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47
곽충수는 감찰사 출신이다.
당연히 눈썰미는 상당히 좋은 편이다.
혹시 몰라서 다시 한번 확인하러 직접 다녀왔으니 사람을 잘못 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원나라의 상선에서 내린 걸까.
내가 그걸 의아하게 여기자 곽충수가 그에 대한 대답을 해주었다.
“배전은 덕녕공주를 따라 원나라로 떠나서 대도에 머물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건가?”
“제가 감찰사에 있을 무렵에 마지막으로 탄핵을 위해 쫓던 이가 배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전하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원나라로 도망치듯 떠나서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도망쳤던 이가 어찌 저런 복장을 하고 은밀하게 고려에 들어왔단 말인가?”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나도 곽충수의 말에 동의했다.
어디선가 구린내가 진하게 나는 것 같았다.
뒤에서 뭔가 꾸미는 것이 아니면 저렇게 다른 이의 눈을 피해서 고려로 돌아올 리가 없었다.
더구나 그가 돌아온 시기도 꽤 애매했다.
하필이면 가진의 회임 소식이 알려진 직후라 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은 아닐 것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벌써 가진의 회임 소식을 알 리가 없지.’
나도 그 소식을 며칠 전에 들었다.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개경에서 대도까지 소식이 가고 그걸 들은 후에 다시 여기까지 올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시기가 너무 좋지 않았기에 아무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마침 주변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홀치가 있어서 내수사의 사람과 함께 뒤를 쫓으라 했으니 조만간에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잘하였소. 가서 감찰 대부를 불러오거라.”
뒤를 돌아보며 지시를 내리자.
홀치 하나가 이인복을 찾기 위해 달려갔다.
마두라이로 가는 이인임 등을 배웅하기 위해 벽란도에 나와 있어서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슬슬 개경으로 돌아가려던 그는 내 부름을 받고 곧장 달려왔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인복은 내가 벽란도에 있었다는 것조차 몰랐다.
그 때문인지 상당히 놀란 표정이었다.
“언제부터 계셨습니까?”
“배가 떠나기 전부터 있었소.”
“친히 이곳까지 오셨다는 것을 알았다면 떠나기 전에 와서 인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럴까 봐 알리지 않은 것이오. 가족들끼리 인사할 시간은 필요하지 않겠소.”
“하온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역시 이인복은 눈치가 제법 빨랐다.
곽충수의 표정과 주변의 홀치가 분주한 것을 보고 곧장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나는 그에게 조금 전에 곽충수가 우연하게 배전이 은밀하게 고려로 돌아온 것을 발견한 사실을 말해주었다.
“확실히 뭔가 이상합니다.”
한동안 듣던 이인복도 내 의견에 동의했다.
아무래도 배전은 덕녕공주의 밀명을 받고 뭔가를 꾸미기 위해서 몰래 들어온 것 같았다.
그는 당장 벽란도에 상주하고 있는 감찰사 사람을 불러서 현재 개경에 있는 어사와 정보 조직까지 모조리 불러들이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정보 조직을 동원할 무렵.
곽충수가 배전의 뒤를 쫓으라고 보냈던 이들 중의 한 명이 돌아왔다. 이인복은 나를 대신해 그에게 배전의 행방을 물었다. 그러자 내수사의 관리는 자신이 본 것을 소상하게 아뢰었다.
“전(前) 찬성사 강윤충의 자택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직접 보고 돌아왔습니다.”
*
벽란도에서 배전의 뒤를 추적할 무렵.
강윤충은 예상치 못한 손님을 맞이했다.
배전이 올 거라는 사실은 그 역시도 모르고 있었는데 대도에 있어야 할 이가 갑자기 찾아온 탓에 상당히 당황한 상태였다.
일단 안으로 배전을 들인 강윤충은 그간의 안부를 묻기 전에 어찌 된 일인지부터 물었다.
“대도에서 마마를 모시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 개경에는 어찌 온 것인가?”
“일단 이것부터 읽어보시지요.”
“이게 무엇인가?”
“마마께서 보내신 수찰(手札)입니다.”
수찰은 직접 쓴 서찰을 의미한다.
배전은 품에서 곱게 접은 수찰을 꺼내서 강윤충에게 건넸다. 그걸 받아든 그는 수찰에 적힌 내용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한동안 읽던 강윤충은 전혀 예상 밖의 내용을 보고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경악했다.
“자네 지금 반역을 꿈꾸는 것인가?”
수찰에 쓰여진 내용은 무척 위험했다.
배전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몰래 자신을 찾아왔을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다고 느끼기는 했다.
하지만 반역까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원나라에 있는 덕녕공주는 경창부원군을 다시 왕위에 올리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녀는 과거의 영광을 무척이나 그리워하고 있었다.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되기는 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충목왕과 충정왕의 뒤에서 섭정을 하였기에 누구보다 권력이 주는 달콤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나라로 돌아간 이후.
덕녕공주는 존재감 없는 황족에 불과했다.
아버지인 진서무정왕이 역대 황제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것도 이제는 옛일이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과거의 영광이 그리웠는데 고려로 돌아올 수 있을 방법이 있기는 했다.
그건 바로 강화에 있는 충정왕을 다시 왕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윤충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폐위되신 주상을 다시 왕으로 세우는 일이 가능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못 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과거에도 폐위 뒤에 다시 복위되었던 사례도 많았습니다. ”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네.”
강윤충도 그 시절이 사무치게 그립긴 했다.
당시에는 윤왕(尹王)이라 불리던 윤시우와 함께 두 사람은 고려에서 왕이 부럽지 않게 지냈다.
곳간에는 재물이 넘쳐났고 크고 작은 관직을 얻기 위해서 재물을 들고 오는 이들 때문에 문지방이 닳아서 없어질 정도였다.
그때가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왕은 녹록하지 않았다.
예전과 달리 감찰사의 감시는 강력해졌고 비리를 저지른 이들은 어떤 위치에 있더라도 절대 봐주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강윤충도 과거에 저지른 인사 비리로 인해 얻은 재물을 모두 토해내고 벌금까지 크게 물어내야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걱정부터 됐다.
“혹시 뒤를 밟은 자들은 없었나?”
“제가 고려를 떠난 것이 몇 년이나 지났습니다. 더구나 은밀하게 움직였기에 저를 알아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네가 감찰 어사의 무서움을 몰라서 그런 말이 쉽게 나오는 걸세.”
강윤충은 바뀐 고려에 대해 설명했다.
임진 정변이 있던 날에 그도 개경에 있었다.
피바람과 불고 비명이 가득하던 그 날의 밤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거의 몇 개월 가까이 개경의 거리에는 효수된 역적과 범죄자들의 머리가 즐비했다.
하지만 아무리 설명해도 배전은 꽉 막힌 사람처럼 굴었는데 이미 권력욕에 눈이 먼 것 같았다.
“이 사실을 기성군도 아시는가?”
여기서 말하는 기성군은 윤시우였다.
원래는 순성협덕찬리공신기성군이 정식 명칭이나 그들은 평소에 이렇게 줄여 말했다.
그 질문에 배전은 고개를 저었다.
“각산(角山)에 유배 중인 그분과는 연락이 닿지 않고 있습니다. 조만간 사람을 보내어 알아볼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거사를 성사시킬 생각인가. 과거 우리 편에 섰던 이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 흩어지고 없네.”
“일단은 경창부원군을 대도로 모시고 갈 생각입니다. 그곳에서 황후마마와 황제 폐하의 재가를 받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걸 들으니 강윤충도 살짝 흔들리긴 했다.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원 황실에서 전폭적으로 지지를 하면 다시 복위가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쉽게 선택할 수 없는 문제라 강윤충이 계속 머뭇거리자 배전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겁이 나면 빠지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분을 모시러 강화로 사람이 갔습니다. 그러니 마음의 결정은 서두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내일 새벽에 경창부원군을 원나라로 모실 예정입니다. 그러니 깊게 고민하고 있을 시간은 없습니다.”
“돌아갈 방법은 있는 것인가?”
배전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원나라의 상인을 매수한 상태였다.
벽란도에 들어오기 전에 정박하는 강화 쪽에 배가 대기하고 있다가 새벽 무렵에 그걸 타고 다시 원나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다만, 자신은 내부에서 동조해줄 이를 포섭하기 위하여 잠시 고려에 남을 예정이라고 했다.
첫 번째 대상자가 바로 강윤충이었다.
이걸 기뻐해야 하나.
아니면 화를 내고 쫓아내야 하나.
강윤충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바깥에서 뭔가 수상쩍은 인기척이 나서 고개를 돌리자 별안간에 문이 박살 났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 뛰어 들어왔는데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있는 네 명의 무사였다.
그들을 본 강윤충은 사색이 되었다.
흑마포와 면포로 만든 외투를 입고 머리카락이 짧아서 누군지 금방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홀치가 어찌하여 여기에···”
하지만 놀랄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부서진 문 너머에서 천천히 걸어들어오는 두 명을 보고는 강윤충은 허물어지듯 엎드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최근에 염라대왕보다 더 무섭다는 이인복과 전하가 계셨다.
배전도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사색이 되어서 곧장 이곳을 빠져나가려 했으나 빈틈이 없었다.
이미 저택은 홀치가 장악한 상태였다..
마당에는 강윤충의 식솔은 물론이고 배전의 뒤를 몰래 따르던 무사들도 포박되어 있었다.
저택을 은밀하게 급습하여 사람들을 나포하던 홀치의 모습은 정말 경이로울 정도였다.
초창기부터 있었던 이들은 2년 가까이 훈련을 받아서 권박(拳博)과 검술(劍術)에 능하고 인간 병기라 말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들은 배전을 잡아서 곧장 무릎 꿇렸다.
“경창부원군의 복위라··· 그게 정녕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더냐.”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은 뒤.
배전과 강윤충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배전은 입을 꾹 다물고 체념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오히려 다급한 것은 강윤충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목숨이 걸린 문제였기에 상당히 간절했다.
“저는 이번 일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사옵니다.”
“과거에 저지른 부패한 짓거리도 과인이 아량을 베풀어 눈감아주었다. 그런데 기어이 고려를 배신하는 것이 너의 선택이었느냐?”
“정말 억울하옵니다!”
눈물과 콧물을 쏟아내며 절규했지만,
나는 그런 강윤충의 연기를 믿지 않았다.
고려에 충절이 깊은 자였다면 충정왕 시기에 패악을 부리는 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홀치 옆에 서 있는 이인복을 바라보자 그는 곧장 밖에 있던 감찰 어사들과 함께 두 사람을 개경 근처에 있는 비밀 안가로 끌고 갔다.
그곳은 감찰사에서 비밀리에 죄인을 심문하거나 증인을 보호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곳이라 산속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었다.
살아서 다시 그곳을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급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배전이 강화로 보냈다는 이들이 먼저 선수를 쳐서 충정왕을 빼돌리면 큰일이었다.
훗날 황제에게 아첨한 덕분에 왕위에 책봉되어 고려에 쳐들어오는 덕흥군보다 오히려 폐위가 된 충정왕이 훨씬 더 위협적인 정적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살려두었던 것이 솔직히 조금 후회가 되기는 했다. 하지만 자책하기 전에 이 일부터 서둘러 해결해야 했다.
나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홀치 중에서 서달을 불러서 명령을 내렸다.
“지금 당장 강화에 가서 경창부원군의 신변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확보하거라.”
*
날이 서서히 어두워질 무렵.
강화도로 향하는 나룻배가 있었다.
그곳에는 모두 합쳐서 여덟 명의 남자들이 타고 있었는데 다들 짙은 검은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만약 날이 더 어두웠다면 배만 홀로 떠다니는 것이 아닌가 착각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엄동설한인 시기였다.
이 무렵에 도강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강가에는 얼음이 얼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그들이 도강을 선택한 부근은 물살이 거칠 덕분에 오히려 얼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강 건너에 나룻배가 도달하자.
그들은 배를 수풀 사이에 숨겨두었다.
누가 봐도 상당히 수상한 움직임이었다.
거칠게 하얀 입김을 뿜던 그들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긴 뒤에야 잠시 멈춰서 호흡을 골랐다.
그쯤되자 대장으로 보이는 이가 입을 뗐다.
“여기서 얼마나 더 가야 하는가?”
“경창부원군은 여기서 13리 정도 떨어진 용장사라는 곳에 계십니다.”
“아직 시간이 이르니 천천히 움직이지.”
아무래도 조금 여유를 가져야 할 것 같았다.
되도록 보는 눈이 적은 시간에 급습해야 했다.
대도에서 출발할 당시에 들은 정보에 의하면 그분 곁에는 호위를 가장한 감시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숫자가 그리 많지 않다니 그들을 처치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이곳에 모인 이들 모두 대도에서 칼을 좀 쓰기로 유명한 이들이기에 고려의 병사 따위가 위협이 될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가장 염려하는 것은 인근의 군영이었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떼로 밀려들면 답이 없기에 가능하면 눈에 띄지 않아야 했다.
사전 조사에 의하면 강화에 머물고 있는 병사만 적어도 수백 명은 넘어간다고 했다.
왜구 때문에 배치된 거라고 들었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이 있다면 가장 큰 규모의 군영은 섬의 정반대 편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었다.
“슬슬 이동하자.”
어느 정도 날이 어두워지자.
그들은 조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이 뜨는 모습이 아름답다 하여 달곶이라 부르는 곳부터 연화산 너머까지 멈추지 않았다.
산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언덕을 넘어가자 그들이 도착한 곳은 용장고개의 길막재였다.
그 고개만 넘어가면 그분이 계신다고 알려진 용장사(龍藏寺)가 나올 것이다.
잠시 후에 도착한 용장사는 적막했다.
스님들도 잠자리에 들었는지 안 보였다.
그들은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 두 명씩 흩어져서 경창부원군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그분은 보이지 않았다.
점차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다가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 같았다.
“정말 이곳에 안 계신 것이 확실한 것이냐.”
“확실합니다. 혹시 최근에 거처를 옮기신 것이 아닙니까?”
“그럴 리가 없다.”
“저기··· 혹시 저분이 아닙니까?”
부하 중의 한 명이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네 명의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세 명은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중년이었는데 허리에 칼을 찬 것이 무사 같아 보였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아직 약관이 되지 않은 젊은 도령이었는데 용모파기에서 본 얼굴과 상당히 흡사했다.
“세 명밖에 안 되니 처치하고 부원군을 모시고 곧장 이동한다. 생각보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으니 서둘러야 한다.”
그렇게 부하들에게 말을 한 뒤.
그는 곧장 칼을 뽑아 들고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경창부원군 곁을 지키던 세 명의 무사는 순식간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다들 제법 칼솜씨가 뛰어난 이들이었으나 수적인 열세를 이겨내지는 못하였다.
“당신들은 누가 보내서 온 것이오?”
경창부원군은 덤덤하게 물었다.
어차피 곧 죽을 목숨이라 여기고 살아왔다.
자신이 숙부님의 입장이라도 훗날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하기에 어떻게든 처단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손을 안 쓰고 있었다.
피가 마르는 나날이 계속되자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는데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전하! 소신이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갑자기 복면을 쓴 남자들이 무릎을 꿇자.
그제야 경창부원군은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렸다. 자신을 죽이러 온 게 아니라 역모를 저지르기 위한 납치였다. 그걸 깨닫자 그는 미간이 찡그려지면서 크게 노했다.
다시 또 자신을 이용하려 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을 때는 잘 몰랐으나 이제는 십 대 중반이 되니 그쯤은 알고 있었다.
만약에 복위를 한다고 뭔가 달라질까.
그들이 바라는 것은 허수아비였다.
“썩 물러나시오. 그대들이 바라는 것은 절대 이뤄줄 수 없소.”
“덕녕공주 님의 명이옵니다.”
“두 번 말하지 않겠소.”
경창부원군은 죽은 이들의 칼을 집었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말릴 틈도 없었는데 칼끝이 향한 곳은 그들이 아니라 자신의 목이었다.
이 자리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억지로 끌려갈 바에는 죽을 생각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지금 왕위에 올라있는 숙부보다 더 좋은 왕이 될 자신이 없었다.
그에게도 귀가 있기에 백성들이 말하는 소문은 종종 들렸다. 그들이 말하는 공통적인 내용은 자신이 왕이었던 때보다 훨씬 살기 편안해졌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해안가에 출몰하던 왜구는 뜸해졌고,
탐관오리의 뿌리를 뽑아서 칭송이 자자했다.
더구나 내수사의 재물을 풀어서 구휼미로 백성에게 나눠주니 그 모든 것이 백성들에게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상당히 큰 변화였다.
하지만 복면을 쓴 이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미리 지시받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송구하지만, 강제로라도 모시겠습니다.”
대장으로 보이는 이가 신호를 하자.
부하들이 경창부원군을 둘러싸서 압박했다.
하지만 그의 목에 얹혀 있는 날카로운 칼 때문에 쉽게 다가서지는 못하고 있었다.
괜히 실수로 목이라도 베어지면 모든 게 허사가 된다. 잠시 그렇게 대립하고 있자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쇄애앵!
화살은 소름 돋을 정도로 정확했다.
한 사람당 세 대의 화살이 날아와서 눈과 목젖 그리고 심장 같은 급소에 꽂혔다.
그나마 운이 좋았던 이들도 적어도 팔과 다리에 한두 대씩 화살을 맞아서 비틀거렸다.
이내 화살이 날아오는 것은 멈췄으나 뒤이어 나타난 것은 정체 모를 십여 명의 무사였다.
순식간에 복면인을 제압하기 시작한 그들은 다급하게 강화로 넘어온 서달과 홀치였다.
“어서 경창부원군을 모셔라!”
복면을 쓴 이들도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서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다.
나름 그들이 살던 지역에서는 칼솜씨 하나로 꽤 유명세를 탔지만, 기습한 이들의 실력도 쉽게 볼 만큼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서달은 유독 눈에 잘 띄었다.
키가 크고 건장해 보이는 그가 힘껏 칼을 휘두를 때마다 복면을 쓴 이들은 나뒹굴었다.
순수하게 힘을 겨룰 수 있을 만한 이는 전혀 없었는데 빈틈을 노리고 공격을 해봐도 아주 손쉽게 방어를 하면서 하나씩 베어나갔다.
마지막까지 발악하던 복면인이 쓰러진 뒤.
서달은 경창부원군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살기가 감도는 서달의 눈은 아무래도 자신을 구하러 온 것 같지는 않았기에 경창부원군은 체념했다.
“오늘이 내 제삿날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