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50
출정 준비는 순식간에 이뤄졌다.
솔직하게 말하면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이번에 보내는 병사들은 8월 초 열흘까지 연경에 도달해야 한다. 황제의 명령이라 집합해야 하는 날짜에 무조건 맞춰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일정을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간 교역과 경매 등을 통해 얻은 재물로 틈틈이 마련을 해놓은 무기와 말이 있기 때문이었다.
원나라에서는 손실을 보충해주기 위해서 공부시승을 보내어 보초 6만 정을 가지고 왔다.
원정을 나서는 이들에게 나눠주라는 의미였는데 의미 없는 짓거리였다. 가치가 사라져 종잇조각에 불과한 것으로 생색을 내려 하는 것이다.
괜히 그걸 나눠줘봤자 욕만 먹을 것이다.
이미 욕은 충분히 먹고 있었다.
‘뭔 놈의 상소가 이렇게 많아?’
앞에 쌓인 상소를 보니 한숨만 나왔다.
이번 출정에 대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부 부원배들은 원나라의 부마국이니 더 많은 병사를 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나머지 대부분은 규모를 오히려 줄였어야 했다면서 나를 압박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미 결정된 출정을 취소해야 한다는 주장도 일부 있었다.
나라고 그들이 아깝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기철 등을 처치하고 기황후와 틀어졌고 원나라를 옹호하던 부원배 다수가 이런저런 사고와 역모의 혐의로 죽었다.
여기서 출정을 거절한다거나 망설이는 모습을 보여주면 과연 그들이 어떻게 나올까.
그나마 고려에 대해 그리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황제마저 등을 돌릴 가능성이 있었다.
그때는 진짜 싸울 각오를 해야 한다.
그냥 다 같이 죽자는 것밖에 안 된다.
원나라가 망하는 것은 수십 년이 지난 뒤다.
모든 일에는 때와 시기가 있는 것이고 북부에 있는 쌍성총관부와 심양이 아직 건재한데 배 째라는 식으로 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병사도 이번에 차출되었다는 소식이 있었으나 1년이면 이번 원정이 끝난다.
아직 이자춘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들의 칼날이 고려로 향하면 답이 없었다.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상소문 가운데 하나를 집어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원나라가 반역의 무리 때문에 정신이 없으니 그들의 연호를 정지하자고 적혀 있었다.
“아주 지들만 똑똑한 줄 알지.”
누군 하고 싶지 않아서 참고 있나.
혀를 가볍게 나불거리는 이들을 모두 끌어내서 주둥이를 꿰매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만약에 여기서 반기를 든다고 치자.
다른 곳도 아니고 연경에 병사가 모여 있다.
그곳에서 장사성와 고려를 놓고 보면 거리도 엇비슷한데 소집된 병사 중에 10만 명만 이쪽으로 돌려도 그냥 폭망이라고 보면 된다.
아직 그 정도의 준비까지는 안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만든 모든 신무기를 투입한 뒤.
정예병 전부를 잃을 각오로 싸워도 5만 명 이상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지금은 머리를 숙여서라도 황제가 의심하지 않게 해야 했다.
더럽고 아니꼬워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괜히 공민왕이 즉위 후에 5년 가까이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주덕유가 우리 쪽에 있었다.
과연 탕화가 어느 정도 빈자리를 채워줄까.
원나라가 파멸할 거라는 예상은 아직 거두지 않았으나 그게 언제인지 알 수 없었다.
더 빨라질 수도 있고 약간 느려질 수도 있기에 바뀌고 있는 역사를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출정식에 가실 시간이옵니다.”
의관을 갖추고 잠시 그런 생각을 할 무렵.
신소봉이 다가와서 시간이 되었다고 알려줬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후에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서니 구정에 장수들이 나열해 있었다.
오십여 명의 장수들 뒤에는 최하위 지휘관이라 할 수 있는 종9품의 대정(隊正)이 서 있었다.
‘뱃사공이 많으면 산으로 간다던데···’
모두 합쳐서 백오십 명에 불과했지만,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거의 수십만 명의 군대를 이끌어도 부족하지 않을 것 같았다.
병사가 부족할 뿐이지 그들을 이끌 이들은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하지만 지금 그들에게 그런 병사를 준다고 제대로 이끌 수 있을 거라 생각지는 않았다.
아직 만 명 단위의 전투도 경험이 없었다.
지금까지 많아 봐야 수천 명 단위의 전투만 몇 번 경험해봤을 뿐이었다. 수십만 명의 군대를 운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식사와 보급 그리고 숙영까지 규모의 차이가 상당하니 준비 과정 같은 것도 다를 수밖에 없다.
병사들의 실전 경험 못지않게 장수들도 이번에 배울 것이 상당히 많았다.
나는 천천히 걸어서 그들 앞에 섰다.
그러자 이방실이 대표로 앞으로 나섰다.
경력만 보자면 인당이나 유탁이 맡아도 이상할 것이 없으나 이번에 출정에 나서는 병력의 절반 이상이 이방실이 손수 키운 병사들이었다.
진법부터 시작해서 병사들의 역량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그가 통솔하는 것이 맞았다.
그는 병사들의 앞에 서서 경례를 올렸다.
“충(忠)!”
한차례 그의 선창이 있자.
모두가 입을 맞춰서 크게 소리쳤다.
궁궐 안에서 쩌렁쩌렁한 소리가 울리자 나무에 걸터앉아서 꾸벅이던 새들이 화들짝 놀라서 동시에 날아갔다. 그걸 본 나는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예상해서 다행이라 생각되었다.
‘가진을 잠시 후원으로 보내놔서 다행이지.’
그래도 이들을 탓할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의 경례를 받은 후에 나열한 이들의 얼굴을 한 번씩 바라보며 기억하려 애썼다.
여기 있는 이들 가운데 누군가는 죽을 것이다.
원래의 역사에서 살아 돌아왔다고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안심할 수 없었다.
장수들의 무장은 평범한 편이었다.
이번 출정에는 신식 무기를 보급하지 않았다.
당연히 화포는 제외되어야 하는 것이었고,
아직 비밀로 놔둬야 하는 수노기와 개량형 쇠뇌를 선보이는 것도 조금 뒤로 미뤘다.
그런 것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나와야 효과가 가장 좋기 때문이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나열해 있는 이들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내가 저들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고려를 위해 싸우러 가는 출정이 아니라 목숨을 바쳐서 싸워서 이기고 오라고 말하긴 싫었다.
어떻게든 이 전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돌아오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이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살아 돌아오시오. 다시 이 자리에서 만나길 고대하고 있겠소.”
일장 연설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짧은 말에 불과했으나 진심은 전달됐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이 내 주변에서 숙위하던 이들이었고 장수들은 훈련도감 등을 핑계로 수없이 많은 회의를 가졌던 이들이었다.
이방실도 그걸 알기에 다시 한번 내게 경례를 한 뒤에 곁에 있던 병사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가 커다란 뿔로 만들어진 호각(號角)을 불자 커다란 저음이 궁궐에 울려 퍼졌다.
그걸 신호로 병사들은 움직였다.
이방실을 선두로 해서 하나둘 궁궐 밖으로 빠져나가자 밖에서 기다리던 이천여 명의 병사가 목이 터지라 함성을 지르며 그를 반겨주었다.
나 역시 그들과 함께 영빈관까지 배웅을 하기 위해서 말을 타고 움직이자 개경의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병사들을 배웅을 하고 있었다.
“아이고··· 순덕아 꼭 살아서 돌아와!”
“서방님, 기다리고 있을게요.”
“장군님들! 우리 손자 잘 좀 부탁합니다.”
“다들 살아 돌아오세요.”
모두가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개경이 눈물로 잠길 것 같아 보였다.
이번 출정을 떠나서 죽으면 개죽음이라는 것을 다들 알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이역만리 떨어진 타향이었다.
그곳에서 죽으면 혼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우려하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
그들 중에는 당연히 장수들의 가족도 있었다.
이제 신혼에 불과한 변안열의 아내.
원주 원씨가 눈물을 흘리고 있자 비슷한 시기에 혼인을 한 주덕유의 안사람인 이연이 달래주고 있는 것도 보였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가 이제는 슬슬 그들을 보내줘야 할 때가 다가왔다.
영빈관을 지나기 전에 나는 이인복을 불렀다.
그가 떠나기 전에 줘야 할 것이 있었다.
“이것을 가져가시오.”
내가 내민 것은 붉은 주머니였다.
이인복은 그게 뭔지 무척 궁금해했다.
받아든 주머니는 무게감이 전혀 없기에 뭐가 들은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당장 열어보고 싶어 하는 눈치라 만류해야 했다.
“지금 보지 말고 결정적인 순간에 이방실 장군이 선택하기 어려워하면 펼쳐보시오. 이게 도움이 될 것이오.”
이인복은 알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곧 행렬의 속도를 맞추기 위하여 말을 몰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잠시 후에 행군을 하던 행렬의 끝부분이 모두 궁궐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들이 지난 자리에는 뿌연 먼지와 고작 백여 명의 홀치와 그들을 이끄는 이원림만 남았다.
‘이제부터는 하늘에게 맡길 수밖에···’
*
고려를 지키는 칼과 방패.
모두가 원나라로 떠나니 꽤 허전했다.
항상 내 옆에서 의견을 주던 이인복과 나의 안위를 지키던 이방실은 존재감이 상당했다.
그렇다고 이원림이나 감찰 대부의 대행을 맡은 김속명이 못 미덥다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가진이 현재 회임 중이기에 이원림은 요즘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숙위를 더 철저하게 했다.
그녀의 몸 상태는 철저하게 관리됐다.
배 속의 아이가 어떻게 되냐에 따라서 여러 목숨이 걸려 있다고 봐도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곳은 당연히 어의들이다.
상약국이나 태의감에서는 가진의 건강을 위해서 아침저녁으로 찾아와서 살필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 마음대로 약을 쓸 수는 없었다.
탕약을 하나 쓸 때마다.
나한테 재료를 검토받아야 했다.
한의학을 못 미더워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쪽에 관련된 지식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절대 들어가면 안 되는 것이 있는지 확인해야 그나마 안심이 됐기 때문이었다. 그런 나를 보고 가진은 유별나게 왜 그러냐며 웃었다.
“어련히 알아서 약을 쓰지 않겠습니까?”
“요즘 들어서 식사량도 줄고 숨이 가빠지니 걱정이 되니 그러오.”
“이 무렵에는 다들 그렇다고 합니다.”
가진은 웃으며 나를 다독였다.
오히려 그녀보다 내가 더 긴장하고 있었다.
우리 둘 다 부모가 되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래도 가진은 꽤 의연하게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벌써 출산일이 다가오다니 믿어지지 않소.”
“전하께서는 벌써 인지 몰라도 저는 무척 오래된 기분입니다.”
“하하. 미안하오.”
“그런데 만약에 공주면 어떻게 하죠?”
요즘 가진의 고민은 거기에 있었다.
어렵게 회임을 했는데 만약에 왕자가 아닌 공주면 나를 비롯해서 어머님이신 명덕태후께서 실망하실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신경이 안 쓰인다면 거짓말이었다.
가진의 체질상 임신이 쉽지 않아 보이는데 가능하면 왕자가 태어나길 바랐다.
그러나 그런 말을 그녀에게 할 수는 없었다.
한참을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자 식사 준비를 마쳤다며 내관이 알려줬다.
내가 들여오라고 하자 가진은 꽤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전하께서도 여기서 석반(夕飯)을 하실 것이옵니까?”
“같이 식사하는 것이 싫은가 봅니다.”
“저야 좋지요.”
“오늘 식사는 조금 특별할 것이오.”
가진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미리 알려줘서 김을 새게 할 필요는 없었다.
잠시 기다리자 수라상을 든 이들이 들어왔는데 그곳에는 나무 뚜껑이 올려진 돌솥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그릇에는 잘게 잘라서 미리 마련해 놓은 각종 채소와 참기름이 있었다.
이 조합이 의미하는 것은 뻔했다.
고려에서 재현한 돌솥비빔밥이었다.
이 무렵에는 아직 돌솥과 비빔밥이 없었다.
두 가지 모두 처음 기록된 것이 조선 시대였다.
하지만 요즘 가진이 식욕이 없어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다고 하기에 준비시킨 것이다.
이걸 위해서 석공 몇 명이 며칠 동안 돌을 깎아내야 했고 궁궐에서 음식을 만드는 이를 잡고 입이 닳도록 설명을 해줘야 했다.
직접 만들면 편할 텐데 내가 직접 음식을 조리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게 무엇이옵니까?”
가진은 처음 보는 음식에 호기심을 보였다.
나는 기미를 하는 궁녀가 자신의 할 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린 후에 직접 시범을 보여줬다.
일단은 각각 조리된 채소를 조금씩 덜어서 돌솥에 넣고 간장과 참기름을 부어서 섞었다.
바닥에 이미 누룽지가 생겼기에 구수한 냄새가 올라오자 나도 모르게 군침을 꿀꺽 삼켰다.
‘얼마만의 비빔밥이던가···’
고추장이 없어서 아쉬웠지만,
없는 대로 된장과 매실청도 살짝 넣었다.
가진에게 선보이기 전에 연습 삼아 만든 것을 한 번 맛 보았는데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다.
그렇게 혼합한 음식을 가진에게 맛보라며 내밀자 그녀는 살짝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정갈한 궁중 음식과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오이와 가지 그리고 다래와 냉이, 더덕 등을 포함해서 온갖 재료가 섞여 있으니 그럴 만 했다.
나와 식습관이 비슷한 그녀는 채소보다는 고기 종류를 선호했기에 그다지 먹고 싶지 않아 했다.
하지만 맛 하나는 자신 있었다.
“보기에는 썩 좋아 보이지 않아도 맛있으니 한번 잡숴 보시오.”
“입맛은 없지만··· 그래도 맛만 보겠습니다.”
“드십시다.”
가진이 수저를 들자 나도 한술 떴다.
비빔밥은 돌솥이라는 나의 소신은 맞았다.
바닥에 눌었던 밥알이 바삭거리며 씹히는 식감 덕분에 가진도 상당히 마음에 든 것 같았다.
평소에는 몇 숟갈 뜨지 못하던 그녀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낼 정도로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이렇게라도 채소를 먹으니 다행이었다.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보기와 달리 맛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내수사를 통해 팔아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돌을 깎아서 만드는 거라 쉽진 않습니다.”
“그만큼 비싸게 팔면 되겠지요.”
가진은 자신의 생각을 털어놨다.
주점 같은 곳에서 돌솥을 이용해서 음식을 판매하면서 홍보를 하면 좋겠다고 했다.
기존의 연탄을 홍보하려고 생선구이를 굽다가 오히려 석쇠가 엄청나게 팔렸던 것을 보고 떠올린 생각인 것 같았다.
“내수 전수와 함께 상의해봅시다.”
아무리 물건이 좋아도 판매가와 원가가 좋지 않다면 팔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 가능성에 대해서 섣불리 추측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식사가 마무리되었는데 차를 내온 신소봉이 뭔가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언제 말해야 하나 고민이 될 때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잘 알기에 뭐냐고 물었다. 그러자 신소봉은 방금 들어온 소식을 알려주었다.
“우정승 염제신이 돌아왔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