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36
그로부터 보름 뒤.
이인임은 탄야의 배에 올라탔다.
고려 땅을 떠나는 것도 처음이지만,
이렇게 커다란 배를 타본 경험도 전혀 없었다.
지금까지 그가 경험해본 배는 강을 건너는 나룻배 정도가 유일했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긴장한 것을 감출 수는 없었다.
바다는 왜 이렇게 깊은 걸까.
바닥이 보이지 않아서 더 두려워졌다.
위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니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는데 헤엄조차 배우지 못한 이인임은 자신의 결정에 대해서 잠시 후회했다.
아무래도 잠깐 뭐에 홀렸던 것 같았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그가 탄 배는 빠르게 벽란도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 주변은 물길이 상당히 강했다.
그냥 바라봐도 격류가 느껴질 정도였다.
배에서는 언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는데 이인임은 자기도 모르게 난간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 탄야는 웃으며 그의 곁에 나란히 섰다.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이 정도 물살 때문에 가라앉을 배는 아닙니다.”
“흠흠, 그런 것이 아니라. 일행을 찾고 있었소.”
이인임은 다급하게 핑계를 댔다.
괜히 약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탄야도 그걸 눈치채고 더는 그와 관련한 이야기를 이어가진 않았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런 말 없이 멀어져가는 벽란도를 바라봤다.
예전에는 벽란도가 상당히 크다고 느꼈는데 점차 배가 멀어지자 이상하게도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크지 않다는 느낌이 살짝 들었다.
그들을 배웅하는 이는 이제 사라졌고 유일하게 배웅을 하고 있는 것은 갈매기밖에 없었다.
배를 따라오며 날개짓을 하는 새를 바라보던 이인임은 이번 여정에 대해서 물었다.
“그대가 온 마두라이 술탄국까지 대략 어느 정도 걸릴 것 같소?”
“제가 올 때는 대략 넉 달 정도 걸렸습니다.”
“그렇게 오래 걸린단 말이오?”
“중간에 파도가 거칠어지면 원나라의 항구에서 며칠씩 정박한 후에 출발해서 그럽니다. 바람만 잘 불어 준다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 번에 갈 수는 없는 거요?”
이인임은 하루라도 일찍 도착하고 싶었다.
벽란도에서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벌써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탄야는 배에 실은 물건이 많아서 불가능하다고 했다.
선창에는 연필은 물론이고 고려를 대표하는 인삼이나 청자 같은 것들이 가득했다.
이번에 그가 귀국을 하면서 배에 실은 것은 하사품 외에도 사절단의 물건까지 실려서 정말 한계까지 꽉꽉 채운 상태였다.
그것은 일종의 카탈로그와 비슷했다.
앞으로 교역할 때 이런 것도 있으니 참고할 수 있도록 보내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식량을 채울 수 있는 공간은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어차피 해안가를 타고 이동할 생각이라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야간 항해는 가급적이면 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밝혔다.
“야간 항해가 그리 위험한가?”
“물론이지요. 구름이 끼면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아 언제 좌초해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먼 바다로 나가서 이동하면 되지 않는가.”
“아마 한 시진도 안 되어서 후회하실 겁니다.”
탄야는 먼바다의 파도에 대해 이야기했다.
집채만 한 파도가 친다는 말에 이인임은 말도 안 된다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렇게 큰 파도는 도무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탄야는 굳이 자신의 말이 맞다고 여기서 말다툼을 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항해 중에 한 번쯤은 겪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가 고려에 갈 때도 배가 뒤집힐 것 같은 위기 상황이 몇 번이나 있었다.
“그나저나 전하께서 연속으로 발사되는 쇠뇌를 이십 개나 주실 줄을 몰랐습니다. 덕분에 술탄을 설득하기 조금 더 수월해질 것 같습니다.”
“물론이오. 이미 그대도 우리 고려의 쇠뇌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보지 않았소.”
“그렇게 빨리 화살을 쏠 수 있는 쇠뇌는 처음 보았습니다.”
탄야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이미 그는 고려의 쇠뇌가 어느 수준인지 두 눈으로 보고 직접 그걸 쏴보기도 했다.
지금까지 활을 쏴본 적도 없는 그가 쏘았는데도 생각보다 정확도가 상당히 좋은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그를 홀리게 만든 것은 열 발의 화살이 연속으로 발사된다는 것이었다.
전갑이라 불리는 상자에 담긴 화살이 쉴 틈 없이 쏘아지는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했다.
“수노기라고 부른다고 하였지요?”
“그렇소이다. 최근에 개발한 쇠뇌인데 그대가 우리 고려의 혈통을 가지고 있기에 특별히 이번 거래를 허락해주신 거외다.”
이인임은 꽤 생색을 내고 있었다.
당연히 이인임도 수노기는 처음 보았다.
그렇게 연속으로 발사되는 쇠뇌는 상상도 못 해본 그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수노기가 개발된 것은 조선 시대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똑같은 형태는 아니었다.
크기는 두 가지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조선 시대의 것과 흡사했고 또 다른 하나는 중형 수노기였다.
중형 수노기는 한 손으로 당길 수 없었다.
크기가 큰 탓에 발로 중형 수노기의 활대를 성벽에 고정하고 두 손으로 힘껏 당겨야 했다.
조정을 연습하는 로잉머신과 흡사하달까.
그러려면 필연적으로 따라서 만들어야 하는 것이 깔고 앉을 바퀴 달린 나무판이었다.
보기에는 조금 이상해 보일지 몰라도 서서 당기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편했다.
이미 여러 실험을 거쳐서 내린 결론이었다.
당연히 위력은 원형보다 훨씬 강했다.
단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반 수노기는 위력이 쇠뇌보다는 떨어진다.
그리고 중형 수노기는 들고 쏘는 게 아니라 조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성벽 위에서 수성을 할 때에는 그런 단점은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전하께 약속한 거래는 제가 목숨을 걸고 성사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탄야도 이번 일에 목숨을 걸었다.
안 그러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 전하와 가졌던 만남에서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이 제법 많이 있었다. 그건 바로 마두라이 술탄의 출생과 성정에 대한 것이었다.
현재의 나지르 술탄은 쿠트브가 집권한 지 40일 만에 암살을 한 기야스 우딘 샤의 조카이다.
술탄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도 같은 일을 당하지 말라는 법이 없었기에 아무도 믿지 않았다.
왕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도 서슴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수많은 귀족과 장교가 그가 펼쳐 놓은 덫에 걸려 죽어 나갔다.
궁궐 안은 언제나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만약에 나지르 술탄이 되기 전인 마흐무드 담가니였던 시절에 그와 맺었던 친분마저 없었으면 자신도 어떤 일을 당했을지도 몰랐다.
그때 선창에서 이번 사절단의 호위를 맡은 정휘가 올라와서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잠시 시간 되십니까.”
정휘가 다가와서 잠시 눈치를 보자.
탄야는 자기 때문인 걸 깨닫고 자리를 비켜줬다.
갑판 위에 있는 다른 선원에게 향하는 그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정휘는 이인임 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낮은 목소리로 보고를 했다.
“지시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누구한테도 들키면 아니되오.”
“물론이옵니다. 짐 속에 숨겨온 무기는 은밀하게 선창 곳곳에 숨겨 놓았습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이번에 배에 태운 장인부터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것이오.”
“잊지 않고 유념하겠습니다.”
이인임이 걱정하는 것은 탄야의 변심이었다.
배에는 사절단을 호위하기 위해서 정휘 외에도 홀치에서 차출한 무사 십여 명과 초석을 정제할 장인도 함께하고 있었다. 만약에 탄야가 장인을 빼돌리려 한다면 가장 먼저 장인을 죽여야 했다.
장인은 다시 교육시키면 되지만, 유출된 기술은 다시 돌이키기 어렵다.
“탄야 외에도 고려 말을 할 수 있는 자가 있을지 모르니 항시 언행을 조심···”
이인임은 주의를 주다가 말을 멈췄다.
그러더니 갑자기 입을 틀어막으며 헛구역질을 했다. 그 모습을 본 정휘는 문득 든 생각에 사색이 되어 이인임을 부축했다.
“혹시 벽란도에서 떠나기 전에 먹은 식사에 누가 독이라도 탄 것이 아닙니까?”
정휘는 온갖 추측을 하며 안절부절 못했다.
하지만 정작 이인임은 그런 그에게 가만히 있으라며 손짓하더니 곧장 선미 쪽으로 달렸다.
갑자기 뛰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정휘는 이내 들리는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듣고 무슨 상황인지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걸 들으니 덩달아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는 꿋꿋하게 버텼다.
이인임의 곁에서 추한 꼴을 보이긴 싫었다.
이번에 여정에 나서며 그는 평소 존경하던 이방실 장군에게 은밀한 지시를 한 가지 받았다.
그건 바로 이인임을 감시하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모셔온 장군의 성정을 보면 이 명령은 더 높은 곳에서 내려온 것이 아닐까 여겨졌다.
그게 누굴 의미하는 건지 뻔했다.
당연히 의욕이 불타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 건지 이인임은 여전히 구역질을 하고 있었고 그건 이번 여정이 쉽지는 않을 거라는 증표이기도 했다.
“우웨에엑!”
* * *
1353년 계사년 (공민왕 2년) 정월.
이인임이 떠나고 두 달은 금방 지나갔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즉위 원년이었던 지난해는 정말 정신이 없이 지나간 것 같았다.
역사대로 진행된 것도 많았지만,
바로잡거나 새로 시도한 것도 꽤 많았다.
일단 가장 큰 변화가 상업 주도적인 성장의 발판을 조금이나마 마련했다는 것이다.
현재 가장 힘이 되어주는 것은 의외로 원나라에서 데리고 온 유민이었다.
고려에 수백만 명의 백성이 내 아래 있지만,
정작 내가 직접 움직일 수 있는 이는 적었다.
정치를 하는 이들이 내 손발이 되어서 삽과 곡괭이 그리고 지게를 지는 것도 아니었다.
동오가 두 차례에 걸쳐서 데리고 온 수백 명의 유민은 나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언제든 사용이 가능한 노동력이기도 했다.
비록 10년이란 기간에 묶여 있지만,
그들에게 노비 대우를 하고 있지는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양인과 노비의 중간 정도였다.
하루에 일과는 대부분 고정되어 있었고 과다하지 않은 수준의 작업량만 채우면 됐다.
매질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유민의 대부분은 만족하고 있을 정도였다.
원나라에서 짐승처럼 죽어갈 위기에서 구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현재 광산에서 일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모두가 노역에 동원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 중에 일부는 감찰사에 소속되어 개경을 비롯한 전국에서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일종의 비밀 조직이 생긴 것이었다.
감찰 어사까지 포함해도 수십 명에 불과했으나 그들이 운용하는 정보원까지 모두 합치면 적은 수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수준의 규모였다.
정보원의 직업은 상당히 다양했다.
거리를 배회하는 거지도 있었고 시전에서 주점을 운영하는 주모 중에도 정보원이 있었다.
심지어 전국을 돌아다니는 우인(優人)과 상인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였다.
일을 해준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이다.
그것만 보장된다면 그들은 뭐든 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모은 정보는 많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감찰 대부 이인복은 그렇게 수집한 정보를 정리하고 해석해서 보고서 형식으로 만들었다.
열흘에 한 번씩은 그렇게 작성된 것을 가지고 와서 내게 보고 했는데 그가 내미는 한 뭉치의 두루마리를 보자 두통부터 밀려왔다.
“지금은 바쁘니 거기 놓고 가보시오.”
나는 손을 저으며 그를 내보내려고 했다.
요즘에 내가 받아 보는 보고서는 적지 않았다.
지난해부터 감찰사는 물론이고 전법사와 개성부 그리고 선군도관의 판결송사를 5일에 한 번씩 받아서 검토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에 내수사와 훈련도감 등을 직간접적으로 관리하고 있기에 신경 써야 할 일도 많았다.
도저히 그가 가지고 온 것까지 볼 엄두가 안 났는데 이인복은 나가지 않고 서 있었다.
“과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으시오?”
“이것들은 나중에 보셔도 괜찮으나, 전하께서 꼭 확인하여야 할 것이 있사옵니다.”
“그게 뭐요?”
내가 손에 쥐고 있던 전법사의 판결 송사를 내려놓자 그는 앞으로 다가와서 곱게 접은 쪽지를 내 앞에 내려놓고 물러났다.
뭔가 싶어서 그걸 펼쳐보았는데 천천히 읽어내려가던 나는 분기탱천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들이! 감히 나라의 돈을 떼어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