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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49화 (49/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49

날이 뜨거워지는 초여름 무렵.

원나라에서 채하중이 돌아왔다.

그가 보인 행동은 역사와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든 다시 권력을 되찾기 위해서 그는 원나라에서 고려를 팔아먹고 왔다.

역시 나라를 팔아먹는 짓거리도 부지런해야 가능했다.

쓸데없이 능력도 좋은 편이었다.

원나라의 승상에게 고려의 조정군을 받아 오라는 지시를 받고 사신 자격으로 돌아왔다.

채하중은 도당에 들어와 승상 토크토아가 한 말을 내게 그대로 전달해주었다.

[황제 폐하의 명령을 받아 남쪽으로 원정을 떠나니 국왕께서는 마땅히 정예군을 보내어 도와주셔야 합니다. - 고려사 1354년 6월 신묘일]

그들도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하남에서는 한산동과 한교아가 반란을 일으켰고 영천에서는 유복통의 홍건적이 그리고 산동에서는 장사성 등의 기세가 엄청났다.

더는 지방에서 일어난 작은 소요가 아니다.

서둘러 불을 끄지 못하면 타죽게 생겼다는 위기감이 원 황실에도 생긴 것이다.

“갑자기 2천 명이나 되는 병력을 차출해서 보내라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원나라에서 역적들을 소탕하려고 하는 병력을 생각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한 수준이옵니다. 그리고 5천을 바라는 것을 소신이 필사적으로 줄인 것이니 더는 축소할 수 없사옵니다.”

“당장 내보낼 병력이 없지 않소.”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개경에 있는 순군만호부를 제외하고 홀치와 용호군 그리고 응양군만 보내도 그 정도는 되지 않습니까.”

“그들은 전하를 지켜야 하지 않소!”

이방실이 격노하여 항의를 했지만,

채하중은 늙은 구렁이처럼 유연하게 넘겼다.

고려에서 가장 강한 정예이자 궁궐을 지키는 모든 병력을 가져가겠다는 것이니 이런 반응이 나올 거라고 충분히 예상하고 왔을 것이다.

그들을 떼어내면 지금까지 애써서 쌓은 왕권에 금이 갈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걸 흔쾌히 승낙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좋소이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오.”

고려에게 이번 출정은 꽤 중요했다.

어렵게 키워낸 병사를 남의 땅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우게 하는 것이 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얻어내는 것도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원나라가 예전처럼 강성하지 않다는 것을 다들 느끼고 와야 했다.

커다란 공포는 대를 이어서 물려받게 된다.

나도 그 부분은 이해하고 있으나 생각보다 원나라의 현실을 잘 파악하고 있는 이가 없었다.

사신으로 원나라를 아무리 오가도 대도에만 머물고 있다면 절대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다.

원래의 역사에서도 이번 원정을 통해 현실을 파악하고 돌아온 이들이 개혁의 동력이 된다.

‘거기에 실전 경험은 덤이지.’

이것도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다.

군대의 존재마저 사라진 고려였다.

제대로 된 전투를 펼친 적이 얼마 전일까.

왜구를 쫓아내는 소규모 전투를 제외하면 거의 백 년 전까지 찾아봐야 할 정도였다.

전쟁에서 장수도 중요하지만,

경험 많은 병사도 상당히 중요하다.

수십 명 단위를 이끄는 이들이 제대로 움직여야 큰 그림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덤으로 고려의 유민으로 구성하게 될 2만 명의 병사를 다시 고려로 끌어올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이번 원정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경우.

고려에서 오히려 모셔와야 할 인재들이었다.

모두가 다시 고려로 돌아오진 않겠지만, 경험 많은 병사는 언제든 환영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제현을 비롯한 대부분이 반대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지금 잠잠한 것은 전장에 직접 나가야 하는 무장들이었다. 이런 일이 있을 거란 것은 예전부터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다.

원나라에서 조정군 요청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낸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봄부터 그런 동향이 보이긴 했다.

그때부터는 출정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식량과 보급은 판도사에서 책임을 지게 될 예정이었고 화살과 활 같은 무기는 당연히 군부사의 관리들이 준비를 해줘야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넉넉하게 식량 등을 챙겨주라는 말을 했는데 누군가 딴지를 걸었다.

“금년에 가뭄이 너무 심하여 그럴만한 여유가 없사옵니다. 근래 들어 이앙법으로 전환하다가 한해 농사를 망친 곳이 허다합니다.”

누가 아픈 곳을 찌르나 봤더니,

눈엣가시 같은 인승단이 하는 말이었다.

파병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슬쩍 돌려서 까는 화법은 정말 짜증 났다. 안 그래도 가뭄 때문에 최근에 상당히 큰 타격을 받고 있었다.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고려 전체에 금주령이 내려지고 수라상의 반찬도 줄어들었다.

기우제도 올려야 했는데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얼마 전에 제법 큰 비가 왔다는 것이다.

조금 뒤늦은 감이 있었으나 만약 그마저도 안 왔다면 올해 고려의 양곡 농사는 폭망할 뻔했다.

이왕에 그 이야기가 나왔으니 나는 채하중에게 작은 거래를 제안했다.

“군사를 천 명 정도 더 보내는 대신에 이번 출정의 군량미는 원정을 통솔하는 승상께서 책임지시는 것은 어떠시오?”

“군량미면 되옵니까?”

“조금 전에 들었다시피 올해 고려에 가뭄이 심해서 그러니 승상께 잘 이야기해주시오.”

내 제안을 받고 채하중은 살짝 고민됐다.

안 그래도 원나라에서도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는 탓에 식량이 넉넉하진 않았다.

최근 들어 가뭄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지시를 받은 것보다 더 많은 병사를 데려가면 모든 것이 자신의 성과가 되니 쉽게 거절하기 어려웠다.

공을 세울 기회를 그냥 날리긴 싫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최대한 노력 해보겠사옵니다.”

*

그로부터 며칠 뒤.

원나라의 사신이 추가로 들어왔다.

이부낭중 카라노카이는 이번 파병에 보내야 할 50여 명의 장수들의 목록과 함께 서경에 소속된 해군 300여 명을 포함할 것을 요구하였다.

거기까지는 크게 문제가 안 되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들이 기어코 선을 넘네.”

최영과 이방실 그리고 변안열.

안우와 정세운 같은 이들은 이해되었다.

모두 고려를 대표하는 장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탁과 염제신은 역사에서 이미 출정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그들의 지략을 높게 평가한다는 개소리가 적혀 있었는데 거기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나이가 많은 염제신은 과거 공민왕이 했던 것처럼 돌려보내 달라고 사신을 보내서 요청하면 결국에는 고려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이인복을 원할 줄은 몰랐다.

거기에 황상을 비롯해 감찰사에 소속된 서호와 전녹생 등의 어사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이번 일의 목표가 나의 왕권을 흔들기 위함이라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있다면 해군에 소속되어 있는 김휘남과 주덕유는 사신이 가지고 온 목록에 없다는 것이었다.

아직 해군과 그들에 대한 정보가 원나라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덕분이었다.

정작 이인복은 자신이 출정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크게 동요치 않았다.

“이번 기회에 원나라의 속사정을 살펴보고 오는 것도 좋다고 생각되옵니다.”

“속 편한 소리를 하는구려.”

“당장 어떻게 할 방도가 없지 않사옵니까.”

“그러니 더 답답하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급소를 크게 한 방 맞은 느낌이었다.

그만큼 이인복은 내게 중요한 인물이다.

모든 계획의 근간을 마련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감찰사이고 그걸 이인복이 통솔하고 있다.

더구나 원나라에서는 그를 데려가는 것도 모자라서 채하중을 첨의정승에 올리라고 압박까지 하고 있는 중이었다.

차마 그 꼬락서니는 볼 수 없었다.

“감찰 대부의 자리는 비워둘 것이오.”

“고신(告身)에 서명(署名)하지 않으면 등용될 수 없는 점을 노리시는 것이옵니까?”

“그대가 돌아오기 전까지 관직의 이동은 없다고 말하면 채하중 그 작자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지 않소?”

“하하. 묘책이옵니다.”

어차피 주요 관직은 다 채워져 있다.

이번 파병에 나서는 이들도 대부분 무신이다.

염제신의 자리는 이공수가 잠시 맡고 이인복의 자리는 비워둔 뒤에 아래에 있는 다른 어사 가운데 한 명이 맡으면 될 일이었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나름의 뒤끝이었다.

하지만 이인복은 다른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궁궐의 숙위는 어쩌실 생각이옵니까?”

이번에 원나라로 보낼 3천 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홀치와 응양군으로 채워졌다.

치안을 맡은 순군만호부를 제외하면 궁궐을 지키는 병사가 모두 합쳐봐야 백여 명이었다.

그들을 지휘할 이방실과 정세운도 모두 원정에 포함되어 있기에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다.

아무리 그들의 빈자리를 이원림과 윤해가 맡을 예정이라도 불안한 것은 사실이었다.

윤해는 주덕유의 부관으로 있는 윤호의 아버지였다.

‘원래의 역사에서도 서해도(西海道)의 궁수(弓手)를 모집하기는 했었지.’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최영이 남해를 지킬 목적으로 지난 두 해 동안 모아온 병사가 있다. 이제는 거의 삼천 명에 달할 정도이니 그들 중에 일부를 부르면 된다.

그가 모집한 군사는 훈련도감이 만든 교본에 따라서 상당히 오랜 시간 훈련과정을 거쳤다.

아직은 고려의 최강 무력 집단인 홀치만큼의 경지에 오르진 않았으나 정예라 불릴 정도의 수준은 되었다.

“그들이라면 안심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인복도 그부분에는 동의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를 데려올 수는 없었다.

남은 병사들은 출정에 차출된 최영을 대신하여 홍언박과 서달을 보내서 맡기기로 했다.

서달도 고려에 넘어온 지 2년 가까이 됐다.

슬슬 군사를 이끌고 경험을 쌓을 시기였다.

하지만 당장 그가 맡기에는 조금 많은 숫자라 홍언박을 같이 보내야 했다.

아마 실전 경험은 원 없이 쌓을 것이다.

최근 들어 왜구가 다시 빈번하게 쳐들어왔다.

한차례 이키와 대마도에서 무력시위를 했음에도 아직 크게 한탕 하려고 하는 이들이 많았다.

심지어 두어 달 전에는 40여 척에 달하는 조운선을 털어가려는 시도가 있었을 정도다.

김휘남의 함대가 호위하고 있어서 다행이었지 안 그랬다면 모두 털릴뻔했다.

안 그래도 가뭄 때문에 쌀값이 폭등했다.

유비창을 털어서 헐값에 백성들에게 내주고 있었는데 조운선마저 왜구들에게 모두 털렸다면 정말 타격이 컸을 것이다. 이놈의 섬나라 왜구들은 바퀴벌레처럼 생명력이 너무 강했다.

계속해서 때려잡아도 자꾸 기어 나왔다.

“기분 전환을 하실 겸 이걸 보시옵소서.”

이인복이 품에서 서신을 하나 꺼냈다.

그게 뭐냐고 묻자 그는 대도에 있는 김첨수가 보낸 서신이라고 했다. 안 그래도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기에 그걸 받아서 곧장 펼쳤다.

거기에 적힌 글씨는 한문이 아니었다.

나를 비롯해서 이인복과 김첨수 등의 몇 명의 감찰사 사람이 아니면 전혀 못 알아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거기에 적힌 글자는 모두 한글이었다.

기밀을 다루기 위한 궁여지책에 가까웠다.

세종대왕님이 만든 한글을 이렇게 사용한다는 것이 조금 죄송스럽지만, 그래도 이것만큼 적당한 것도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언젠가는 한글을 배포할 생각이지만,

아직은 그럴 만한 여유가 없는 시기였다.

적어도 교육 개혁과 같이 병행해야 하고 창제 원리를 다 기억하지 못하기에 그것도 새롭게 써야 해서 당장은 진행하기 어려웠다.

천천히 김첨수가 보낸 서신을 읽던 나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속이 시원한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하하! 정말 기분 좋은 소식이오.”

김첨수는 적은 소식은 길지 않았다.

덕녕공주의 집을 불태운 임무의 과정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게 사실만 적어놨을 뿐이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꽤 세밀하게 적어놨는데 생각보다 김첨수의 작문 실력은 상당해서 글만 보더라도 눈에 선했다.

“불을 얼마나 크게 냈길래 주변까지 번진 것이오?”

“하필이면 인근에 있던 황자의 저택까지 번져서 그날 밤에 아주 난리였다고 합니다. 덕분에 황제께서 크게 노하셨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이왕에 불을 놓은 김에 대도 전체를 완전히 다 태웠어도 참 좋았을 텐데 아쉽소.”

“언젠가 기회가 있지 않겠사옵니까.”

이인복은 이게 끝이라 여기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중국의 옛 역사에 나오는 삼국지의 책략가라도 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언젠가는 대도 전체를 불태우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기뻐하지 않을 고려인이 있기는 할까. 아마 백 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갈 것이 분명했다.

이인복의 말을 들은 나도 크게 공감했다.

“그런 날이 꼭 왔으면 좋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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