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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44화 (44/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44

이인임이 염초를 싣고 오자.

가장 바쁜 것은 역시 최무선이었다.

그는 쌀로 위장해서 계정골까지 수레에 싣고 온 산더미 같은 염초를 보고 크게 환호했다.

지금 그의 눈에는 황금보다 더 빛나고 가치가 높은 것이 염초였다. 거의 5만 근의 화약을 만들 수 있는 재료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게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 모르면 작다고 하겠지만, 조선 초기의 염초 생산량이 한해 천 오백 근이 넘지 않았다.

최무선이 계정골에 자리 잡은 뒤.

2년이 지났는데 지금까지 만든 화약의 양이 2천 근 내외였다. 그걸 생각하면 거의 수십 년간 모아야 하는 양이 한 번에 들어온 것이다.

오히려 왜국에서 들여오는 유황이 부족했다.

더구나 이게 끝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염초가 들어올 예정이기에 이제는 실전에서 병사들이 사용할 수 있는 화포가 중요해졌다.

최무선이 지금까지 만든 화포는 몇 종류가 있으나 아직까지 성능이 그리 좋진 않았다.

당연히 아직 그 스스로도 만족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그의 기대치는 매우 높았다.

정확도와 파괴력 그리고 안전성까지.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너무나도 많았다.

더구나 내가 개발을 지시한 가늠자와 격발 장치에 대한 연구도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무엇하나 쉽지 않은 과제였는데 이 정도로 많은 화약이면 그동안 미뤄왔던 새로운 화포 개발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제약이 풀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최무선은 마두라이의 염초를 가지고 화약으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평소에 비축해놨으면 하는 화약의 양은 최소 만근 정도였다.

“일단 그 정도만 만들어 놓고 훈련도감과 해군에서 사용하는 양까지 합쳐서 한해에 필요한 양이 어느 정도 필요한지 살피시오.”

최무선은 알겠다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안 그래도 해군이며 훈련도감에서 화약의 보급이 원활하지 않다고 계속 닦달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시급한 곳은 역시 해군이었다.

훈련도감과 달리 그들은 현재 왜구와의 실전에서 사용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과인이 준비하라고 한 것은 어떻게 되었소?”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럼 가봅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이제는 이백여 명이 넘는 이들로 복작거리는 계정골의 모습이 보였다.

지난해 연필을 만드는 이들을 데리고 이인민이 빠졌음에도 쇠뇌를 만드는 이들이 추가되어서 계정골은 여전히 꽤 많은 이들이 있었다.

최무선과 함께 마을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지나 출입 금지 구역 안으로 들어서자 염초장 두 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것이 전하께서 지시하신 대로 만든 화약이옵니다.”

최무선은 탁자 위의 놓인 그릇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아주 작게 알갱이진 화약 가루가 담겨 있었는데 기존의 화약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크기도 균일하고 살짝 광택이 돌았는데 아마 화력이 기존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내가 그렇게 장담하는 이유는 지금 그들이 보여준 화약은 코닝 작업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화약을 더 업그레이드했다는 의미다.

이 시대의 화약은 혼합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는데 그걸 무슨 효과라고 하더라···

하여튼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물을 뿌리고 굳힌 다음에 다시 분쇄한 뒤에 체에 걸러서 흑연을 코팅하는 아주 위험한 과정을 거친다.

위험한 작업인 만큼 효과도 뛰어났다.

같은 화약이라도 질이 완전히 다르다.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화약 지식의 한계였다.

애초에 나는 근현대사 쪽에 그리 관심이 없어서 다이너마이트 같은 것들은 전혀 알지도 못했다.

이제부터는 최무선에게 해줄 조언이 없었는데 나는 화약을 천천히 살피다가 최무선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걸로 화포를 쏘아본 적이 있소?”

“아직은 없사옵니다.”

“평소 같은 양으로 사용하면 화포가 견디지 못 할 수 있으니 조심하시오. 그리고 작업 중에 폭발 위험이 있으니 아주 조심히 다뤄야 하오.”

“명심하겠사옵니다.”

나는 다시 안전수칙을 거론해야 했다.

코닝 과정의 위험성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적어도 화약 보관소 근처는 피해야 하고 너무 많은 양을 동시에 작업해서도 안 된다.

그 외에도 주의해야 할 사항은 넘쳐났다.

한참을 그렇게 다시 주의를 주던 나는 그쯤에서 새로 만든 화약의 효과를 직접 보고 싶었다.

“세 문의 화포를 설치해 보시오.”

“하나면 되지 않겠습니까?”

“계정골에서 기존에 만들던 화약과 이번에 새로 가져온 염초로 만든 화약 그리고 새로운 방식을 적용한 화약까지 비교해야 정확하지 않겠소.”

“그렇게 준비하도록 하겠사옵니다. 위험하오니 전하께서는 최대한 멀리 계셔주시길 간청드리옵니다.”

나는 순순히 알겠다며 받아들였다.

아마 여기서 싫다고 말했다가는 신소봉을 비롯해 다들 난리를 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제야 최무선은 사람을 보내 최근에 주력으로 사용하고 있는 화포인 <2호>를 가지고 왔다.

정식 명칭은 총통 2호인데 누전선에 설치되는 1호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4척 정도 크기는 된다.

대충 허리춤 정도 되는 길이였다.

처음부터 현자총통을 기준으로 만들었기에 화약 소비량은 적었고 산탄 효과가 있는 조란환도 사용 가능하고 현재 기록된 최대 사거리도 거의 천 오백 보 정도였다.

더거덕, 더걱.

뒤에서 나는 소음에 고개를 돌리니.

화포 세 문을 끌고 오는 이들이 보였다.

이 무기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무게였다.

성벽에 고정시켜 놓고 싸울 때는 문제가 안 되었으나 그곳을 벗어나면 이동이 쉽지 않았다.

그 문제는 역시 바퀴 달린 수레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세 문의 화포를 설치하고 가장 경험이 많은 이들이 화포 앞에 섰다.

화포가 놓인 방향은 탁 트인 산기슭.

수평으로 놓고 쏘아서 거리를 측정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 아래쪽은 강기슭의 습지라 사람이 오가는 그런 곳은 아니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홀치와 계정골 사람 몇 명을 보내서 살펴보게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리되었다며 흰 깃발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기존의 화약부터 쏘겠사옵니다.”

최무선이 내게 와서 보고를 했다.

내가 그렇게 하라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화포 앞에 서 있는 이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화포 앞에 서 있던 이들이 횃불을 들어서 이미 장전을 마친 화포에 불을 댕겼다.

하지만 화포가 곧장 발사되진 않았다.

아직 거기까지 개량되지 않은 탓이었다.

한참을 긴장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굉음과 함께 메케한 연기를 뿜었다.

하늘 위로 날아가는 철환은 작은 점에 불과했기에 그걸 눈으로 좇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탄착점 부근에서 대기하던 이들이 떨어진 철환을 찾아내 깃발을 흔들었는데 강어귀에도 못 미치는 거리였다.

“저 정도면 대충 어느 정도 거리인가?”

“적어도 천 보 정도는 되옵니다. 강의 중간을 넘어서야 천 이백 보입니다.”

“그럼 두 번째 화포를 쏴보시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염초로 만든 화약을 써보겠사옵니다.”

다시 최무선이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두 번째 화포에서 철환이 쏘아졌다.

쭉쭉 날아가던 철환은 강의 중간에 떨어졌다.

물보라 덕분에 이번에는 굳이 착탄점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아까 최무선이 말한 대로면 대충 천 이백 보는 되는 것 같았다. 순도 높은 염초라 그런지 확실히 성능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최무선은 물론이고 염초장들도 그걸 눈치채고 이게 무슨 일인지 궁금한 얼굴로 웅성거렸다.

하지만 아직 놀라기는 조금 일렀다.

“이번에 새로 만든 화약을 쏴보시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최무선이 신호를 보냈다.

세 번째 화포에 사용된 화약은 새로 들여온 염초로 만든 화약에 코닝 작업을 마친 것이었다.

다들 숨죽이며 기다리던 끝에 화포가 발사되자 앞서 쐈던 것보다 반동이며 폭음이 훨씬 강했다.

계곡이라 메아리가 맴돌았는데 아무리 눈으로 좇아보아도 날아가는 철환이 안 보였다.

아래쪽에서 착탄점을 찾는 이들이 한참을 주변을 뒤진 끝에 어렵게 철환을 찾았는데 대충 계산하니 천 오백 보는 가볍게 넘어가는 것 같았다.

같은 양의 화약과 철환을 사용했지만,

이 정도의 성능 차이라니 꽤 흥미로웠다.

당연히 최무선은 뭐에 홀린 것처럼 새롭게 만든 화약을 살펴보고 있었다. 지금쯤 그는 뭐가 이런 차이를 만든 건지 의문이 가득할 것이다.

그런데 이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염초를 바꾸고 화약 제조 방식만 바꿨을 뿐인데 이렇게 성능이 높아지다니 제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일이옵니다.”

“이제 화약의 개량은 이 정도면 충분하니 화포에 더 많은 신경을 쓰도록 하시오.”

“명심하겠사옵니다.”

화포라는 것이 꽤 섬세한 장치다.

철환과 화포의 구경이 잘 맞아야 폭발하면서 생기는 가스가 제대로 밀어낼 수 있다.

무엇보다 규격화가 제대로 이뤄져야 했다.

당연히 최무선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연필로 방금 나눈 대화를 적는 동안 화포가 실린 수레는 옮겨졌다.

아무리 좋은 화포가 있더라도.

쏘는 이의 숙련도가 좋지 않다면 문제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역시 실전 경험이었다.

새로 만든 화약을 써보고 싶어도 언제 왜구가 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언제 올지 모르는 이들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그 생각이 들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우리가 가볼까.’

*

그로부터 며칠 뒤.

계사년이 거의 지나갈 무렵.

주덕유가 이끄는 함대는 어딘가로 향했다.

그가 이끄는 함대는 어느덧 마흔 척의 규모가 되었는데 배의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왜구에게서 포획한 배를 수리해서 사용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주덕유가 탄 배만 상태가 무척 좋았다.

다들 배들과 달리 흠집도 없었고 돛의 수가 몇 배나 될 정도로 많이 달려 있었다.

“역시 새로 만든 배라 다르긴 하구나.”

주덕유는 새로운 기함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지금까지 나포해서 쓰던 왜선과 차원이 달랐다.

다른 배와 달리 앞뒤에 한 개씩 삼각형으로 만든 돛이 달려 있었는데 처음에는 상당히 생소했으나 점차 대단한 물건이라 생각됐다.

바다 위에서 역풍을 거스르며 항해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기본적인 속도도 무척 빨랐다.

“그렇게 마음에 드십니까?”

흐뭇한 표정으로 배를 둘러보고 있자 부관이자 군사인 윤호가 곁으로 다가와서 물었다.

윤호는 파평군 윤해의 아들로 전략에 능하다는 이유로 김휘남이 추천하여 주덕유가 이끄는 함대에 합류한 지 거의 반년째가 되었다.

주덕유도 상당히 많이 그에게 의지했는데 지금까지 윤호의 조언은 대부분 틀리지 않았다.

“당연하지 않소. 우리 함대에 새로 조선된 전선이 들어온 것은 처음이오.”

지금까지 주덕유는 서운한 게 있었다.

새로 조선되는 전선은 해군원수인 김휘남이 이끄는 함대에 모조리 배치되고 있다는 것이다.

조금 홀대받는 느낌이 들었는데 정작 느림보인 누전선과 판옥선에 비해서 쾌선이라 이름이 붙여진 이 배는 자신의 성향과 잘 맞았다.

대신에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쾌선에 설치된 화포는 크기가 작았다.

누전선의 화포와 비교하면 2/3도 안 되었는데 배가 뒤집어지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더구나 가장 큰 장점인 속도를 유지하려면 무게가 상당히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솨아아악!

파도를 헤치며 한참을 달리자.

멀리 목표로 했던 섬 하나가 보였다.

면적은 그리 크지 않아 보였는데 항구 앞에는 수십 척의 크고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한눈에 봐도 고기잡이배는 아니었다.

그쯤 되자 윤호는 길잡이로 고용한 왜국 출신의 길잡이를 데려왔다.

“저곳이 맞느냐?”

“틀림없습니다. 저 배들 대부분이 원나라와 고려를 향해 약탈을 하러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왜선입니다.”

“어찌 그렇게 확신하는 것이냐?”

“이키섬의 주변은 워낙 험악한 자들이 많아서 어지간한 이들은 접근조차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정박하는 의미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쯤 되자 주덕유는 화포의 장전을 명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렬로 늘어선 다른 배에서 장전을 마쳤다는 깃발이 하나둘 올라왔다.

그걸 확인한 주덕유는 칼을 높게 치켜들었다.

“준비되었으면 모두 방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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