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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48화 (48/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48

다음날, 개경에 흉측한 소문이 퍼졌다.

경창부원군 왕저(王㫝)가 유배되어 있던 사찰에 불이 나서 타죽었다는 내용이었다.

공교롭게도 가진의 회임 소식이 알려진 직후라 대부분의 이들이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정황상 충분히 의심받을 상황이긴 했다.

하지만 그걸 내게 대놓고 물어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알량한 호기심을 채우다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이번 일은 무척 민감한 일이었다.

조례를 마친 뒤에 이인복이 찾아오자 나는 가장 먼저 경창부원군의 뒤처리부터 물었다.

“시신은 어떻게 처리했소?”

“예법에 따라 소홀함 없이 장례를 진행할 예정이옵니다.”

“양지바른 곳에 잘 묻어 주시오.”

이 시대의 장례는 꽤 복잡했다.

양인이나 가난한 이들은 매장하거나 들판에 시신을 놓아두는 풍장을 했지만, 왕족과 권문세족은 복장이라 하여 과정이 복잡했다.

보통 6개월에서 몇 년이나 걸릴 정도였다.

화장을 한 뒤에 유골을 수습해서 사찰에 안치하고 몇 개월 동안 명복을 빌어준 후에 석관에 넣어 매장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랜 기간 제례를 지낼수록 망자에 대한 예의라 여기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은 하기 싫었는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솔직히 나도 꽤 많은 고민을 했다.

이번 일에 왕저의 죄는 왕족의 피를 지니고 태어났다는 한 가지 밖에 없었다.

고작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충목왕이 죽자 자신의 의지와 달리 어린 나이에 떠밀리듯 왕좌에 올라갔고 결국에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몰래 빼돌려서 다른 인생을 살게 해주려고 했지만, 언젠가는 또 이런 일이 반복될 것이 분명하였기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로 인한 나의 분노는 원나라로 향했다.

정확하게 덕녕공주였는데 역모에 이용된 이들을 백날 처단해 봐야 소용없다. 계획을 세운 이부터 없애야 또 이런 일을 벌이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원나라의 황족이라고 하더라도 이번 일을 그냥 좌시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떻게든 덕녕공주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겠다는 생각에 나는 이인복에게 슬쩍 운을 뗐다.

“우리도 당한 만큼 갚아줘야 되지 않겠소.”

*

기다림은 언제나 사람을 애타게 한다.

그게 만약 앞으로의 인생이 걸린 일이라면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덕녕공주는 자신이 보낸 칼잡이와 배전의 소식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하지만 예정일이 지나도 아무도 안 돌아왔다.

그러던 참에 돌아온 것은 비보(悲報)였다.

어떻게든 원나라로 데리고 와서 복위를 시키려 했었던 경창부원군은 불타서 죽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꿈도 불타버렸다.

쨍그랑!

분을 이기지 못한 탓일까.

평소답지 않게 그녀는 발광하듯 날뛰었다.

손에 집히는 것은 안 가리고 모조리 던지고 있었는데 그중에 찻잔과 도자기도 있었기에 깨지는 소리가 집안을 가득 메울 정도였다.

시녀들은 피하지도 못하고 서 있다가 튀어 오른 파편에 맞아서 피를 흘리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고려에서 소식을 가지고 온 이를 노려봤다.

“일이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배전은 무엇을 하고 있었다더냐.”

“개경에 들어간 직후에 강윤충과 함께 사라졌다고 하옵니다.”

“설마 배신을 한 것이더냐?”

“확실한 것은 아니오나 강윤충의 집에 홀치로 보이는 이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이 끌고 갔다는 소문도 있었사옵니다.”

덕녕공주가 홀치를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궁궐에 있어야 할 이들이었다.

갑자기 그들이 왜 거기에 나타난 것일까.

그 의문은 고려에서 소식을 가지고 온 이가 풀어주었다.

“아마도 벽란도에서부터 미행을 당했던 것이 아닐까 의심됩니다. 그 자리에 감찰사를 이끄는 이인복도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대도에 머물고 있었지만,

감찰사에 대한 소문은 그녀도 익히 들었다.

워낙 허무맹랑한 소문도 상당히 많아서 어디까지 진실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확실한 것이 있기는 했다.

이 모든 일이 우연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의 보낸 이들이 모두 죽어서 사라진 그 날에 경창부원군마저 죽었다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에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 그 생각이 들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당장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분통이 터져서 그냥 있을 수 없었다.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리고 싶었다.

“황후마마에게 갈 테니 채비하거라.”

솔직히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진 않았다.

그녀와 기황후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다.

덕녕공주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쥐고 흔들던 충정왕을 끌어내리고 공민왕을 새로 앉힐 당시에 기황후의 발언이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기황후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비참한 상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신분의 차이도 엄청났다.

자신은 원 제국의 세조인 쿠빌라이의 고손녀로 황족의 피가 흐르고 있는 고귀한 신분이다.

반면에 기황후는 고려의 미천한 계집으로 궁녀로 들어와 운 좋게 황후가 된 인물이다.

그래서 항상 깔보고 있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더구나 나이도 비슷하기에 여러모로 거북한 게 사실이었다.

자존심은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그길로 당장 황궁에 들어선 덕녕공주는 기황후가 머무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과 마주쳤다. 고려에서 충목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맡아볼 당시에 문하우정승에 올랐던 하라티무르(채하중)였다.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자 채하중은 잠시 머뭇거림도 없이 다가와서 허리를 숙였다.

“마마!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

“오랜만입니다.”

“제가 먼저 찾아봬야 하는데 송구하옵니다. 혹시 황후마마를 찾아오신 것이옵니까?”

덕녕공주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채하중은 지금은 안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며 만류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지금 토크토아 승상과 중요한 일을 논의 중이신데 한참 걸리실 것이옵니다.”

“무슨 이야기이길래 그럽니까?”

그게 뭐냐고 묻자 채하중은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더니 시간이 되면 잠시 이야기할 수 있겠냐며 말하기에 덕녕공주는 잠시 고민하다가 황궁에서 조용한 장소로 그와 함께 향했다.

황궁은 제법 많이 찾아왔기에 그런 장소 한 곳 정도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녀가 택한 곳은 작은 정자가 있는 한적한 곳이었다.

그곳에 들어서자 채하중은 자신이 온 이유를 천천히 설명을 해주었다.

“이번에 토크토아 승상이 병사를 모아서 직접 역적을 토벌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원정을 떠날 예정인 것은 마마께서도 아시고 계시지요?”

“물론입니다. 소문에 의하면 이번 원정의 규모가 수백만 명에 달할 정도라 하더이다.”

“당연히 고려에서도 토벌을 도울 조정군(助征軍)을 보내야 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채하중이 그걸 이야기하며 간사하게 웃자 덕령공주는 그제야 승상과 기황후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알 것 같았다.

고려에서 얼마나 조정군을 요청하는 것이 적당한 건지 논의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채하중이 왜 그 자리에 있었던 걸까.

그녀가 그걸 묻자 채하중은 품에서 서신을 하나 꺼내서 그녀에게 건넸다.

“소신도 작게나마 도움이 되고자 이번에 차출할 장수의 명단을 작성 중이옵니다.”

덕녁공주는 그걸 펼쳐서 보았다.

40여 명에 달하는 이들의 명단이었다.

그중에는 그녀도 익히 아는 이들이 많았다.

안우와 이방실부터 시작해서 심지어 유탁과 염제신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강윤충에서 잠시 멈췄다.

“이 사람은 오지 못할 것입니다.”

“강윤충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옵니까?”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한 것 같은데 배전과 함께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소식이 왔습니다.”

“이런!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사옵니다.”

“대신 다른 이를 하나 넣어줄 수 있겠습니까?”

채하중은 문제가 없다며 누굴 염두에 두고 있는건지 물었다. 덕령공주가 그 명단에 넣었으면 하는 이는 바로 이인복이었다.

현재 그녀의 눈에 가장 거슬리는 존재였다.

덕녕공주는 자신의 계략을 무산시킨 것이 이인복 때문이라 여기고 있었다.

채하중은 문제없다며 호언장담했다.

그리고는 곧장 연필을 꺼내서 이인복의 이름을 적었는데 그게 그리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이미 원나라의 궁궐을 비롯해서 대도 전체에 연필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붓과 벼루를 놓지 못하는 이들도 상당히 많았으나 일단 한 번 써보면 편하기에 품에 하나씩 꽂고 다니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특히 시를 쓰는 것을 즐기는 이들은 불현듯 떠오르는 시구(詩句)를 적기 좋다며 열광했다.

길을 걷다 나름 멋지다고 생각되는 시구가 떠올랐는데 막상 집에 가서 쓰려 하면 잊어먹은 경우가 생각보다 많았던 것 같았다.

“더 적을 이름은 없사옵니까?”

“고려의 왕도 적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마마님도 농(弄)이 많이 느셨습니다.”

“진지하게 하는 말입니다.”

“···하하. 저는 황후마마께서 시키신 일이 있어서 그만 물러나겠사옵니다.”

채하중은 급하게 그 자리를 떠났다.

괜히 엮이기 싫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서둘러 떠나는 그를 바라보며 그녀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의 표정에서 살짝 두려워한다는 느낌을 엿봤기 때문이었다.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황궁까지 찾아온 이가 정작 고려의 왕을 두려워하다니 말도 안 됐다.

다시 황후를 찾아갈까 하다가 그녀는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다며 발길을 돌렸다.

*

황궁에 다녀온 그 날 밤.

덕녕공주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평소에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한 번 잠들면 쉽게 깨지 않는 그녀였다.

하지만 오늘따라 잠자리가 불편했다.

어디선가 메케한 냄새까지 나는 것 같았는데 뒤척거리던 그녀는 짜증을 내며 일어났다.

그런데 진짜 뭔가 이상하긴 했다.

침실 안쪽에 연기가 가득했다.

뭔가 몽환적인 느낌이라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다.

하지만 고개를 든 그녀는 기겁을 했다.

천장에 검은 연기가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한쪽 구석에는 화염이 얼핏 엿보였다.

잠이 든 사이에 불이 났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서둘러 옷을 걸치고 문 쪽을 향해 뛰어나갔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통하지 않았다.

침실에서 복도로 나가는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창문까지 누가 나무를 덧대서 완전히 막아 놓았다.

쾅쾅!

살려달라며 애원도 해봤지만,

이상하게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

다들 자신만 버려두고 떠난 것 같았다.

그제야 덕녕공주는 겁이 덜컥 났다.

흉측한 몰골로 타죽는 것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런 최후를 맞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문앞에서 매달려 있는 사이에 불은 점점 번져서 지붕을 타고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팔열 지옥을 보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숨이 막혀서 너무 괴로웠다.

“거기 아무도 없느냐! 내 목소리가 안 들리냐 말이다.”

기침을 참아가며 소리쳐 봤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이미 덩치가 엄청나게 커진 불은 저택 전체를 집어삼키더니 머지않아 와르르 무너졌다.

불에 타오르는 기둥이 덮치며 더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그제야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달려왔다.

새벽녘이라 뒤늦게 불이 난 것을 확인하고 온 병사들과 인근의 주민들이었다.

“아이고 이걸 어째. 이러다가 불이 번지겠네.”

“다들 불을 안 끄고 뭘 하는 건가. 어서 가서 물을 떠 오게.”

하지만 모두가 직접 나서는 것은 아니었다.

상당수의 인근 주민은 불구경을 하면서 팔짱을 끼고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이 주변에서 워낙 극성맞은 성격을 가진 황족으로 유명했기에 도와줄 마음이 아예 없어 보였다.

그들 중에 몇 명은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아주 잘 타오르는구나.”

그들의 정체는 감찰사 소속이었다.

이 모든 일을 꾸민 것은 어사 김첨수였다.

한때 대호군까지 올랐던 그가 감찰사의 일개 어사가 되었기에 좌천을 당한 것으로 아는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오늘 같은 날을 위해 보낸 인고의 시간이었다.

김첨수가 이끄는 이들은 특별했다.

일반적인 어사대와는 결이 많이 달랐다.

여기에 속한 이들은 모두 원나라의 말에 능숙하기에 현지인과 구별이 안 될 정도였다.

감찰사의 대부분이 내부의 정보를 다룬다면 김첨수가 이끄는 이들은 적진에 침투하여 은밀하게 정보를 모으고 파괴 공작을 전담했다.

아직 그들에게 내려진 조직명조차 없었다.

심지어 같은 감찰사에 소속된 이들도 김첨수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는 몰랐다.

그들과 연결되어 있는 이는 이인복과 전하밖에 없었기에 다들 자부심 하나로 버티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이 불이 번지자 그들은 충분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원래부터 여기 없었던 사람처럼 인파 사이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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