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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41화 (41/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41

원나라의 12대 황제 소종(昭宗).

몽골 제국의 16대 칸인 빌레그트 칸이 될 아이유시리다라가 황태자가 되었다는 소식은 금방 개경과 고려 전체에 퍼져나갔다.

그 소식을 가장 반긴 것은 임진 정변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기씨 가문의 이들이었다.

기철의 셋째 아들 기세걸.

그리고 넷째 아들 기새인첩목아.

지난해 임진 정변이 일어날 무렵.

두 사람은 원나라에 있어서 살아남았다.

현재 기씨 가문은 셋째인 기세걸을 중심으로 기새인첩목아가 도와서 이끌고 있으나 가문의 위상은 기철이 살아있을 때만 못했다.

아무리 가문의 위세를 등에 업는다고 하더라도 두 형제의 나이는 이제 겨우 약관을 넘어섰다.

당장 도당에서 중책을 맡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유시리다라가 황태자에 책봉된 것이었다.

당연히 콧대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황후와 황태자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아무리 현재 기 황후가 원 제국의 실권을 꽉 잡고 있다고 하더라도 황제와 비교할 수 없다.

언젠가 원 제국의 황제가 될 이가 자신들의 피가 섞인 사촌이니 기뻐할 만 했다.

이 세계에서 누구보다 든든한 뒷배였다.

그런 탓인지 기세걸의 집에는 온갖 종류의 고기와 갖가지 음식을 실은 수레가 뻔질나게 오갔고 진한 기름 냄새가 거리에 가득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8월 무렵이 되자.

원나라에서 보낸 만만태자가 고려에 왔다.

황태자의 할머니인 영안왕대부인에게 성대하게 보르차 연회를 열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들끼리의 잔치면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될 일이지만, 문제는 보르차에 들어가는 모든 것을 고려에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고려가 휘청거릴 수준이었다.

무려 5천 필이 넘는 베로 조화를 만들고 온갖 사치품이 사용되어 물가가 폭등해서 이듬해에 신하들에게 새해 선물도 못 줄 정도였다.

이번에도 그것만큼은 바꿀 수 없었다.

온갖 고민을 다 해봤다.

만만태자가 오기 전에 없애버릴까.

아니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저비용 고효율을 노려볼까. 그것도 아니면 배 째라는 식으로 연회의 규모를 대폭 축소해볼까.

결론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원나라에게 대들면 무슨 수를 써도 새드 엔딩이 나올 것 같았다.

“하아··· 저걸 확!”

드디어 떠나는 만만태자를 보면서.

도성 밖까지 나와서 전송을 하던 나는 격분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분노를 담아서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어서 거칠게 흔들었다.

그걸 본 신소봉은 의아하게 봤다.

“그건 무슨 뜻이옵니까?”

“알 것 없다.”

“누가 봐도 욕인 것 같으니 그만 하시옵소서.”

“그렇게 보이더냐.”

신소봉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이 손가락을 슬쩍 접어야 했다.

만만태자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쯤에서 등을 돌렸는데 나와 비슷한 표정인 이인복과 김득배가 보였다. 평소에 감정 표현을 극도로 절제하는 이인복은 물론이고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김득배조차 얼굴이 벌겋게 달아 있었다.

판도사를 이끌고 있기에 그럴 만 했다.

지난 1년 동안 아껴서 마련한 재물을 대부분 털었는데도 부족해서 관리와 부자에게 이중 과세까지 해서 베를 빌려와야 했다.

덕분에 김득배와 그 아래서 일하는 판도사의 관리는 평생 먹을 욕을 다 먹어야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난해 이공수가 원나라를 다녀온 후.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게 완전한 끝을 의미하진 않을 것입니다.]

당시의 기 황후는 황태자 책봉에 힘을 쏟고 있었기에 분노를 잠시 억누른 것에 불과했다.

이공수는 언젠가 그녀가 폭발할 거라 봤다.

어린 시절부터 기 황후는 자신을 해코지하는 일은 잊지 않고 갚아주는 성격이라고 했다.

원래의 역사를 보면 그의 분석은 상당히 정확한 편이었다.

하지만 당장 일어날 일은 아닐 것이다.

지금의 원나라는 홍건적이란 악재도 있지만,

오히려 이제부터 황실 내부의 암투가 더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다. 이미 황실의 권력을 쥐고 있는 자와 황태자와의 주도권 쟁탈전이다.

알아서 기는 척만 한다면 당분간은 고려에 크게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시간을 벌기 위한 투자라 치자···’

속이 쓰리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화를 만드는 데 쓴 베를 그냥 버릴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든 재활용을 해서 다시 본전을 뽑을 생각이었다. 보통의 조화라면 조각내서 붙여 만드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약간의 꼼수를 썼다.

눈에 보이는 부분만 정석대로 만든 뒤.

뒤쪽에 놓이는 것들은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크게 만들었다. 덕분에 대형 조화가 만들어졌고 사용한 베의 양도 꽤 많이 줄었다.

나는 배웅을 하기 위해서 같이 나와서 옆에 서 있던 가진을 바라보면서 보르차에 사용한 베의 재활용은 어떻게 되고 있냐고 물었다.

“공방의 아낙들이 천 조각을 기워서 옷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누더기처럼 보이지는 않겠지요?”

“아이들 옷은 전혀 티가 안 나니 걱정 마세요.”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직물에 관련해서는 나보다 훨씬 더 전문가가 된 가진이었다. 온종일 직물을 짜고 옷을 만드는 공방에 머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만드는 옷은 대부분 왜국에서 들여오는 유황과 교환하는 형식으로 처분될 것이다.

왜국이 가장 선호하는 것이 고려의 직물과 그릇인데 집착에 가까울 정도였다.

‘도대체 얼마나 더 참아야 할까.’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오고 있었다.

공민왕 이 녀석은 도대체 어떻게 참았지.

하지만 들끓는 감성과 달리 이성은 최소 2~3년은 기다려야 한다고 계속 위험 신호를 보냈다.

이길 수 있다는 확신까지는 아니더라도 비벼볼 수준은 되어야 객기라도 부릴 수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나저나 이인임, 이 작자는 도대체 뭐 하느라 아직도 안 돌아오고 있는 거야?”

*

수도 마두라이의 뒷골목.

이인임은 죽을힘을 다해서 뛰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는 미로 같았다.

이곳에 사는 이들조차 길을 자주 잃는다고 할 정도로 악명이 높은 곳이 마두라이였다.

조금 높은 곳이라도 있으면 올라가서 이곳이 어딘지 확인이라도 해볼 텐데 대평원에 세워진 도시답게 그럴 만한 곳도 전혀 없었다.

그때 골목 앞에서 발자국 소리가 났다.

다급하게 옆쪽으로 빠져서 몸을 숨기자 횃불을 든 마두라이의 병사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일렁거리는 빛에 반사되는 눈동자는 광기 어린 모습이었고 손에 쥔 초승달처럼 휘어진 칼에서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들이 지나치자 이인임은 참고 있던 숨을 거칠게 내뱉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더는 뛸 수 없었다.

“빌어먹을!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인임은 애꿎은 바닥을 내리쳤다.

어째 처음부터 술탄의 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는데 결국에는 이런 사달이 나고 말았다.

탄야에게 술탄에 대한 것을 물을 때마다 꺼려하던 때부터 뭔가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인도에도 초석의 정제 기술이 있었다. 다만, 널리 퍼지지 않았기에 탄야가 몰랐던 것 같았다.

어쨌든 그 덕분에 꽤 쉽게 염초를 구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그걸 가지고 나가는 것을 술탄이 허락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술탄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 차례 탄야를 통해 통역이 되었지만,

표정과 몸짓에 담긴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술탄은 탄야가 고려에서 이뤄낸 성과에 대해서 그리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쇠뇌의 성능이 부족하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그건 질투였다.

자신보다 더 뛰어난 이를 향한 시기.

누구보다 이인임은 그 기분을 잘 안다.

그 역시도 나이가 불혹이 넘어갈 때까지 형인 이인복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며 살아왔다.

자격지심이란 것을 본인도 잘 알지만, 가슴 속에서 자라나는 어둠의 씨앗은 걷잡을 수 없다.

이인임은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지금 그런 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다.

일단 정휘와 일행부터 다시 찾아야 했다.

그때 머리 위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다급하게 돌아섰다. 품에서 단도를 꺼내서 휘두르려고 했으나 내려다보고 있는 얼굴을 보고 멈췄다.

그토록 애타게 찾던 정휘였다.

“접니다. 그러니 칼 내려놓으시죠.”

“망할, 잘못하면 애꿎은 사람 멱을 딸 뻔했지 않나.”

“영감께서 저를요? 죽었다가 깨어나도 절대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지금 농이 나올 때인가.”

“일단 올라오시죠.”

정휘가 손을 내밀자 이인임을 그걸 잡았다.

그가 번쩍 들어 올려서 건물 위로 올라서니 대여섯 명의 홀치와 염초 장인이 흩어져서 어둠 사이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같이 동행했던 홀치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안타깝게도 활로를 터주다가 당했네.”

“저희 쪽도 숙소에 있다가 기습을 당해서 서너 명을 잃었습니다.”

“그럼 우리쪽은 이게 전부라 봐야겠지. 혹시 탄야도 당한 것은 아닌가?”

지금 믿고 의지할 곳은 탄야밖에 없었다.

나름 상당히 큰 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있는 그가 건재하다면 일단 그쪽으로 피해야 했다.

정휘는 거기까지는 알 수 없다고 대답하면서도 일단 그를 찾아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했다.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정휘는 주변의 지형을 한 번 살피더니.

곧장 방향을 잡고 일행을 이끌고 움직였다.

머지않아 해가 떠오르게 될 텐데 그때가 되면 마두라이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어둠이 내려앉아 있는 이때 빠져나가야 했다.

머뭇거릴 틈도 없이 그들은 움직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골목에는 횃불을 들고 뛰어다니며 자신들을 찾는 병사가 꽤 많았다.

당연히 건물 위로 올라와 살피는 이들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홀치는 화살을 쏘거나 은밀하게 다가가서 조용히 처치하고 돌아왔다.

소리 없이 움직이는 그들은 그림자 같았다.

손짓만으로 의사 소통을 하면서 단도 하나로 적을 처치하는 모습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마두라이에 와서도 매일 훈련을 했으나 저 정도의 수준인지는 오늘에서야 알게된 그였다.

‘전하께서 괴물을 만드셨구나.’

적으로는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이들이었다.

반면에 같은 편이라 생각하니 무척 듬직했다.

술탄의 부름을 받고 나섰다가 기습을 당했을 때 목숨까지 버려가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던 홀치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명했다.

절대 잊으면 안 되는 목숨 빚이었다.

홀치의 활약 덕분에 마두라이를 빠져나온 그들은 곧장 탄야가 있는 딘디굴로 향했다.

대충 마두라이에서 150리 정도의 거리였는데 그들도 탄야의 초대로 한 번 다녀온 곳이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다친 이들도 있었기에 거의 사흘 밤낮으로 달려서 그곳에 도달하니 이니 술탄의 병사가 딘디굴을 에워싸고 있었다.

“탄야가 아직 잘 버티고 있나 보군.”

“안으로 들어가실 겁니까?”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지 않나.”

“그러면 저 혼자 들어가서 상황을 보고 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아니네. 나도 꼭 같이 가야 하네.”

이인임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직접 탄야를 봐야 했다.

그래야 앞으로 어떻게 할지 정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인임이 강경하게 나오자 정휘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지켜드리지 못 할지도 모릅니다.”

“죽어도 원망은 하지 않겠네.”

“알겠습니다. 너희는 여기서 대기하고 있거라.”

홀치 가운데 한 명만 지목한 뒤.

그들 세 명은 조용히 딘디굴로 잠입했다.

여러 난관 끝에 어렵게 도시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탄야의 집무실 앞까지 도달했다.

다행히 탄야의 부관은 그들을 알아보고 곧장 작전을 검토 중인 탄야의 앞으로 데려다줬다.

“살아 계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자신 때문에 생긴 일이라 생각한 건지.

탄야는 이인임과 정휘를 보고 무척 반겼다.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그였다.

하지만 남 걱정해줄 것도 없이 탄야도 꽤 험한 일을 당한 건지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전에 없었던 상처가 얼굴에 생겼고 팔다리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자네 얼굴은 왜 그러나?”

“저 역시 죽을뻔하였는데 겨우 살아났습니다. 이곳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이인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본 모든 것들을 놓고 생각해 보면 이번 한 번만 어찌 잘 넘어간다고 해도 마두라이까지 온 일이 해결되진 않을 것이다.

술탄이 저렇게 나오면 염초를 가지고 돌아가는 일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이인임은 탄야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봤다.

인망이 높고 그를 따르는 이도 적지 않았다.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에 술탄에게 찍혀서 이렇게 공격까지 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 와서 주상께서 내리신 임무를 실패하고 도망치듯 고려로 떠날 수는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이인임은 불현듯 한 가지 계책이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것 밖에는 당장 떠오르는 해결책이 없었다.

이미 마두라이 곳곳에서 초석을 정제하여 염초가 쌓여가고 있으니 술탄의 허락만 받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술탄만 바뀌면 될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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