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33
고용보는 그날로 세상에서 지워졌다.
역사에는 사망일 미상으로 처리될 것이다.
그의 죽음을 직접 본 이들은 고작 서너 명에 불과했는데 시신을 묻은 곳은 비밀이었다.
아무도 찾지 못할 곳에 묻었다는 것만 들었다.
굳이 그걸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고려는 물론이고 원나라에서 권세를 얻었던 이의 최후치고는 무척이나 초라했다.
하지만 이 소식이 알려진다고 하더라도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는 이는 없을 것이다.
‘사람이 그따위로 살면 안 되지.’
아직 나이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훌륭한 인생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
고용보처럼 권력욕과 탐욕에 흠뻑 빠져있던 이의 최후가 좋지 않다는 것은 역사 속에서 무수히 많은 이들이 교훈을 주고 있었다.
비슷한 이유로 관직에서 쫓겨난 이들은 매월 생기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최근에는 공석인 관직이 생각보다 많이 발생하고 있었다.
대충 2할 정도는 비워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자리는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
내가 작은 정부를 추구하고 있어서 적당한 이가 없으면 계속 비워 놓고 있는 상태였다.
당연히 업무량이 대폭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평소처럼 새벽에 얼굴도장만 찍고 각자의 관청에 가서 여유있게 일할 수 없는 여건이었다.
그런 탓인지 관리들은 얼굴만 맞대면 서로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사람이 어찌 일만 할 수 있단 말인가.”
“얼마 전에 밀직사의 관원 하나가 실신해서 실려 나갔다는 소식 못 들었나.”
“그거는 차라리 약과네. 요즘 전하께서 재정에 관심이 지대하신 탓에 우리 판도사에서는 달이 중천에 뜬 후에야 퇴청하고 있네.”
“이러다 말라 죽을 것 같습니다.”
궁궐에서 떠도는 소문은 내게도 들렸다.
심지어 나는 관청마다 불철주야(不撤晝夜) 같은 현판을 하나씩 써줘서 잘 보이는 곳에 걸어뒀다.
야근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의미였다.
내가 악덕 고용주를 꿈꾸는 게 아니라 나라에서 녹봉을 받는 만큼은 일을 하라는 의미였다.
양민들처럼 무임금으로 노역에 차출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이미 큰 혜택을 받고 있었다.
그 대신에 녹봉만큼은 반드시 챙겨줬다.
이 시대는 조선과 달리 녹봉이 무척 많았는데 가장 많이 받는 이는 1년에 400섬을 받고 있다.
내가 원래 살던 시대의 쌀값으로 환산하면 거의 억대 연봉을 받는 것인데 거기에 전시과를 통해서 수확의 1할을 거두는 수조권까지 있다.
그것도 평생 유지되는 혜택이었다.
일종의 연금이나 마찬가지인데 문제는 재상과 재추를 빈번하게 갈아치운다는 것에 있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그것 역시 고려를 파탄 내고 있는 이유 중에 하나라 볼 수 있었다.
반면에 말단 관직은 고작 10섬에 불과해 평균적인 농가 소득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당연히 나는 아래부터 챙겨줬다.
실제로 가장 많은 일을 하는 이들은 8, 9품의 관리인데 전체의 7할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에게 생긴 변화는 그리 크지는 않았다.
어차피 크게 해 먹고 탈이 난 이들은 대부분 고위 관직에 있는 이들이었고 그들의 업무가 아래까지 내려가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래도 올해 정도의 수준이면 양호하지.’
반역자들의 가산을 압류하고,
탐관오리에게 벌금을 강하게 때리고,
연필과 동오의 교역으로 인한 수입 덕분이다.
하지만 내년에도 이 정도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익을 대로 익은 과실은 모두 따먹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최근에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감찰사의 서슬 퍼런 눈을 의식해서 크게 해 먹는 간이 부은 관리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지방에서 벌어지는 생활 밀착형 범죄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 덕분에 한동안 치르지 못하고 있는 중동팔관회를 올해는 꽤 성대하게 열 수 있었다.
가능하면 낭비는 하고 싶지는 않지만,
올해 들어 개경에서 흘린 피가 무척 많았다.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팔관회를 진행해야 하는데 이 시대의 고려는 원나라부터 회회인까지 출신이 다양한 편이다.
이런 행사를 통해서라도 단합을 하고 고려에 대한 소속감과 결속력을 다질 필요가 있었다.
더구나 이 행사를 통해서 원나라 외에 다른 국가와 거래를 뚫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준비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고려 최고의 행사답게 비용도 상당했다.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서 관직 중에 팔관보(八關寶)라는 조직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일종의 조직 위원회 같은 곳이었는데 행사를 위해 양민에게 공출 부담을 주거나 비용을 전가하는 문제가 있어서 이번에는 절대 금했다.
괜히 그런 일로 욕먹긴 싫었다.
그리고 곧 11월 14일이 되었다.
중동팔관회의 첫째 날은 소회일이라 하여 대부분의 행사는 나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내전에서 의봉문까지 행차하는 난가출궁(鑾駕出宮)까지는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었다.
잠시 걷는 것 외에 태조의 초상화 앞에서 술을 올리고 배례하는 것이 전부였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구정에 도열한 군신에게 인사를 받고 술을 따라주며 하사(賀詞)를 하는 것도 내 몫이다.
워낙 수가 많으니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약간의 편법과 차별을 해야 했는데 평소에 내가 하는 일을 지지하지 않는 인승단 같은 이들은 대부분 10초 컷을 당했다.
그럴만한 가치를 못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을 모두 거친 후.
궁성에서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되었다.
이날 만큼은 구정이 개방되어 일반 백성도 궁성 안으로 들어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공연을 볼 수 있었는데 그 종류도 무척이나 다양했다.
하지만 정작 나는 그 자리를 즐기지 못했다.
내 머릿속에는 내일 맞이할 각국의 사절단과 상인을 맞이하는 것으로 가득했다.
“내일 팔관회에 참석할 상인과 사절단이 얼마나 되는 것 같소?”
평소와 달리 시끌벅적한 궁궐의 연회 소리를 피해서 후원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정자를 찾은 나는 뒤따라오던 곽충수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대답했다.
“생각보다 그리 많은 편은 아닙니다. 지난해를 비롯해서 최근에 중동팔관회가 열리지 않아서 그런지 매년 줄어드는 추세였습니다.”
“흐음··· 그건 생각지 못했구려.”
곽충수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이 시대는 이동하는 속도가 느리다.
일단 다른 나라로 간다는 것은 최소 한 달에서 몇 달 정도는 잡아야 하는 시대였다.
심지어 대식국처럼 아라비아에서 오는 이들은 길게는 1년 정도를 잡고 올 정도였다.
그렇게 긴 시간을 투자해서 왔는데 팔관회가 취소되고 고려의 왕조차 알현하지 못한 채 돌아가면 다시 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어쩔 수 없었다.
원나라에서 즉위한 것이 10월이고 고려에 도달했을 때는 거의 연말 무렵이었다.
임금이 없는 와중에 팔관회를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적어도 올해 온 이들에게는 고려에 다시 와야 하는 이유를 반드시 각인시켜놓고 싶었다.
다시 불러 모으는 방법은 간단했다.
고려에 오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 상인들 사이에 퍼지면 저절로 모이게 되어 있다.
오지 말라고 해도 달려들 사람들이었다.
그러려면 먼저 이뤄야 하는 조건이 있었다.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없으며 돈이 될만한 물건을 공급하는 것이 우선이다. 당연히 올해 중점적으로 선보일 제품은 연필이었다.
하지만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과인이 내릴 하사품은 준비가 끝났소?”
“차질 없이 준비 중이옵니다.”
“단순하게 그걸 주는 거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고려의 물건을 그들에게 얼마나 많이 파느냐가 가장 중요한 일이오.”
“명심하겠사옵니다.”
곽충수에게 주의를 준 뒤.
정자에 깔아 놓은 물품을 살폈다.
하사품으로 들어가는 물건을 최종 확인을 하기 위해서였는데 그 종류는 상당히 다양했다.
나전세공품은 물론이고 고려지와 청자 그리고 먹과 붓을 비롯해서 다른 나라보다 조금이라도 뛰어난 것은 모아서 선물 세트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모든 물건에는 ‘고려’라는 낙인이 작게 찍혀 있었다.
Made in Korea의 고려 버전이랄까.
우리가 파는 것이 어느 나라에 가더라도 그게 고려의 물건이라는 증거를 남겨 놓고 싶었다.
특히 왜국은 더 큼지막하게 찍어 놨다.
칠지도도 자신들의 역사이며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로 내세우는 인간들이라 시간이 흘러 후세들이 또 어떤 농간을 부릴지 모를 일이다.
마음 같아서는 주덕유를 보내 모조리 회수해 오고 싶었으나 그가 이끄는 함대는 서른 척도 안 되는 수준이라 아직은 불가능했다.
그만큼 지출도 상당히 컸다.
하지만 그리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내가 주는 것만큼 그들이 가져오는 토산물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먼 곳에서 오는 물건은 고려에서 상당히 귀하게 여기는 것들이 많았다.
그걸 권문세족에게 가능하면 비싸게 팔아치울 생각이었다.
“경매는 잘 준비되고 있는가?”
“개경에서 가장 부유하다고 알려진 이들에게 초대장은 모두 보냈습니다.”
“경매 방식은 모두 숙달되었소?”
“지난번에 주점에서 일을 봐주었던 우인(優人)이 맡을 예정인데 내수사 관리들과 함께 하루에도 몇 번씩 예행(豫行)하고 있사옵니다.”
경매는 내가 내놓은 기책(奇策)이였다.
체면을 중시하는 이들이라 직접 오진 않겠지만, 그래도 사람을 보내서 원하는 것은 얻을 것이다.
그 문제는 일단 곽충수에게 맡겼다.
요즘에는 설명을 하지 않아도 내가 뭘 의도하고 있는지는 대충 알아들었다. 아마도 동오와 심부 같은 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은 탓에 상재(商才)에 대해서 깨달은 게 있는 것 같았다.
“통역을 할 이들은 어찌 되었는가?”
“통문관(通文館)의 관리와 개경에 거주하는 우리 말에 능숙한 회회인과 왜인을 추려서 팔관회에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말이란 쉽게 옮길 수 없고 혹시 실수가 있을지 모르니 적어도 통역을 하는 이들은 두 명 이상을 대동하여 만나시오.”
그 밖에도 주의를 줄 것이 너무 많았다.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 잔소리가 너무 심하다는 것을 느낄 정도였는데 생각보다 곽충수는 이미 적응을 마쳤는지 잘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말을 멈추고 잠시 아무런 말도 없이 바라보자 그는 기회다 싶었는지 재빨리 대답부터 했다.
“전하의 의중대로 처리하겠습니다.”
*
팔관회의 둘째 날인 대회일이 되자.
멀리서 찾아온 이들의 조하의식이 열렸다.
차례대로 자신의 나라에서 가져온 진귀한 물건을 내놓았는데 의복과 언어 그리고 예절까지 큰 차이가 있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들은 토산품을 바친 후에 받은 엄청난 양의 하사품에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에 비해 두세 배는 넘는 규모였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분명히 있었다.
어제 곽충수가 예상했던 것처럼 올해 팔관회를 찾아온 상단과 사절단의 수가 생각보다 적었다.
일단 왜국과 원나라 상인의 수가 가장 많았고 유구(오키나와)에서 온 사절단도 있었다.
하지만 교지국(베트남)과 섬라곡국(태국)은 물론이고 가장 기대가 컸던 대식국은 없었다.
아무래도 붓을 쓰는 아시아 지역보다.
펜에 더 익숙한 아라비아 쪽이 연필을 판매하기 더 쉬울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마지막 방문이 수십 년 전인 것을 생각하면 올해 올 거라 기대하는 것도 조금 우스웠다.
그래도 예상외의 방문이 있기는 했다.
무려 천축국에서 사절단을 보내온 것이었다.
곽충수에게 물어보니 거의 십여년 만에 온 것이라고 했다. 불교로 맺어진 인연 때문에 그들의 나라가 낯설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 시선을 이끄는 것은 사절단을 이끌고 온 이였다.
외모가 상당히 묘한 느낌이었다.
얼핏 보면 인도 사람 같아 보였지만,
자세히 눈코입을 뜯어 보면 고려 사람 같았다.
상당히 묘한 느낌이었는데 턱수염 때문에 조금 헷갈렸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아직 이십 대 중후반 정도의 나이에 불과해 보였다.
사절단을 이끌 나이는 확실히 아니었다.
‘둘 중의 하나겠지.’
상당히 고귀한 신분이거나.
그걸 뛰어넘는 엄청난 실력자이거나.
왠지 그의 정체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 청년의 신분은 몰락한 왕가의 후손이라고 밝혔는데 정작 놀라운 것은 그의 입을 통해서 나온 서툰 고려의 말이었다.
“저에게도 고려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