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39
성균관 개편에 대한 여파는 컸다.
이 세계에서 어느 누구보다 보수적인 곳이 성균관이었는데 예고 없는 전격적인 개혁이었다.
안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던 강중경이 대사성이 되자마자 저지른 일이기에 유생은 물론이고 온갖 곳에서 그를 향한 탄핵이 올라왔다.
아무리 성균관이 예전만 못하다고 하더라도 유학자들에게는 상당히 의미가 깊은 곳이었다.
특히 권문세족의 반발이 상당히 거셌지만,
강중경과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번 조치도 많이 참고 참아서 이 정도에 그친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유학학부를 절반 수준까지 대폭 줄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몇 년 후로 미뤄야 했다.
외부의 적부터 해결하고 할 일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외면을 하기에도 어려웠는데 그래서 유생들 사이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차별만큼은 이번에 해결하려 하는 것이었다.
고려에도 분명히 신분 제도가 있다.
하지만 그걸 더 심화시킬 생각은 없었다.
말단 관직에 있는 이나 재추나 같은 선상에 놓고 봐야 하는데 국자학에 다니는 유생부터 자신은 남다르다는 특권 의식에 찌들어 있었다.
실제로 성균관에서도 그들은 왕처럼 군림했다.
‘그런 꼴은 또 두고 볼 수 없지.’
무리를 지어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
그런 짓은 나중에 관직을 받고도 반복된다.
못된 버릇을 몸에 익히기 전에 없애는 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유생들의 불만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상당히 심했다. 그와 관련된 상소문이 무더기로 올라올 정도였다.
“불만이 그리 많으면 나도 필요 없으니 당장 짐을 싸서 성균관에서 썩 꺼지라고 하시오.”
상소문을 읽던 나는 던지듯 내려놨다.
그러자 신소봉이 다가와 흐트러진 물품을 정리했는데 그도 그렇고 강중경도 화를 내는 나를 보고도 놀라거나 겁내지는 않았다.
아무리 화가 나도 다른 이에게 화풀이하진 않을 거란 믿음과 경험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정하시옵소서.”
“어려서부터 못된 짓만 배우고 있지 않소. 그런 자들이 도당에 들어오면 어떤 정치를 행할지 뻔히 보이지 않으시오?”
“인성을 가르치는 것도 성균관의 훈육 목표이니 소신이 최선을 다해 바른길로 이끌겠사옵니다.”
“그대만 믿고 있겠소.”
그냥 하는 말은 결코 아니었다.
강중경은 어느 것 하나 특출난 것이 없었다.
대도에서부터 함께한 정세운보다 무예도 강하지 않고 유숙보다 성리학에 깊지도 않다.
얼핏 들으면 욕이나 다를 것이 없는 평가였으나 그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따로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갈대와 같달까.
아무리 거세게 흔들어도 꺾이진 않았다.
좀처럼 보기 드문 강철 같은 멘탈과 사람을 보는 눈은 상당히 좋았기에 지금 이 시기의 성균관에는 누구보다 대사성으로 잘 어울렸다.
그는 나의 관심을 돌리려고 의도한 건지 곧장 잡학이라 불리는 기술학부 이야기를 꺼냈다.
“율학과 서학은 올해 추가로 이십 명을 더 받기로 하고 산학은 전하께서 하명하신대로 오십 명을 더 늘릴 준비를 하고 있사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율학은 형률을 공부하는 곳으로 향후 전법사나 지방에 내려가 각 지역의 목사(牧使) 아래서 실무를 맡을 이들이었다.
그 밖에 서학은 서예 교육을 받는 곳이고 산학은 수학을 공부하는 곳이라고 보면 되었다.
원래는 명경학까지 포함해서 7학이라 불렀는데 나는 거기에 추가로 공학(工學)이라는 새로운 과정을 하나 더 신설했다. 말 그대로 과학에 관련된 내용을 배우는 곳이라고 보면 되었다.
“공학의 신설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소?”
“성균관 옆쪽으로 따로 건물을 올려서 잡학··· 아니 기술학부를 옮기기로 했사옵니다.”
강중경은 말을 하다가 아차 싶었다.
앞으로 절대 잡학이라 부르지 말라던 내 지시가 뒤늦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잡학이란 말은 유교만 중요하고 나머지는 잡다하다는 뜻이다.
대사성이 쓸 말은 아니었는데 그 정도의 실수는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은 의논할 다른 일이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장 그들을 먹이고 재우는 것도 문제였다.
성균관은 공교육의 하나로 모든 비용을 고려에서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개경에 사는 이들은 자택에서 먹고 자니 문제 될 것은 없지만, 지방 출신은 기숙사처럼 성균관 내에서 머물 곳을 제공해줘야 한다.
갑자기 인원수가 늘어나니 그럴 만한 자리가 부족했는데 다행히 쇄권도감에서 회수하고 있는 재물이 이번에 꽤 많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현재는 근처에 있는 빈방이 있는 민가에 한두 명씩 거주할 수 있도록 주선하고 있사옵니다.”
“그것도 한계가 있을 테니 내수사에 연통하여 비어있는 집이 있는지 알아보시오.”
“그리하겠사옵니다. 하온데 공학을 가르칠 서적이나 공학박사는 어찌하옵니까?”
“아직 시간이 있으니 기다려 보시오.”
나도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요즘 밤마다 교과서를 쓰느라 죽을 것 같았다.
문과 출신인 내가 팔자에도 없는 이과 교과서를 쓰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애초에 관심이 없던 분야이기에 기억을 쥐어 짜내는 중이었다.
이 세계에 처음 도착했을 당시에 역사를 정리했던 것에 비해 수십 배는 더 어려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있기는 했다.
내가 기억해내도 쓸 수 없는 지식이 많았다.
어차피 이뤄낼 수 없는 것들은 빠르게 포기하고 초등학생 수준의 눈높이로 입문학을 써야 했다.
일종의 탐구 생활과 비슷한 수준이랄까.
그렇게 생각하니 꽤 쉬워졌다.
이미 완성된 것도 하나 있었다.
기술학부의 공통 과목으로 채택될 산수였다.
수학이라 하지 않은 이유는 기초적인 셈과 확률의 개념 그리고 아라비아 숫자를 소개하는 정도로 그칠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신소봉과 몇 명의 내관을 통해 시도해보니 익히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때 유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났다.
“과인은 이만 일어나봐야겠소.”
강중경도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최근에 내가 유시만 되면 사라진다는 것은 궁궐 내에 널리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리고 정확하게 한 시진 후에 식사를 하러 돌아오고는 했다.
하지만 누구도 뭐라고 하는 이는 없었다.
그 시각에 내가 향하는 곳은 가진의 공방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고려 시대라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 시대처럼 법도를 따져가며 옭아매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따지고 보면 선왕들과 비교해 보아도 유별나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할아버지인 충선왕은 고려를 떠나서 아예 원나라의 대도에서 머물며 원격 통치를 했다.
그렇다고 형님인 충혜왕이 했던 것처럼 막장 짓을 하고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자 가진의 공방이 보였다.
2층으로 세워진 공방은 분주했다.
넓은 마당에는 염색을 해서 걸어 놓은 면포가 몇 장 있었는데 아마도 새로운 색상을 시험하는 것 같았다. 색상은 자주색부터 푸른색까지 생각보다 무척 다채로웠다.
바람에 흩날리는 면포 사이로는 십여 명의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꺄르르 거리며 뛰는 그들이 하는 놀이는 축구였다.
지푸라기를 엮어서 원형으로 만든 뒤.
가죽을 꿰매서 만들었는데 탄력은 기대할 수 없으나 공을 차고 놀 수 있을 정도는 됐다.
기존에도 축국(蹴鞠)과 농구와 흡사한 포구락(抛毬樂)이란 것도 있지만, 요즘에는 축구에 아예 빠져서 하루도 빼먹지 않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다니 참 좋구나.’
이 아이들이 누군지 알면 놀랄 거다.
앞에서 공을 차며 달리는 아이가 길재와 함께 고려 3은을 다투는 이숭인이었고 그를 막아서려 하는 아이는 전제 개혁을 주도하는 조준이었다.
그 뒤로는 이제 7살이 된 하륜과 정지가 뒤따라 달리고 있었는데 요즘 가진의 공방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 것처럼 시끌시끌했다.
이 아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
확실히 범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다들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이들다웠다.
심지어 성균관의 기술생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수학도 어린 나이인데도 쉽게 배웠다.
이제는 아라비아 숫자와 사칙 연산 정도는 다들 기본은 익혔는데 그러다 보니 천재들만 모아 놓은 영재 교육원 느낌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아이들을 모으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개경에 살고 있던 이들은 그나마 쉬웠으나 각지에 흩어져 있었기에 전국의 영재를 모아서 조기 교육을 하겠다는 핑계로 데려와야 했다.
성균관 병설 유치원과 초등학교라 보면 되었다.
내가 잠시 지켜보는 사이에 축구가 끝났는지 아이들은 기다리고 있던 노복과 함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을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서자.
베를 짜는 아낙네들이 일하는 모습이 보였다.
건물 1층을 가득 메운 그들은 각자 베를 짜고 있었는데 한쪽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가진이 보였다.
손에 쥐고 있는 거로 봐서는 새로 시도하는 염색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온 것도 모르고 있다가 다들 일어나 나에게 고개를 숙이자 그제야 나를 발견하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벌써 유시가 됐나요?”
“종소리가 여기서는 잘 안 들리나 봅니다.”
“집중하다 보면 종종 놓칠 때가 있네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가진은 나를 이끌고 이층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작은 사무실처럼 가진이 업무를 볼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이곳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쉴 수 있는 곳도 필요하기는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여섯 명의 청년들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정몽주도 있었다.
매일 유시에 만나기로 한 약속은 달포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상태였다.
그래도 처음에 봤을 때와 비교하면.
현재의 정몽주는 꽤 많은 변화가 생겼다.
여전히 성리학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였으나 그래도 본학의 필요성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일단 의구심이 가슴 속에 생겼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그 틈새는 점점 더 커질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우리가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한참 열띤 토론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잠깐 여기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나 봅시다.”
가진에게 목소리를 낮춰서 속삭이자.
그녀는 알겠다며 멈춰 서서 귀를 기울였다.
안에 있던 이들은 새로게 만들어가고 있는 본학의 기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부분 10대인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수준 높은 대화들이 오갔다. 그러나 정작 그곳에서 가장 활발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것은 오히려 가장 어려 보이는 유생이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모두 상당히 중요한 거라 생각하지만, 저는 주상께서 주창하신 본학이야말로 앞으로 고려가 가야 할 길이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만물의 본질을 탐구하여도 그걸 연구하는 이의 수양이 부족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먼저 자신을 갈고닦는 수기(修己)를 행하고 옛 성현의 말을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늙어서 죽을 때까지 성현의 말만 쫓다가는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할 겁니다.”
정몽주는 그런 그의 의견에 반대했다.
오늘은 그가 본학의 반대편에 서서 공격을 하는 역할을 맡은 것 같았다. 정몽주는 그 정도의 공부로 몸과 마음을 닦은 것에 성공하는 이는 없을 것이라며 헛점을 노렸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으며 상대방의 논리를 무너뜨리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분위기가 험악한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가 예리하게 허점을 찌르면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는데 내가 살던 세계에서 혈압을 올려가며 언성을 높이는 토론만 보던 내가 적응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실제로 그들의 옆에서 있는 이들은 이런 모습을 자주 봤는지 웃으며 내용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정리되는 대담(對談)의 내용은 갖자 나눠서 가져가 이론을 정리하여 돌아왔다.
어차피 단숨에 이뤄질 내용은 아니었다.
세상에 이걸 내놓을 무렵에 인정을 받으려면 논리나 추구하는 방향성 모두가 확실하게 정리되어도 상당히 쉽지 않을 일이었다.
최소 10년에서 20년 정도는 예상하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저 두 명이 이립(而立) 정도가 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대가 되었다.
“역시 가장 어린 유생이 눈에 띄는군요. 저 아이의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
가진은 정몽주와 대립하던 아이를 바라보며 인자한 웃음을 지어줬다. 역시 그녀도 보석처럼 빛나는 인재를 한눈에 알아본 것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어린 유생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전주목사 정운경의 장남인 정도전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