아와 자리를 잡았으나 누구보다 원나라를 잘 알았다.
어린 시절에 원나라에 있는 고모부의 집에서 자란 그는 태정제의 시종으로 있으며 총애를 받았고 상의사(尙衣使) 등의 관직도 얻었다.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염제신은 자신이 이번에 가서 보고 온 것을 털어놨다.
“모든 나라에는 흥망성쇠가 있사온데 원나라의 분위기는 하락세에 접어든 것 같사옵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오.”
“하지만 금방 무너지진 않을 것 같사옵니다. 이번에 동원한 병사가 백만 명이 넘어간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대국이 가지고 있는 저력은 확실히 무시할 수 없사옵니다.”
“백만 명의 군대를 실제로 보았소?”
“이야기 듣기로는 그 정도였는데 소신이 본 것만 해도 최소 오십만 명은 넘을 것 같사옵니다.”
정말 인구수 하나는 너무 부러웠다.
고려사에서는 이번 정벌에 동원된 수가 800만 명이란 수치가 적혀 있었으나 그대로 믿을 만큼 순진하진 않았다. 그게 진짜라면 고려 전체의 인구보다 많은 군대를 동원했다는 말이다.
거기서 한 자릿수를 줄이면 맞을 것 같았다.
그래도 적지 않은 숫자인데 80만 명이면 고려에서 징집 가능한 나이인 이십대에서 삼십대 남성을 모두 합친 숫자와 비슷할 정도였다.
‘인구가 꾸준하게 늘고 있어서 다행이지.’
지난해부터 인구가 빠르게 증가했다.
개경을 비롯해서 고려 전체에 갓 태어난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가득할 정도였다.
서너 집 건너 한 집씩은 최근에 아이를 낳거나 임신을 한 아낙네가 있었는데 점점 고려도 먹고 살기 좋아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제현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그는 충목왕 시절에 개혁 상소를 올린 적이 있었는데 20년 정도만 좋은 지방관을 선발한다면 백성의 삶이 달라질 것이라 했다.
감찰사가 활약한 것이 2년에 불과한데 이 정도면 그의 말이 틀리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몇 가지 더 질문을 했는데 현재 어디쯤 있을 것 같냐는 질문에 염제신은 잠시 날짜를 헤아리다가 대답했다.
“소신이 귀국할 무렵에 고우부(高郵府)로 출정을 떠났으니 지금쯤이면 거의 다 도달했을 겁니다.”
*
염제신과 대화를 나눌 무렵.
원나라에서는 치열한 전투 중이었다.
현재 고려군이 있는 지역은 고우성이었다.
그들은 장사성이 차지한 고우성을 놓고 원나라의 병사들과 함께 공략 중이었다.
하지만 좀처럼 함락이 되지 않고 있었다.
오늘까지 이십여 차례 시도를 했다.
하지만 장사성의 병사들 역시 필사적이었다.
생각보다 고우성의 병사들은 잘 싸우고 있었는데 처음부터 그들이 승리하진 않았다.
토크토아가 이끄는 병사가 막 도달했을 당시에 성 밖에서 정면으로 붙었을 때는 장사성이 크게 패해서 도망치듯 성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정작 그 이후로 성과가 안 나왔다.
피해는 점차 쌓여만 가고 있었다.
당연히 토크토아를 비롯해 원나라의 장군들은 점점 더 마음이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공성하는 이들이 불리한 것은 당연했다.
벌써부터 대도에서는 전황이 어떻게 되냐며 계속해서 사람을 보내어 물어보고 있었다.
더구나 벌써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겨울이 되면 문제가 많아진다.
성안에 틀어 앉은 장사성과 달리 토크토아의 병사는 그대로 추위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원래 예정대로면 올해 내에 끝내야 하는 토벌이었는데 점점 더 길어지고 있었다.
이대로면 일부 병사들은 천막이라 부를 수도 없는 곳에서 서로의 체온에 기대가며 자야 할 정도였다.
“더는 여유가 없습니다. 당장 모든 병사를 동원하여 고우성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오늘은 반드시 성벽을 넘어서겠습니다.”
“선봉은 정예병으로 구성된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목숨을 바쳐서라도 저 성을 승상께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이제 슬슬 고우성도 한계가 다가왔다.
그걸 잘 알기에 장수들은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경쟁하든 앞으로 나서서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토크토아가 보기에는 아직 멀었다.
적어도 며칠 정도는 더 공략을 해야 고우성을 넘어설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럴 거라면 굳이 아까운 병사를 잃을 필요는 없었다.
그는 오늘도 지원 온 병사를 쓸 생각이었다.
“서번과 회회군은 각각 북문과 서문을 지원하고 남문은 고려군이 지원하시오.”
말이 지원이지 앞장서라는 말이었다.
이방실은 그의 지시에 고개를 숙이며 알겠다며 대답은 했으나 썩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다.
선봉에 서는 것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이틀에 한 번꼴로 성을 공략하는 데 참가하고 있는 중이었다. 죽고 다치는 것도 문제였으나 피로도가 생각 이상으로 쌓였다.
하지만 지시를 안 따를 수도 없었다.
지휘자급 회의에서 돌아와서 결정된 내용을 전달하자 고려의 장군들은 불같이 화를 냈다.
이방실은 잠자코 듣고만 있다가 핏대를 세우고 있는 그들에게 호통을 쳤다.
“그렇게 불평하고 있을 시간에 고우성을 어떻게 점령할지나 고민하시오! 하루라도 빨리 장사성을 처치하면 우리도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그제야 다들 입을 다물었다.
대신 이방실의 말을 계속 곱씹었다.
빨리 상황이 정리되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에 모두가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으나 오늘의 공방전은 평소와 달리 분위기가 상당히 뜨거웠다.
“오늘은 반드시 고우성을 넘어선다! 모두 나를 따르거라.”
선봉에 선 장수들이 입을 모아 외치자.
고려의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때부터는 핏빛의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성벽 위에서 저지하려는 자와 어떻게든 그곳을 넘어서려는 이들로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이는 최영과 그가 이끄는 병사였다.
그들은 작은 상처 따위는 신경도 안 썼다.
몸이 날래기로 유명한 홀치보다도 더 빨랐다.
운도 상당히 따랐는데 투석기가 운 좋게 고려군이 공략 중이던 성의 한편을 무너트렸다.
경사가 제법 가파르긴 해도 사다리를 쓰지 않고 기어 올라갈 정도는 되었다. 당연히 최영은 부하를 이끌고 그곳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 그는 성벽의 한쪽을 확보했다.
부하들과 함께 그곳에 올라서는 순간에 최영은 이 싸움의 끝이 서서히 보이는 기분이었다.
이곳을 통해서 병사들이 성안으로 들어가면 고우성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일 것이다.
“이 자리를 지켜내야 한다.”
이건 방죽의 작은 구멍과 같았다.
일단 하나의 물줄기라도 뚫리게 될 경우.
수압에 의해서 구멍이 점차 넓어지다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게 되는데 성벽을 놓고 싸우는 것도 그와 비슷하다고 보면 되었다.
최영과 그의 수하들은 뒤이어 올라오는 이들을 위해서 성벽 위에서 죽을힘을 다해서 싸웠다.
뒤이어 올라온 변안열이 홀치를 데리고 합세하자 그들이 맡은 남문을 오늘에야말로 무너뜨릴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부우우웅!
그때 멀리서 퇴각을 알리는 신호가 왔다.
최영은 처음에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 생각했다.
거의 성문을 뚫어내기 직전인데 뒤로 물러서란 신호가 오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변안열이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퇴각 신호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제기랄!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단 말인가.”
“장군, 아래쪽에서도 원나라의 장수가 와서 퇴각을 종용하고 있습니다.”
최영은 아래를 슬쩍 내려다봤다.
그러자 이방실 장군이 원나라의 장수 하나와 거의 멱살을 잡을 기세로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이방실은 퇴각을 명령하는 깃발을 흔들 수밖에 없었다. 고우성 남문 공략의 책임자는 그가 아니라 원나라의 장수였다.
성벽 위에서 지켜보던 변안열은 어떤 상황인지 눈치챘다.
“저들이 우리가 공을 세우는 것은 두고 볼 생각이 없나 봅니다.”
“대인(大人)이란 말을 듣기 좋아하더니 속은 밴댕이만 한 족속들 같으니! 누구는 좋아서 고려에서 여기까지 왔다던가.”
“일단 복귀하시죠.”
동료의 피와 시신을 밟고 올라왔다.
그런데 이렇게 허무하게 돌아서야 하다니,
울분이 치솟았으나 이곳에서 더 있어 봐야 앞장서서 달려온 부하들만 잃을 뿐이었다.
뒤에서 추가로 병력이 들어오지 않으니 모든 공격이 성벽 위로 올라온 이들에게 집중됐다.
그들끼리 성 전체를 점령할 수도 없었다.
더 늦기 전에 되돌아가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최영과 변안열은 목소리 높여서 명령했다.
“모두 퇴각하라!”
전공을 고려군에게 빼앗기기 싫다.
단순히 그 이유로 벌어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날이 어두워졌다는 핑계로 원나라의 장수들은 승상의 명령을 받기도 전에 고려의 병사들을 뒤로 물렸다.
성벽 한쪽이 무너졌으니 다음날에 공략하면 쉽게 고우성을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뒤에서 받치고 있던 다른 고려군이 도와준 덕분에 최영과 변안열을 비롯해 병사들 대부분이 무사히 돌아왔다.
하지만 생각보다 하룻밤은 길었다.
장사성은 모든 역량을 다 동원해서 무너진 고우성의 성벽을 밤사이에 복구했다.
오히려 전보다 더 방비가 강해진 느낌이었다.
당연히 다음날에 모든 성문을 원나라의 병사들이 동시에 공격했으나 당연히 실패했다.
한 차례의 결정적인 기회를 놓친 것이었다.
함락 직전에 발길을 돌린 여파는 컸다.
과거에 토크토아 때문에 승진에서 누락되었던 경력이 있던 하마(哈麻)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기황후에게 3월에 출병한 후에 아무런 전공이 없는데 이번에도 함락되기 직전에 군사를 뒤로 물렸다는 이유로 참소를 했다.
그 결과 토크토아는 삭직(削職)되었다.
원나라를 어떻게든 지탱하고 있던 거대한 기둥 하나가 볼품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역시 내부의 적이 가장 무서운 것이었다.
이인복은 작은 언덕에 올라 사기가 완전히 떨어져 버린 원나라의 진영을 보며 크게 웃었다.
“원나라도 정말 예전 같지 않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