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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45화 (45/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45

함대에서 발포하기 직전.

이키섬에서도 낯선 배를 발견했다.

수십 척이 넘는 배가 눈에 안 띌 수 없었다.

하지만 설마 공격을 할 거라고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키섬은 작은 왕국이지만, 일종의 중립적인 공간처럼 사용되고 있었다.

이키섬은 만남의 광장 같은 곳이다.

아무리 호전적인 왜구라도 이곳에서는 칼을 뽑지 않는 것을 불문율처럼 여기고 있었다.

고려나 원나라로 떠나기 전에 잠시 들려서 휴식도 취하고 마음이 맞는 이들끼리 뭉쳐서 떠나는 일도 무척 많았다.

쿠우웅! 쿠웅!

하지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바다에서 벼락 치는 소리가 울렸다.

그것도 굉음이 수십 차례나 연달아 들렸다.

당연히 다들 깜짝 놀라서 뛰어나왔는데 누군가는 엉덩방아를 찧고 누군가는 칼을 쥐고 무슨 일인지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마흔 척이 넘는 배가 동시에 화포를 쏘니 땅까지 울리는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일부는 ‘땅의 노여움’이라 여기고 바짝 엎드렸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배에서 쏜 철환이 항구에 쏟아졌다.

주덕유가 노리는 것은 정박해 있는 왜선이었다.

모든 철환이 명중한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적중이 될 때마다 머리통 크기의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빗나간 일부는 항구의 건물을 박살 냈다.

흙벽을 뚫고 들어가며 먼지구름이 치솟았는데 왜구들은 혼비백산하여 우왕좌왕했다.

“멈추지 말고 계속 쏘아라!”

주덕유는 병사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워낙 목소리가 커서 그런지 화포가 쏘아지는 굉음을 뚫고 옆에 있는 배까지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독려가 필요한 것 같지는 않았다.

병사들은 왜구에게 복수를 한다는 것에 무척 기뻐하며 각자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다들 사연이 하나씩은 있는 자들이었다.

과거에 왜구로 인해 가족을 모두 잃거나 노예 생활을 하다가 겨우 풀려난 이도 있었다.

배에는 고려인 외에도 원나라의 한인과 몽골인도 있었는데 심지어 왜국 출신도 길잡이를 자처하며 주덕유의 함선에 올라탔다.

그들이 가진 공통점은 왜구라면 치를 떠는 이들이라는 것이었다.

“싹 다 죽여!”

“드디어 내 부모의 원수를 갚을 시간이다. 어서 장전하거라.”

“배를 노려라. 한 척의 배라도 더 없애야 한다.”

“항구에서 빠져나오는 배부터 쏴라!”

한껏 흥분한 표정이었지만,

이번 작전의 목표는 다들 잊지 않았다.

이키섬에 있는 이들을 죽이는 것보다 정박해 있는 배를 없애는 것이 최우선의 목표였다.

그걸 없애면 고려로 넘어올 수 없게 된다.

왜구들도 그걸 눈치채고 정박된 배를 타고 발 빠르게 항구를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배들은 오히려 근거리에서 쏘아진 집중 포화에 대부분 침몰하고 말았다.

철환이 폭발하지는 않더라도.

배에 구멍을 내는데 버틸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윤호는 좌우로 길게 늘어선 함대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그러자 붉은색의 깃발을 흔드는 대여섯 척의 배가 보였다.

화포에 문제가 생겼다는 신호였다.

화포의 내구성 때문이었다.

문제가 생긴 화포는 참외처럼 부풀었다.

그걸 무시하고 쏘면 터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손 놓고 있는 배는 한 척도 없었다.

반대편에 설치된 화포를 사용하기 위하여 배를 돌리고 있는 모습이 보이자 윤호는 이쯤에서 그만 물러나야 할 것 같다며 슬쩍 조언을 했다.

“이키섬에는 다른 항구도 있으니 이쯤에서 정리하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그제야 주덕유는 정신을 차렸다.

윤호의 말대로 이쯤에서 배를 돌려야 했다.

아직 처리해야 할 항구가 두 곳이나 더 있는데 여기서 화약이며 철환을 다 소모할 수 없었다.

항구 하나만 박살 내고 보급 때문에 다시 고려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 화약은 상당히 많이 보급받아서 부족하지 않았으나 철환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무게 때문에 많이 싣고 다닐 수 없었다.

조란탄도 있으나 그건 사거리가 짧아 화살이 닿는 거리 안으로 들어가야 효과가 나왔다.

하지만 주덕유는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번의 그들이 이키에 온 진짜 이유는 새로운 화약의 화력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애초에 이곳을 점령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합시다. 작전 종료를 알리시오.”

주덕유가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이자.

윤호는 깃발을 든 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곧장 퇴각을 알리는 깃발을 흔들며 거둬놨던 돛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다른 배들도 주저 없이 주덕유의 기함을 따라 움직였다.

뒤늦게 항구에서 나오던 왜선이 몇 척이 있었으나 함대를 향해 달려들진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럴 수 없었다.

선미에 달린 화포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거리를 줄이면 곧장 철환이 날아들어 어김없이 배를 박살 내고 있었다.

어찌나 정확하던지 오백 보 거리 이내에 들어가면 대부분 적중했고 천 보 정도 떨어져도 절반쯤은 배에 근접하게 날아왔다.

파도가 잔잔한 날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왜선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다.

이미 화포의 위력은 직접 목도한 후였다.

수적 우위에 있으면 모를까 괜히 객기를 부리다가 물고기 밥이 되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윤호는 동행한 사관과 함께 이번 작전을 통해서 침몰했거나 반파된 배의 수를 기록했다.

그 내용을 연필로 적기 시작하자 주덕유는 슬쩍 그의 곁으로 가서 전공이 어느 정도인지 물었다.

“얼마나 파괴된 것 같소?”

“침몰한 배는 열두 척이고 운항 불능으로 보이는 배는 모두 열다섯 척입니다.”

“생각보다 많지 않구려.”

“병력 손실도 전혀 없는데 이 정도면 대승이라 보셔도 됩니다. 그리고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합니다.”

“좋소이다. 이번에 왜놈들의 배를 더도 덜도 말고 백 척만 수장 시켜 버립시다.”

주덕유는 호기롭게 외쳤지만,

그게 가능한 수치라 할 수는 없었다.

아마도 마지막에 들릴 가장 작은 항구는 배도 적을 것 같았고 철환도 여유가 많지 않았다.

윤호가 예상하는 수치는 그보다 작았다.

적어도 한두 번은 다시 화약을 적재해 놓은 동래로 돌아갔다가 와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굳이 산통을 깰 필요는 없었다.

그때 낭장 직위에 있는 부관 하나가 주덕유에게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번 기회에 상륙하여 저들을 모두 토벌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 이야기에 살짝 흔들렸지만,

이내 주덕유는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마음 같아서는 왜구의 본거지를 불태우고 모조리 사로잡아서 항구에 세워진 배에 태워 고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출발하기 전에 전하께서 직접 써서 보내신 명령서 때문이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하셨다.

“서둘러서 다음 항구로 이동하라.”

*

주덕유가 이키섬의 항구를 습격한 뒤.

며칠이 지나 개경으로 장계가 올라왔다.

그가 이끄는 함대는 세 차례 출항하여 이키와 쓰시마 등을 돌며 차례대로 항구를 습격했다.

그렇게 그들이 격침시킨 왜선만 거의 백여 척이 넘어갔는데 좀처럼 보기 어려운 대승이었다.

더구나 우리 쪽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그가 쓴 내용에는 화약의 보고도 있었다.

실전에서 검증된 내용은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기존에 쓰던 것과 비교하였을 때 확실히 성능은 이인임이 가져온 염초로 만든 것이 좋았고 코닝을 한 덕분인지 습기도 덜 생겼다고 한다.

육지에서 쏘는 화포와 달리 바다 위에서는 습기로 인한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으니 그 부분은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화포의 사거리가 길어졌다는 것은 파괴력도 좋아졌다는 의미였다. 솔직하게 이 시대의 화포는 배를 부숴서 침몰시키기 쉽지 않았다.

배의 상단부를 부숴봐야 아무 의미 없다.

가장 좋은 부위는 물에 잠기는 아랫부분인데 이번에는 정박한 배를 공격했던 거라 그런지 생각보다 성과가 상당히 좋게 나온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과정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대마도 부근을 기습할 당시.

화약을 보충하고 다시 와야 했기에 이미 소문이 퍼져서 해상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나 대부분 접근도 하기 전에 격침을 시켰다고 했다.

그리고 주덕유는 작은 항구를 점령하여 왜구 백여 명과 고려의 유민 몇 명을 되찾아왔다.

“가능하면 섬에 상륙하지 말라고 했더니 결국에는 참지 못하였군.”

“우연히 탐라를 약탈하고 돌아오던 배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낚아챈 것이라고 합니다.”

“그게 어디에 쓰여 있소?”

“지금 보시는 장계 아래 놓인 것이 윤호 낭장이 감찰사를 통해서 올린 서신입니다.”

이인복이 말해준 서신을 펼치자.

그와 관련된 소상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주덕유가 보낸 장계에 적힌 전공도 다시 한번 정리해서 보냈는데 그 수치는 똑같았다.

윤호는 주덕유의 함대에서 해상 작전을 보완해주는 역할 외에도 감시자이기도 했다.

그건 주덕유의 숙명과도 같았다.

아무리 그가 충성을 다한다고 하더라도 서달과 함께 감시를 계속해서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지금도 계속해서 고려에 잠입하고 있는 백련교 때문이었다. 탕화가 주덕유를 회유하기 위해서 보낸 이들도 있을지 모른다.

“얼마 전에 잡은 백련교도의 배후는 알아보았소?”

“아직 나온 내용은 없사옵니다.”

“혹시 모르니 감시를 늦추면 안 되오.”

고려에도 분명 백련교도가 있었다.

괜한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감찰사에서는 최근 몇 개월 사이에 백련교도를 백여 명이나 추포했다.

그중에는 고려의 유민도 있었고 때로는 상인을 위장하여 들어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고려는 종교적인 자유가 있다.

이슬람을 믿어도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 원나라와 대립하고 있는 백련교가 고려에 들어오는 것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백련교를 만든 것도 승려였고 그들이 믿는 미륵은 고려에서도 한 차례 열풍이 있었다.

그들의 사상이 고려에 파고드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역성혁명을 지지한다는 것이지.’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었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이미 고려의 왕실에는 원나라의 피가 상당히 진하게 흐르고 있다.

저들에게 고려는 원나라와 다를 바가 없는 기성 세력이자 지배자 계층에 포함된다.

지금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으나 얼마 전까지 부패한 관리와 권문 세족에게 수탈을 당하던 고려의 백성이기에 선동당하기 쉬웠다.

“그나저나 동생은 만나 보았소?”

“물론이옵니다. 안 그래도 술탄의 재상이 된다는 말에 조금 걱정이 되옵니다.”

“정휘가 보내온 서찰에는 특별한 것이 없지 않았소. 앞으로 이인임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해줘야 하니 믿어 봅시다.”

“권력이란 것이 상당히 요망하여 사람을 잡아먹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건 그쪽의 술탄이 앞으로 알아서 할 일이고 우리는 고려의 이득만 챙기면 되오.”

나는 깔끔하게 선을 그었다.

그제야 이인복도 알겠다며 수긍했다.

이인임이 말했던 후발대는 이미 고려에 도달해서 염초를 내려놓고 벌써 수노기와 쇠뇌 등을 싣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인임 혼자가 아니었다.

자신을 도와줄 두 아우인 이인미와 이인달도 함께 떠나기로 했는데 육 형제 가운데 이인립과 이인민은 이인복 아래에 남기로 했다.

“명의라 소문났던 그대의 외증조부인 설경성의 의술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던 이인달이 떠나는 것은 상당히 아쉽소.”

“제 아우의 실력이라면 제가 잘 아는데 약간의 성취만 있을 뿐이지 아쉬울 정도는 아니옵니다. 의술에 성과를 보인 이는 따로 있사옵니다.”

“그게 누군가?”

“소신의 외종질인 설주라는 이온데 몇 해 전에 잡업에 급제하여 상약국(尙藥局)에서 의침사로 일하고 있사옵니다.”

상약국은 나를 위해 설치된 관서다.

그곳에서 침술 치료를 맡을 정도면 상당히 의술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정작 나는 상약국이나 태의감 등의 어의와 만날 기회조차 거의 없었다.

아직 이십 대 중반이라 아픈 곳이 없었고 고뿔 같은 가벼운 증상은 되도록 약을 먹는 것을 거절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약을 쓰는 건지 알 수 있어야지.’

이 시대는 수은도 약으로 쓰고 있다.

최근 들어 궁중에서는 금지하고 있지만,

일반 백성 중에는 중금속 중독으로 고통을 받는 이가 적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살짝 호기심이 생겨서 누구냐고 물어보려다가 밖이 소란스러워 신소봉을 바라봤다.

“소신이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밖으로 나간 신소봉은 금방 돌아왔다.

그런데 그 표정이 상당히 이상한 느낌이었다.

물기 가득한 눈망울로 돌아온 그를 보며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는 다급하게 앞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길래 그러는 거냐?”

평소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재추들과 정책에 대한 회의를 할 때는 이렇게 주제넘게 훅 들어오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곧이어 그가 하는 말을 들으니 왜 그런 반응이 나온 건지 이해가 되었다.

“숙옹부에서 온 소식이온데 왕후마마께서 회임을 하셨다 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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