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42
간단한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해볼 만한 일이라 생각됐다.
이것보다 빠르고 확실한 해결책도 없었다.
잠시 정휘가 탄야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이인임은 이게 정말 가능한 것인지 가능성을 따져보기 시작했다. 목숨이 걸린 일이라 무턱대고 시작할만한 일은 결코 아니었다.
가능성이 1할도 안 된다면 반란을 시작하는 것보다 사절단으로 온 이들을 이끌고 인근의 나라로 가서 염초를 구하는 것도 방법이다.
마두라이만 초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누가 우리를 인정해주겠냐는 거지.’
탄야는 자발적으로 고려를 찾아왔다.
하지만 바흐마니 술탄국이나 비자야나가르 제국은 고려의 존재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이들과 교역을 성사시킬 수 있을까.
이미 사절단에서 가져온 물품은 술탄에게 모두 전달되었기에 당장은 환심을 살 재물도 없었다.
심지어 이 나라에서 고려의 말이 통하는 이들은 탄야의 가문 외에는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원나라의 말을 하는 이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탄야를 밀어줄 수밖에 없었다.
“탄야, 당신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소?”
이인임은 일단 찔러보기로 했다.
그가 질문을 하자 탄야는 곧장 대답을 했다.
이건 고민할 것도 없는 뻔한 이야기였다.
“저렇게 포위를 하고 있다는 것은 저에게 역모의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곧장 쳐들어오지 않은 것이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술탄이 즉흥적으로 내린 명령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마도 저들을 이끌 장군을 못 찾았을 것입니다.”
“마두라이의 수도가 바로 코앞인데 저 정도의 병사를 이끌 이가 없다는 것이 말이 되오?”
“능력 있는 이들은 제가 고려를 다녀온 사이에 온갖 핑계로 처형을 당한 상태고 살아남은 이들도 대부분 국경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탄야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처형당한 이들 대부분 친한 이들이었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앞으로 마두라이 술탄국을 함께 이끌 동지들이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다음 차례가 자신이라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어쩌면 자신을 고려에 보냈던 것도 혹시 모를 반란을 대비하기 위한 노림수였을 수 있었다.
“이대로 당하고 있을 것이오?”
정휘는 답답한듯 탁자를 내리쳤다.
아직 도시 밖에는 자신의 부하들이 있었다.
언제 발각되어 죽을지 모르는 상황인데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그 순간에 탄야는 고민이 꽤 많았다.
이 일을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어차피 죽을 바에는 발악이라도 해보는 것과 이번 기회에 아예 고려로 망명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그런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인임이 폭탄 발언을 했다.
“이왕에 이렇게 된 거 술탄을 끌어내립시다.”
현재의 술탄은 정통성이 없는 자였다.
그나마 나지르가 술탄에 오른 뒤에 거의 10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그전까지는 2~3년에 한 번씩 술탄이 바뀌었던 나라였다.
심지어 왕족의 혈통을 가진 이들도 아니었다.
고려와 달리 이 나라는 왕좌에 앉으면 아무나 왕이 될 수 있는 근본 없는 이상한 나라였다.
하지만 탄야는 아직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단디굴에 있는 병사의 수도 많지 않고 병사들의 가족 대부분이 마두라이에 있어서 보복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저들을 이끌 만한 장수는 모두 죽거나 국경에 있다니 오히려 기회가 될 것이오.”
“우리도 힘껏 돕겠소이다.”
정휘도 옆에서 이인임의 말을 거들었다.
그에게도 눈치라는 것이 있었고 대충 이인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아챘다.
안 그래도 고려에서 떠나기 전에 이인임을 감시하라는 지시를 내리며 들은 말이 있었다.
그것은 혹시라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다면 반드시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에는 그럴 일이 있겠냐며 흘려들었으나 어쩌면 지금 같은 일을 예견했던 것 같았다.
‘소름이 돋을 정도구나.’
전하의 혜안은 하늘이 내린 것 같았다.
정휘마저 이인임과 함께 부추기며 반란을 거론하자 탄야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마팔국 왕족의 후예이자 혈기 왕성한 이십 대인 그가 욕심이 없을 수 없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연히 술탄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다.
아마도 자신과 비슷한 나이인 고려의 왕을 보고 그런 욕망에 불이 붙은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과연 그게 가능한 건지 확신이 없었다.
잠시 그가 깊은 고민에 빠지자.
이인임과 정휘는 옆에서 기다려줬다.
어차피 결정은 그가 내려야 하는 것이다.
뒤에서 아무리 밀어도 본인이 싫다면 어떤 일도 이뤄내기 어렵다. 하지만 이인임은 탄야와 반년 넘게 보낸 시간이 있기에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가 본 탄야는 생각보다 야심이 많았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그의 눈에는 보였다.
“좋습니다. 술탄을 칩시다!”
적막한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탄야는 결심을 내렸는지 단호하게 외쳤다.
어차피 술탄의 곁에는 달콤한 말만 늘어놓는 아부꾼만 있을 뿐이고 마두라이와 왕궁의 근위병 중에는 자신의 사람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단디굴을 포위하고 있는 병사들이었다.
“그들을 어떻게 따돌리고 마두라이로 돌아가냐가 문제입니다.”
탄야가 그 부분을 지적하자.
세 사람은 동시에 깊은 생각에 잠겼다.
도시 밖에 진을 치고 있는 병사는 탄야가 이끄는 단디굴의 병사보다 서너 배는 되었다.
그런데 탄야의 말을 들어 보니 아예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되진 않았다.
“저 병사들 대부분이 최근에 처형당한 이들의 수하였다는 것인가?”
“맞습니다. 병사들을 이끌고 온 술탄의 심복만 빠르게 잡으면 우리 쪽으로 넘어올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건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정휘가 자신 있게 나섰다.
비록 남은 홀치가 몇 명 안 되지만,
적의 장수를 잡는 것은 그들의 특기다.
지난해에 만들어진 훈련도감에 소속되어 여러 전술 이론을 배웠으나 흔들리지 않는 단 하나의 전술 교리가 우두머리부터 잡는다는 것이다.
그 뒤로는 다들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탄야가 결심을 내렸으니 머뭇거릴 여유는 없었기에 서둘러 단디굴의 병사를 모았다.
그리고 그날 밤이 지나기 전에 새벽을 틈타서 포위를 하고 있는 이들의 본거지를 쳤다.
갑자기 밀려 나온 삼천여 명의 병사는 순식간에 중심부까지 밀고 들어가 임시 지휘관이었던 이를 죽이는 것까지 성공을 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쇠뇌의 역할은 상당했다.
그들에게는 고려에서 가지고 온 수십 개의 수노기가 있었는데 순식간에 수백 개의 화살을 코앞에서 쏘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재장전을 하는 것도 쉬웠기에 기습을 당한 쪽에서는 수백 명의 궁사가 쏘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날이 어둡고 깃털마저 안 달린 화살이라 어디서 날아오는 건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이제부터는 탄야가 나서야 했다.
“마바르 왕족의 후예인 나는 더 이상 술탄의 횡포를 참을 수 없다. 너희를 이끌던 장군의 원통함을 갚고 싶은 자는 나를 따르라!”
그의 연설은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단디굴을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의 상당수가 술탄의 폭정을 직접 경험한 이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탄야가 반란을 선언하니 그의 편에 서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당연히 거부하는 이들도 있기는 했다.
그런 이들은 대부분 포박을 당하거나 끝까지 발악을 하다가 죽어서 차디찬 시신이 되었다.
그렇게 병사들을 흡수한 탄야는 이인임 등과 함께 곧장 마두라이를 향해 달려갔다.
이제부터는 속도가 무척이나 중요했다.
그들은 거의 이틀 동안 쉬지 않고 달려서 마두라이에 도착했는데 그들을 맞이한 것은 겨우 수십 명의 성문을 지키는 병사가 전부였다.
그들은 갑자기 만여 명에 달하는 이들이 밀려오니 상당히 당황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성내에 있는 이들에게 알리는 것조차 성공하지 못했다. 어느 사이에 성벽에는 백여 명의 병사가 올라와서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무기를 버리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정휘와 홀치들이 이끄는 병사들이었다.
먼저 단디굴에서 출발해서 마두라이에 잠입을 한 덕분에 쉽게 성문을 장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작 그것 때문에 먼저 온 것은 아니다.
그들과 함께 먼저 온 부관들은 탄야를 지지해줄 이들을 급하게 찾아갔는데 생각보다 수많은 명문 가문이 무기를 쥐고 탄야를 기다렸다.
생각보다 탄야의 인망은 상당했다.
거기에 술탄에 대한 증오도 한몫을 했다.
폭정을 휘두르고 있는 술탄을 끌어내리자는 말에 다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담했다.
성문이 열리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력이 안으로 들어서자 탄야의 뒤로 순식간에 무수히 많은 이들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대충 2만 명은 되는 것 같았는데 이인임은 그걸 보자 이번 일은 성공할 거란 확신을 얻었다.
그 정도의 수를 막아설 수 없었다.
왕궁에 수백 명의 근위병이 있었지만,
순식간에 입구가 뚫렸고 탄야는 성큼 거리는 발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서자 왕좌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나지르가 보였다.
그는 분노로 가득 찬 얼굴로 탄야를 꾸짖었다.
“네가 감히 나에게 이럴 수 있느냐! 적어도 너만큼은 배신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배신은 술탄께서 먼저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고려에서 온 사절단을 죽이려 하셨습니까?”
“고작 그들 때문에 마두라이 술탄에게 반역을 하려고 하는 것이냐!”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탄야는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그간 억울하게 죽어서 나간 신하들을 비롯해 나라를 지켜야 할 장수들의 죽음을 거론했다.
더구나 현재 마두라이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다른 나라와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상황인 것을 강조하며 이번 일의 정당성을 확고히 했다.
그러자 다들 탄야의 말에 동조했다.
심지어 술탄을 지키는 이들조차 흔들릴 정도였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이인임은 흡족한 표정으로 탄야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가 하는 말의 대부분이 이인임이 써준 말들이었는데 이번 일의 당위성과 사람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술탄도 그걸 듣고만 있지는 않았다.
대부분 자신의 과오를 지적하는 말들이었다.
심지어 거기에 동조하는 표정을 하고 있는 왕궁 근위병도 있을 정도였기에 어서 탄야의 말을 끊어야 했다. 고개를 돌려서 근위 대장을 바라보자 그는 곧장 무슨 의미인지 알아채고 순식간에 활을 당겨서 탄야에게 화살을 쏘았다.
따아앙!
하지만 그 시도는 통하지 않았다.
그 앞을 지키고 있던 이의 칼날에 맞고 화살은 위로 튕겨 올라가 천장에 박혀 버렸다.
깜짝 놀란 표정을 하고 있는 탄야의 앞에는 어느 사이에 홀치들이 칼을 쥐고 서 있었다.
이미 기습이 있을 거란 예상을 하고 있었던 덕분에 막을 수 있었는데 술탄은 그 모습을 보고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장 저놈들의 목을 베어라!”
마침내 술탄이 공격 명령을 내리자.
술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술탄의 근위병은 정예병이기에 단디굴에서 싸웠던 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 잘 싸워도 수적인 차이를 뒤집어엎을 정도는 아니었다.
심지어 칼을 버리고 탄야의 쪽으로 넘어오는 이들마저 있었기에 무게추는 금방 기울었다.
더구나 이쪽에는 정휘가 있었다.
그는 홀치와 함께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근위병을 베면서 술탄에게 접근했다.
마치 야차와 같은 모습이었는데 그 기세에 놀라서 술탄이 뒤로 넘어졌을 정도였다.
정휘의 발걸음을 막기 위해서 급하게 근위병이 달려들었으나 탄야의 병사들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뭣들 하는 것이냐. 어서 저놈부터 해치워라.”
술탄은 엉덩방아를 찧은 채.
정휘를 향해 손가락을 하며 발악했다.
하지만 그런 그를 지켜줄 이는 보이지 않았다.
바둥거리고 있는 그에게 다가선 정휘는 기합을 내뱉으며 칼을 크게 휘둘렀다. 당연히 술탄은 그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목이 베어졌다.
마두라이를 지배하던 5대 술탄의 최후였다.
나지르의 목이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자.
더는 싸울 의미가 없기에 피투성이가 된 근위병 대부분이 칼을 놓고 곧장 탄야에게 항복했다.
그걸 지켜보던 이인임은 탄야를 왕좌의 자리에 올리고 이곳까지 오면서 외웠던 말을 외쳤다.
“새로운 술탄이시다. 모두 머리를 조아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