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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46화 (46/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46

이걸 기뻐해야 하나.

아니면 슬퍼해야 하는 건가.

전혀 표정 관리가 안 되고 있었다.

기쁨과 우려가 뒤섞이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것은 축하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누구보다 아이를 바라던 것이 가진이기에 무척이나 기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조심스러운 상황이었다.

정확하게 언제인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사료에서 그녀가 임신을 했다가 유산한다는 것을 예전에 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이번에는 그 불행을 막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팔사불화 때문이던가.’

팔사불화는 원나라 출신의 내관이다.

그런데 그가 구타당하는 것을 가진이 본 뒤에 유산을 하게 된다.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작은 충격도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더구나 이번에도 그녀가 유산을 하면 아마 그녀와 나 사이에 아이는 다시는 없을 것이다.

이제야 공민왕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세상에서 가장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내 편이 되어주는 유일한 이가 바로 가진이었다. 그녀를 잃는다면 나도 공민왕과 비슷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내가 잠시 그 생각을 하며 침울한 표정을 하고 있자 가진은 심통이 난 표정을 지었다.

“무슨 표정이 그래요? 전하께서는 기쁘지 않으신가 봅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진이 들인 노력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녀는 누구보다 아이를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작년부터는 복령사를 찾아 후사를 빌고 돌아온 것만 서너 차례는 되었다.

심지어 지난해에는 견우직녀제까지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한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정성들여서 기도했다.

“너무 기뻐서 그러오.”

“복령사가 영험하다더니 그동안 드렸던 기도가 효험이 있었나 봅니다.”

“조만간 크게 시주를 해야겠습니다.”

“꼭 그러셔야 합니다.”

나는 가진에게 그러겠다며 약조를 했다.

복령사는 개경 송악산 서쪽에 있는 사찰이다.

정확하게 언제 지어진 건지 알 수는 없으나 신라쯤에 세워진 것으로 예상되는 그 사찰은 천축국에서 가져온 귀한 불상이 있는 왕실의 원당이다.

개경 안에는 여러 유명 사찰이 있다.

그런데 굳이 복령사까지 찾아가는 이유는 아들을 기원하는 기자치성(祈子致誠) 때문이다.

복령사는 기자에 영험하기로 유명했다.

고려의 23대 국왕인 고종부터 시작해서 대부분의 왕이 그곳에서 후사를 위한 치성을 드렸을 정도였다.

“아버님이 살아계셨다면 참 좋아하셨을 텐데 아쉽습니다.”

가진의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

그 부분은 나도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위왕은 역사대로 백가노와 함께 요적을 토벌하러 나갔다가 기습을 받고 살해당했다.

그걸 막기 위해 사람을 보내 그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노력을 했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보낸 이들을 멀리하고 경계해서 제때 막지 못했다.

위왕의 부고 소식을 들은 가진은 한동안 식음을 전폐했고 그로 인해 몸이 많이 상했다.

어쩌면 그 일이 유산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이 아이는 위왕께서 그대를 위해 내려주신 선물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과인은 그렇게 믿고 있소이다. 그런데 앞으로 공방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글쎄요···”

가진은 확실하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마도 계속 관리를 하고 싶은 것 같은데 쉽게 그 말을 꺼내기 어려운 것 같았다. 이 무렵에도 태교를 무척 중요하게 여기는 풍습이 있었다.

특히 왕실의 경우에는 유독 심한 편이었다.

좋은 것만 보고 들으라고 연주자를 회임 기간 내내 곁에 붙여 놓을 정도였다.

나는 그녀에게 제안··· 아니 부탁을 했다.

“당분간은 공방에 나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일단 궁궐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불안했다.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내 말을 들은 가진은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대신에 절충안을 내놓았다.

“대신 공방과 내수사의 관리들이 매일 궁궐에서 보고를 할 수 있도록 조처해주겠소.”

가진은 그리 내켜 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왕후라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당장 공방과 내수사의 일을 그만두라는 말을 듣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겼다.

나도 소일거리까지 빼앗고 싶진 않았다.

생각보다 그녀에게 공방은 큰 의미였다.

따지고 보면 그녀가 하루 중에 가장 많이 얼굴을 맞대고 일하던 것이 공방 사람들이다.

가진이 따로 경조사를 챙겨줄 정도로 정을 상당히 많이 주었는데 그들마저 없다면 그녀에게는 곁을 지키는 겁령구가 전부였다.

고민을 하던 가진은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말씀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표한 뒤.

잠시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여러 생각으로 복잡했는데 그중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현재 강화에 있는 충정왕을 어떻게 하냐는 것이다.

원래의 역사와 달리 지금까지 그를 살려둔 이유는 후계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혹시라도 후사를 얻지 못할 경우.

최후의 수단으로 충정왕을 염두에 뒀다.

형님인 충혜왕의 서자이자 나의 조카인 그는 이제 열여섯이 되었다. 열 살 무렵에 어쩔 수 없이 왕위에 올랐다가 폐위당했지만, 이제는 나이가 적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만약에 내가 적장자를 얻게 될 경우.

충정왕은 다시 왕위에 복귀하진 못한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라 당연히 주변에 있는 외척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혹시라도 불온한 움직임이 생기면 살려두려 했던 결정을 부득이하게 바꿀 수밖에 없었다.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거라.’

*

왕후의 회임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다.

당연히 축하의 인사가 여기저기서 왔다.

안 그래도 아일이 열릴 때마다 후사에 대해 걱정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 무렵에 고려의 왕가는 거의 씨가 말랐다.

혹시 내게 변고라도 생기면 문제가 커졌다.

그리고 정월을 맞이할 무렵.

이인임은 다시 마두라이로 떠났다.

원래대로면 만들어 놓은 쇠뇌와 수노기 등을 싣고 곧장 떠나면 되었지만, 그들이 가지고 온 염초로 만든 화약을 싣느라 조금 미뤄졌다.

탄야를 지원하기 위한 군수품으로 실린 화포가 50문이 넘어갔고 화약도 오천 근이나 주었다.

그 정도면 약 만 오천 회 이상은 화포를 쓸 양이었는데 일종의 투자라고 봐도 되었다.

‘성능을 보면 주문하지 않고 못 버틸 거다.’

화약을 사가려면 염초를 가져와야 한다.

단순한 논리로 보여도 그게 앞으로 고려와 탄야의 교역을 이어줄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한 가지의 조건을 걸었다.

만약, 마두라이 술탄국에 불교와 관련된 보물이 있으면 고려로 가져와 달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그들이 믿는 종교도 아니었다.

지난번에 탄야가 가져온 진신사리는 생각보다 엄청난 효과를 가져왔다. 다섯 립의 사리를 사찰에 내주는 대신에 재물을 상당수 회수했다.

경매의 형식을 통해 판매한 덕분이었다.

그런 탓에 진신사리의 두 립은 개경에 남겨졌고 계림부와 서경 그리고 해인사에 하나씩 보내졌다.

“다들 몸 조심해야 해!”

그때 아래쪽이 시끄러워졌다.

그곳에서는 영영 떠나보내는 사람들처럼 목 놓아 울거나 소리치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천축국까지 먼 길을 떠나는 이들의 가족이 나와서 배웅하고 있는 탓이었다.

배에는 이인임의 가족 외에도 그가 요청한 홀치와 동생인 이인미와 이인달도 타고 있었다.

가족과 함께 배웅을 나온 이인복은 멀리 떠나가는 이들을 착잡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무사히 잘 도착하여야 할 텐데.”

벽란도에서 점차 멀어지는 배를 보며 중얼거리자 옆에서 같이 지켜보던 곽충수가 내 말을 오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배에 실린 물건을 걱정했던 것이지만, 그의 말을 바로잡을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이씨 가문의 육 형제가 저렇게 애틋한 사이인지는 처음 알았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가.”

“이제 슬슬 환궁하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이러다가 고뿔이라도 걸리실 것 같습니다.”

바닷가의 바람은 역시 쉽게 볼 수 없었다.

면화로 만든 솜옷을 껴입고 털모자에 여우 목도리까지 둘렀는데도 뼈가 시릴 정도였다.

하지만 모처럼 벽란도까지 나왔으니 주변을 한번 살펴보겠다고 말하며 걷자 곽충수는 내 뒤를 따라왔다.

“요즘 저화의 유통은 어떻게 되고 있는가?”

“개경의 시전과 벽란도에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저화를 유통한 것도 2년쯤 됐다.

아직 녹봉이나 세금을 저화로 주고받을 정도는 아니었으나 어느 정도 신뢰는 쌓인 것 같았다.

최근에 저화의 사용처가 상당히 넓어졌다.

이제는 개경의 백성들 사이에도 저화를 재물로 인식하고 보관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었다.

덕분에 저화를 찍어내야 하는 양이 점차 많아지고 있는 상태였는데 개경 외에도 계림부(경주)와 서경(평양)에도 화매소가 설치되었다.

가장 큰 혜택을 보는 이는 상인이었다.

그중에는 요즘 동오와 상당히 대립이 잦은 지경탁의 상단도 있었는데 그들은 저화를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많이 활용하고 있었다.

괜히 고려 최고의 상단이 된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숨겨진 의도도 분명히 있었다.

최근 2년 사이에 동오는 무척 성장했다.

정말 유례가 없을 정도였는데 이미 고려 최고의 상인이라 불리던 지경탁과 어깨를 견줄 정도다.

그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가 나와 가진의 어용 상인이 된 덕분이라는 것은 개경 상인 중에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걸 알기에 지경탁은 최근 일 년 동안 어떻게든 가진에게 연줄을 대려고 노력 중이라는 이야기는 내 귀에도 들릴 정도였다.

“아직도 종종 시전에 위폐가 나돌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건 어찌 되었는가?”

위폐를 만드는 이들은 모두 효수했지만,

아직도 미련을 떨치지 못한 이들이 있었다.

일단 한 번이라도 어리숙한 상인을 속이게 되면 상당히 많은 재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관련된 내용은 판도사와 화폐국에서 계속 보고를 받고 있으나 현장의 분위기가 궁금했다.

내 질문을 받은 곽충수는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대답을 했다.

“요즘에는 상인들 차원에서 위폐를 잡아내고 있기에 크게 문제 될 정도는 아닙니다.”

일단 품질의 차이가 상당했다.

황칠의 색을 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저화가 발행된 후부터 국가에 소속된 장인 외에는 황칠 자체를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부 위폐는 치자물에 잡다하게 섞어서 흉내를 내보려고 했으나 저화의 유통이 잦아지니 상인의 눈을 속이기 쉽지 않았다.

“더구나 위폐를 유통하는 이에 대한 현상금이 상당히 큰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요즘 현상금은 어느 정도입니까?”

“위폐의 규모에 따라 다른데 결정적인 제보를 한 자에게는 최대 백 섬까지 주고 있습니다.”

그 정도면 적당한 것 같았다.

한동안 벽란도를 살피며 돌고 있자.

곽충수를 향해 인사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발걸음 떼기가 무섭게 아는 척을 하는 상인 때문에 이야기를 나누기도 쉽지 않을 정도였다.

곽충수가 운용 중인 재물의 양이 상당했기에 현재 고려에서 내수사의 위치는 상당히 높았다.

민망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송구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부교 쪽을 바라보다가 멈춰섰다.

뭔가를 발견한 것 같았기에 나도 그쪽을 바라보니 죽립을 눌러쓴 이가 원나라 상단 소속으로 보이는 배에서 내려서 벽란도로 들어왔다.

“저자가 왜 여기에···”

“누구길래 그러는 것이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송구하오나 잠깐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나는 흔쾌히 그러라고 허락을 해줬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어차피 내 곁에는 서달이 이끄는 홀치가 곳곳에서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궁금하기는 했다.

곽충수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일각 후였는데 그는 상당히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는 자신이 본 것을 내게 말해주었다.

“흥해군을 보았습니다.”

흥해군이 누구더라···

금방 떠오르는 인물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이들의 이름은 기억하고 있으나 아주 유명한 이가 아니면 호나 휘 그리고 책봉된 작위 같은 것까지 모두 외우진 못했다.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자 곽충수는 그의 이름이 배전이라고 알려주었다.

그제야 나는 흥해군이 누군지 떠올랐다.

“덕녕공주의 총애를 받던 그 배전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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