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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38화 (38/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38

쇄권도감을 설치한 뒤.

개경은 다시 또 시끄러워졌다.

그동안 빌린 쌀과 돈을 갚지 않은 이들을 판도사에서 고발하면 감찰사가 조사하고 전법사에서 최종 판결을 내리고 있었다.

그쯤 되니 마지못해 갚는 이들도 있었다.

결코 적은 양이라 할 수 없기에 김득배를 만나는 일은 생각보다 무척 잦은 편이었다.

더구나 그는 화폐국도 관리 중이다.

저화의 유통은 앞으로 고려의 경제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하기에 가진을 만나러 공방에 갔다가 돌아오며 판도사에 잠시 들렸다.

둘이 앉아서 한참 동안 올해 고려에서 사용이 가능한 예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무렵에 신소봉이 문을 살짝 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별일 아닙니다. 인기척이 나서 보니 도령 하나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서달이 밖에 대기하고 있으니 알아서 돌려보낼 것입니다.”

“아마 제 아래에서 수학하는 아이일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누군지 직접 확인해 보라고 말하자 김득배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을 내다보고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에 고향에 잠시 내려갔던 아이인데 제가 가장 아끼는 제자이옵니다.”

“상당히 총명한가 봅니다.”

“제가 감당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될 정도입니다.”

“평소에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 이 정도로 말하니 호기심이 생기는구려. 장차 크게 될 아이 같은데 이름이 뭡니까?”

“영주 출신인데 이름은 정몽주라 하옵니다.”

드디어 만나보게 되는구나!

여기서 정몽주를 만날 줄은 몰랐다.

이 세상에 와서 가장 보고 싶었던 인물이 몇 명이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포은 정몽주였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볼 수 있기는 했지만, 계기도 없었고 지난해에는 부원배의 척결 때문에 바빴다.

더구나 이 무렵의 정몽주는 아직 어렸다.

십 대 중반쯤 되려나 내가 살던 시대에서는 모두가 두려워한다는 중2병 시기였다.

정몽주가 관직에 출사하는 것은 4년 후쯤이고 문과에서 장원 급제 하는 것은 7년 후이다.

그런 그를 당장 곁에 두고 쓸수는 없었다.

살짝 열리는 문틈으로 시선을 돌리니 홀치에 배치된 서달이 정몽주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그걸 본 나는 김득배를 불렀다.

“과인이 잠시 저 아이와 이야기를 나눠도 되겠소?”

김득배는 잠시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와 함께 지내면서 종종 의도를 가늠하기 어려운 일이 있었기에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디 내놔도 부족하지 않은 자신의 제자에게 관심을 두는 것을 반기는 눈치였다.

곧장 문을 열고 나가서 정몽주를 데리고 들어온 그는 제자를 내 앞에 앉힌 뒤에 밖으로 나갔다.

이야기가 길어질지 모른다는 말에 밀린 일을 하겠다고 눈치 좋게 빠져주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추측하건대 주상전하이신 것 같사옵니다.”

“어찌 그렇게 생각하느냐?”

“지난해 십자거리에서 말을 타고 지나시는 것을 먼발치에서 뵈었던 기억 덕분이옵니다. 게다가 스승님께서도 전하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해주셨습니다.”

“과인에 대한 흉을 보진 않던가?”

정몽주는 깜짝 놀라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 일은 없었다며 목소리가 살짝 높아지는 것을 보니 아직 어리기는 한 것 같았다.

웃으며 농담이라고 하자 그제야 정몽주는 다시 안정을 찾았는데 생각보다 금방 진정했다.

이제 갓 약관을 넘어선 변안열이나 이인민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과연 어느 정도인지 시험을 해볼까?’

우선 가장 기본적인 질문부터 시작했다.

성리학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내용부터 시작해서 꽤 어려운 문제도 정몽주는 자신만의 해석을 더해 상당히 쉽게 풀어내고 있었다.

역시 김득배가 자랑할만큼 총명했다.

정몽주는 의리와 명분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어서 훗날 그가 세우는 의리론에 대한 흔적도 살짝 찾아볼 수 있었다.

“상당히 열심히 수학하였구나.”

“스승님의 훌륭한 가르침 덕분이옵니다.”

“그럼 이것에 대한 답을 해보거라. 성균관에서 유학을 배우는 과정이 최대 8년하고도 6개월이나 된다. 관직에 오르면 그게 무슨 도움이 될 것 같으냐.”

“작게는 청렴한 마음을 갈고 닦으며 크게는 나라를 위한 충심을 길러준다고 생각되옵니다.”

상당히 장황하게 정몽주가 설명했지만,

나는 적당한 부분에서 말을 끊고 다시 물었다.

“그러면 지난해에 그토록 많은 관리가 사사로이 재물을 갈취하고 부정을 저질러 벌을 받았는데 그들은 배움이 부족해서 그러했던 것이냐.”

정몽주는 그에 대한 답을 할 수 없었다.

당연히 그들 중에는 정식으로 시험을 봐서 급제를 한 이들도 있었고 저명한 스승 밑에서 배웠거나 심지어 성균관 출신도 많았다.

그렇다고 말하자니 임금 앞에서 고려의 과거 제도를 부정하는 것이고 아니라고 하자니 성리학이 불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는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정몽주는 청렴하기로 유명한 백문보와 염재신 등을 언급하며 반박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놔줄 생각은 없었다.

“그러면 그들이 성리학을 배우지 않았다면 탐관오리가 되었을 거란 말이냐?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단정 지을 수 있느냐?”

그쯤 되자 정몽주는 입을 다물었다.

입술을 깨물고 있는 것이 꽤 분한 것 같았다.

아무리 그가 총명하고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했다지만, 아직 영글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궤변을 슬쩍 섞어가며 논점을 흐려서 찜 쪄 먹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부정하진 않았다.

성리학 자체가 나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효를 중요시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마음은 어느 시대나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었고 기본적으로 모두가 가져야 하는 인성이었다.

아무리 개인이 완벽해지더라도 세상이 모두 그와 같아지는 것은 아니다. 머리를 깨끗하게 감아도 물이 더러우면 씻는 의미가 없다.

‘역시 조기 교육이 중요한 거야.’

내가 잡은 기준은 정몽주의 나이였다.

이색처럼 이십 대 중반이 된 이들은 이미 자신이 배운 것이 세상의 전부라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정몽주는 10대 중반이었고 정도전은 12세에 불과했다. 그리고 훗날 조선의 개국 공신이 되는 조준과 이숭인, 하륜 그리고 정지는 고작 6세에서 8세이니 아직 기회가 있었다.

그들을 앞으로 어떻게 키우냐에 따라 향후 100년의 역사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 시작을 정몽주로 하기로 했다.

오늘 그를 만나는 일은 예정에 없었지만,

어느 정도 기초적인 계획은 머릿속에 있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성리학으로 무장한 이들을 논리로 박살 내줄 말빨 죽여주는 이였다.

앞으로 정몽주를 비롯해서 정도전 같은 이들이 내가 행하는 모든 일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나는 붓을 들어 글귀 하나를 적어주었다.

[실사구시(實事求是)]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잘 모르겠사옵니다.”

“사실을 바탕으로 진리를 탐구하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마음을 갈고 닦는 것도 중요한 일이나 그것만으로는 세상이 바뀌진 않는다.”

“진리를 탐구하면 바뀔 수 있는 것이옵니까?”

“적어도 백성들이 더 편하게 살 수는 있겠지.”

쌀은 왜 조운선으로 움직여야 할까.

육로가 발전되지 않은 이유는 뭘까.

강을 넘기 위한 다리는 어떻게 만들까.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가지고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한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고 설명해줬다.

성리학에 통달하고 죽을 때까지 경전을 글씨 하나까지 분석한다고 이뤄낼 수 없는 일이다.

정몽주는 그걸 쉽게 이해하진 못 했다.

그러나 그의 신념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당장은 자신이 믿고 있던 이념과 스승인 김득배 때문에 인정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무엇보다 과연 성리학이 백성에게 도움이 되고 있기는 하냐는 말을 계속해서 곱씹고 있었다.

하지만 정몽주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아직 납득하기 어려우냐?”

“소인은 아직 배움이 미천하옵니다.”

“그러면 내일 유시(오후 5시)에 맞춰서 나를 찾아오너라.”

“하루 만에 될 일이 아니옵니다.”

“그럼 모레도 찾아오고 답을 찾을 때까지 하루도 빼놓지 말고 오거라.”

매일마다 궁궐에 찾아오라는 말에 정몽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전하가 머무는 궁궐이 그렇게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던가.

한편으로는 성리학의 중요함을 어떻게든 인정을 받고 싶다는 오기가 생겼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정몽주는 갑자기 뭔가를 떠올렸지 고개를 숙이며 말을 꺼냈다.

“그러면 저도 한 가지 부탁이 있사옵니다.”

“맹랑하구나.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자꾸나.”

“전하께서 원나라에서 돌아오실 당시에 수많은 서적을 가져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놈이 과인의 독서당(讀書堂)을 탐내는 것이구나.”

원나라에서 귀국할 당시.

가지고 온 책은 독서당에 모아놨다.

그 이후로도 개경은 물론이고 심부를 통해서 다양한 책을 하나씩 모으고 있었다.

지금은 거의 천여 권에 달할 정도였다.

소설과 시 그리고 역사서 등이 있기에 가능한 규모였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고려에서 쓴 책이 오히려 비중이 적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독서당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나를 제외하면 필사하는 이들이 전부였다.

개경내에 두어 곳 정도의 독서당을 만드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천천히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독서당이 있는 것은 어찌 알았냐며 물으려다 김득배가 스승인 것을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난계(蘭溪)가 말해주었더냐?”

“더 많은 책을 읽고 세상을 보는 눈을 넓히고 싶사옵니다.”

“하지만 거기서 유학에 관련된 책을 찾는 거라면 굳이 가볼 필요도 없다. 내 독서당에는 흔하디 흔한 사서삼경밖에 없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사옵니다.”

“좋다. 허락해주마.”

나는 흔쾌하게 그의 출입을 허락해줬다.

가능하면 그곳의 모든 책을 다 읽어보라고 권유하고 싶었다. 그게 쌓이고 쌓이면 자신의 좁았던 시야를 깨우칠 계기가 될지 모른다.

최종적으로 내가 바라는 것은 조선 시대의 실학에서 조금 더 나아가 본질적인 것에 대한 해답을 추구하는 본학(本學)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네가 그걸 이끌 것이다.’

*

정몽주를 만난 뒤.

교육 개혁은 서서히 시작됐다.

마침 정월이기에 머지않아 성균관에 새로운 학생을 맞이할 시기였다. 일단 나는 성균관의 대사성부터 강중경으로 갈아치웠다.

성리학에 조예가 매우 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족하다고 말할 수준도 아니었다.

어차피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그가 아니다.

그는 성균관에 있는 학유와 학정 등의 교원직을 관리하고 내 지시대로 운영을 하면 되었다.

이 시대의 성균관은 조선 시대처럼 선망의 대상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고려도 사교육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 공교육인 성균관보다 사교육 출신의 급제자 비율이 더 높았다.

가뜩이나 재정이 안 좋았던 시기라 성균관에 들어가는 투자 같은 것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쉽지는 않았다.

강중경을 그 자리에 앉히는 게 꽤 어려웠다.

대신들은 이제현을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누구보다 성리학에 밝고 이제 곧 관직에서 물러날 때도 되었으니 이제는 편히 성균관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것이 좋겠다는 논리였다.

당연히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번에는 개혁파의 도움도 거의 없었다.

유숙도 이제현과 친분이 많았고 윤택이나 염제신 등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그나마 이인복과 김득배 등이 내 편을 들어줘서 강중경은 간신히 성균관의 대사성이 되었다.

그가 성균관의 대사성이 되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모든 것을 뜯어고치는 것이었다.

[금일부로 성균관은 국자학과 태학 그리고 사문학을 유학학부로 통합하며, 잡학의 정원은 모두 유학학부와 동일한 수준으로 확장한다. 또한 모든 이들의 상한 수업연한은 4년으로 통일한다.]

그런 내용의 벽보가 성균관에 붙자.

내용을 읽은 유생들은 다들 난리가 났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아닌 밤중에 날벼락이었다.

기존에 그들은 가문의 위세에 따라 국자학과 사문학 등으로 나눠 있었다. 예를 들면 재추 이상의 후손은 국자학으로 들어갔고 7품 이상의 자손과 서인은 사문학에 들어가는 구조였다.

권문세족끼리만 모여 놓다 보니.

당연히 그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명성도 차이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구분도 없이 같이 수학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들 몸서리를 쳤다.

더구나 상한 수업연한이 기존에는 8년 6개월이었는데 절반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아니! 이게 말이 되는 것이오.”

“어찌 유교의 경전을 4년 만에 배운단 말입니까. 주역과 예기만 배워도 5년입니다.”

“아무래도 주상께서 광증이 있다는 말이···읍!”

“미친 거 아닌가. 자네도 십자거리에 효수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도 입 다무시게!”

“요즘 감찰사의 사람이 개경 곳곳에 퍼져 있다는 거 잊지 마시오.”

그 이야기를 듣자 유생들의 표정은 굳었다.

확실히 예전보다 살기 좋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그 과정이 평화롭거나 아름다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실제로 유생 가운데도 역적의 가문으로 지목되어 몇 명이 쫓겨나듯 성균관에서 나가야 했다.

잠시 벽보 앞에서 어물쩍거리고 있자 평소 지랄 같기로 유명한 학정이 나왔다.

“어서 안 들어오고 뭐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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