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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34화 (34/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34

고려의 피가 흐르는 천축국 출신이라···

혹시 어느 땡중이 사고를 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부터 가장 먼저 든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현재로서는 그게 가장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이 시절의 고려에서 천축국에 다녀오는 이들은 거의 스님들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머릿속에 온갖 막장 드라마가 펼쳐졌다.

그러나 탄야가 밝힌 출신은 예상 밖이었다.

내 예상과 달리 그는 충렬왕 시대에 처음으로 고려사에 등장했던 마팔국(馬八國) 왕족의 후손이었기 때문이었다.

인도에 있었던 걸로 알려진 아주 작은 나라여서 역사에는 그리 많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의 핏줄인지 알 것 같았다.

“혹시 평강 채씨의 후손이오?”

내 질문에 탄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니 역시 내 예상이 맞는 것 같았다.

수십 년 전에 도첨의중찬이었던 채인규는 자신의 딸을 원나라 승상 셍게에게 시집 보냈다.

하지만 셍게가 숙청을 당하자 원나라에서는 그녀를 마팔국의 왕자 패합리에게 재가시켰다.

그 여인의 후손이 바로 탄야였다.

“그분이 저의 조모이십니다.”

“생각보다 고려의 말이 능숙하오.”

“어린 시절부터 조모님에게 말을 배운 덕분에 이렇게 사절단을 이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인이 궁금한 것이 있는데, 어찌 다시 마팔국으로 돌아간 것인가?”

내가 알기로 그의 조부는 왕권에서 밀렸다.

당연히 후손인 탄야도 원나라에서 살고 있어야 정상이라 생각되었다. 그 질문에 탄야는 지금 몸담고 있는 곳은 예전의 마팔국이 아니라 했다.

그건 나도 전혀 모르던 사실이었다.

“운이 좋게 20년 전에 새롭게 건국된 마두라이 술탄과 인연이 생겨서 현재는 그곳에 몸담고 있사옵니다.”

두 나라 모두 정식 명칭은 마바르이지만,

완전히 다른 나라인 것을 내게 설명해줬다.

그 이야기를 듣자 호기심이 생겨서 계속 듣고 싶었으나 이야기를 나눌 상황은 아니었다.

탄야의 뒤로 다른 나라에서 먼 길을 온 상단과 사절단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세워 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손을 들어서 그의 말을 끊자 탄야는 상당히 당황했는데 그런 그에게 걱정 말라며 웃어줬다.

“그대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 같소. 내일 따로 과인이 시간을 낼 테니 그때 다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어떠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내 제안에 탄야는 고개를 조아렸다.

독대할 수 있는 것은 굉장한 특혜였다.

그는 자신이 가져온 토산물을 내려놓은 후에 내가 하사하는 물건을 받아서 물러났다.

*

대회일을 마치고 다음 날.

나는 탄야를 다시 궁궐로 불러들였다.

원래 이날은 휴일이라 궁은 꽤 한산했다.

다들 피곤을 풀기 위해서 쉬고 있었지만, 나를 비롯해서 신소봉 등은 쉴 수조차 없었다.

이제는 휴일 없이 일하는 나에게 어느 정도 적응해서 특별한 일이 없으면 쉰다는 생각조차 못하는 이들이었다.

신소봉과 함께 들어온 탄야는 작은 상자를 하나 쥐고 있었는데 그걸 내게 바쳤다. 처음에는 보석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외의 물건이었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이옵니다.”

“아니 이렇게 귀한 거를 어떻게 구했소?”

“우연한 기회에 술탄에게 들어온 것인데 고려는 예로부터 불교 국가이니 특별히 내주셨습니다.”

“과인이 크게 기뻐하였다고 그대의 술탄에게 꼭 전해주시오.”

진신사리는 다섯 립(粒)에 불과했지만,

그 가치가 작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탄야가 온 마두라이에서는 크게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인도는 의외로 불교보다 힌두교와 무슬림이 양분하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나는 그가 몸담고 있는 마두라이가 어느 종교에 속한 것인지 궁금했다.

내 질문에 탄야는 그런 거를 어떻게 아냐며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설명을 해줬다.

“마두라이 술탄은 이슬람을 믿고 힌두교를 배척하는 나라이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이슬람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고려에도 상당히 많은 회회인이 있고 그들이 기도를 올리는 사원인 예궁(禮宮)도 개경과 벽란도 주변에 마련되어 있소.”

“이렇게 먼 곳에서도 알라께 기도를 올리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술탄께서 아시면 크게 기뻐하실 것 같사옵니다.”

탄야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조모에게 고려에 대해서 많이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와보는 것은 처음이라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무슬림 집성촌과 사원까지 있다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안 그래도 주변국과 종교 때문에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적어도 이곳에선 그들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

나는 그쯤에서 어제 그가 바친 토산물 중에 가장 관심이 가는 후추로 이야기를 돌렸다.

“호초(胡椒, 후추)를 생각보다 많이 가져오셨던데 요즘 작황은 괜찮은 편이요?”

“호초는 마두라이 술탄을 비롯하여 천축국 어디서든 잘 자라기에 부족함은 없사옵니다.”

“그러면 그걸 교역하기 위해서 온 것이오?”

과거에 마팔국이 사절단을 보내긴 했지만,

워낙 멀리 떨어진 곳이다 보니 서로 친하게 지내자는 그런 말은 크게 의미가 없었다.

서로 군대를 보내주는 동맹국도 불가능하기에 대부분의 목적은 물건을 사고파는 것이다.

당연히 그도 교역을 위해 온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나의 예측은 빗나갔다.

“전하께서 원하시면 호초를 배에 가득 실어 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바라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평강 채씨 가문을 마두라이 술탄으로 데려가려고 하는 것이오?”

“제가 바라는 것은 피로 맺어진 친인척이 아니옵니다.”

그럼 누굴 말하는 거냐고 묻자.

탄야는 그전에 설명할 게 있다고 했다.

자신이 온 인도의 상황에 대해 말하고 싶다기에 나는 흔쾌히 허락을 해줬다. 이 무렵의 인도는 어떻게 흘러가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탄야는 약간 어눌한 고려의 말로 그가 온 마두라이 술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줬다.

약 17년 정도 전까지.

타밀 지역은 델리 술탄국에 속해 있었다.

인도 동부와 남부에 강력한 그들의 영향력이 약해질 무렵에 토후인 자랄 우딘이 마두라이 지역에 마드라이 술탄국을 세운 것이 시초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오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건국에 앞장선 자랄 우딘은 4년 후에 귀족에게 암살당했고 알라우딘 샤 1세는 힌두교도와 싸우다가 사망해서 지금까지 죽은 술탄만 네 명이다.

‘저쪽도 고려 못지않은 상태구나.’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현재 술탄은 5대 왕인 나지르 우딘 샤인데 자신은 그의 명을 받아서 온 것이라 밝혔다.

대충 거기까지 들으니 점점 더 탄야가 왜 고려까지 온 건지 궁금해졌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라고 눈치를 주자 탄야는 멀리 떨어진 고려까지 온 이유를 밝혔다.

“전하께서 허락해주시면 쇠뇌를 만드는 방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들에게 귀족과 같은 여생을 보낼 수 있게 약조하겠사옵니다.”

“쇠뇌 장인을 내어달라 이건가?”

“술탄을 대신하여 간절하게 부탁드립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왜 하필 쇠뇌란 말인가.”

차라리 화포를 원했다면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고려가 아니라 원나라를 찾아가는 것이 더 빠르겠지만, 쇠뇌는 우리도 예전의 성능을 되찾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중이다.

그걸 묻자 탄야는 자신의 조모에게서 고려의 쇠뇌에 대해 들었다고 했다.

“어린 시절부터 소인에게 고려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인상적인 것이 있었사옵니다.”

“무엇이 그리 인상적이었소?”

“누구도 막을 수 없던 원나라의 군대를 수십 년 동안이나 막아낸 저력에는 쇠뇌가 한몫을 했다고 생각되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들이 터를 잡은 곳에서는 전통적으로 궁시를 다루는 것이 서툴다고 했다.

대부분의 전사가 근접전을 선호하는 탓이었다.

그래서 긴 시간 수련을 하지 않아도 사용을 할 수 있는 쇠뇌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조모께서 국뽕이 심했던 것 같았다.

아주 좋게 성능을 포장하더라도 쇠뇌가 그 정도로 대단한 무기라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탄야의 착각을 깨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마침 쇠뇌를 복원하기 위해서 모인 장인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기존에는 없었던 새로운 신형 쇠뇌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보다 무기가 필요한 이유가 궁금했다.

내가 그걸 묻자 탄야는 잠시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현재 상황을 털어놓았다.

“현재 마두라이는 풍전등화 상태입니다.”

북쪽에는 전통적인 강자인 델리 술탄이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비자야나가르 제국이 빠르게 팽창하고 몇 해 전에는 바흐만 샤라가 세운 바흐마니 왕국을 비롯해 이십여 개가 넘는 크고 작은 나라가 생겼다고 알려주었다.

문제는 각자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것이다.

마두라이 술탄은 이슬람 수니파였고 바흐마니 술탄은 같은 이슬람이나 시아파였다.

반면에 비자야나가르 제국은 힌두교를 믿는 나라이니 갈등이 안 생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났다.

덕분에 평화로운 날이 드물 정도였다.

그 이야기를 하며 탄야는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 가장 약한 곳이 자신이 소속된 마두라이 술탄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주변에 이십여 개의 아주 작은 왕국까지 난립한 상태라 무척 복잡한 상태였다.

“마치 춘추전국시대를 보는 것 같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에 각지의 제후국이 들고 일어나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말하는 것이오.”

“맞습니다. 그와 비슷하옵니다.”

그나마 이건 좋게 표현한 것이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개판 오 분 전이었다.

내가 인도의 역사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한 것은 마두라이 술탄국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 전에 그가 언급했던 곳 중에 비자야나가르 제국이 인도 남부를 평정했다는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역사를 바꿀 경우.

앞으로 인도는 어떤 변화를 겪을지 궁금했다.

중국 못지않게 저력이 있는 나라가 인도이기에 동맹국으로 둬서 나쁠 것은 없었다.

문제는 탄야의 술탄인 나지르 우딘 샤를 믿을 수 있냐는 것이다. 수십 년 이내에 마두라이가 망하니 아마 술탄이 무능할 가능성이 높았다.

‘차라리 탄야가 술탄이 되면 어떨까.’

아주 작은 가능성이지만,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엄연히 마팔국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마두라이에서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술탄의 신임이 있으니 사절단을 맡은 것이 아닐까.

이렇게 먼 고려까지 직접 올 정도면 용기도 제법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쉽게 볼 문제는 아니기에 대뜸 탄야에게 반역을 하라고 권유할 수도 지원을 해줄 방법도 없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알겠으나 그대의 말만 믿고 우리 백성을 내어줄 수는 없소.”

“어떻게 하면 저를 믿어주시겠습니까?”

“신뢰는 단숨에 쌓이는 것이 아니오.”

우리쪽에서 먼저 사람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들을 데려간 후에 그냥 입을 닦아 버리면 따질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내가 그걸 지적하자 탄야도 그 문제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희 쪽에서 먼저 성의를 보이겠사옵니다.”

“무엇을 내놓을 생각인지 말해보시오.”

“전하께서 원하시는 거라면 뭐든 내어 드릴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뭔지 예상이나 할까.

어쩌면 후추를 선택할 거로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그쪽에 관심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인간은 적응이 무척 빠른 동물이다.

유럽에서는 후추는 검은 황금이라 부르는 향신료이나 1년 동안 고려에서 살아보니 요리할 때 후추가 없어도 큰 문제는 없었다.

내 미각이 조금 둔한 덕분이기도 했다.

오히려 고추장 같은 매운 게 필요했다.

훗날 어느 경로로 유입이 되었는지는 여러 가설이 있으나 아직 이 시대에는 고추가 없었다.

어쨌든 내가 후추라는 아주 쉬운 답을 고르지 않고 뜸을 들이고 있자 탄야는 조바심을 냈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가 팔관회에 나타났을 때부터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지금 그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마두라이 술탄에서 내게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것은 후추도 아니고 휘황찬란한 보석도 아니고 그렇다고 진귀한 토산물도 아니었다.

당장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초석을 정제하여 가져다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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