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32
서달의 첫인상은 주덕유와 흡사했다.
하지만 신체적인 특징은 조금 다른 편이었다.
덩치가 좋고 인상이 험악한 주덕유와 달리 서달은 키가 더 크고 늠름한 느낌이었다.
주원장이 곽자흥 밑에서 세력을 키울 무렵에 언제나 선두에 섰다던 서달다운 모습이었다.
서달은 주덕유처럼 괄괄한 성격은 아닌지 차분하게 머리부터 조아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내가 범상치 않은 존재이긴 했다.
외모 때문이 아니라 호위로 보이는 무사가 십여 명이나 주변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눈치가 없는 이는 아니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느냐.”
“혹시 소인이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입니까?”
“그런 것 때문이 아니다. 그냥 네가 살던 곳이 지금 어떤지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것이다.”
“제가 말재주가 그리 좋지 못하여 성에 차지 않으실까 우려되옵니다.”
“상관없다.”
나는 일단 그를 데리고 주덕유의 방으로 갔다.
주인이 없는 집에 이렇게 들어가는 것은 무례한 일이었으나 이 모든 것은 내가 내려준 것이었다.
이 시대의 개경 집값은 상당했기에 내수사에서 주덕유에게 임대를 해준 거라고 보면 되었다.
더구나 주덕유의 성격상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서 내가 먼저 앉자 시키지도 않았는데 서달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편하게 앉아도 된다.”
“아닙니다. 저는 이게 더 편합니다.”
“주덕유의 어린 시절 친구라고 들었다.”
“맞습니다. 목동 노릇을 하던 시절에 함께 일을 하였습니다.”
“많이 친했던 모양이구나.”
서달은 그에 대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주덕유가 어려움을 겪었을 무렵에 아무 도움을 줄 수 없었고 못 본 지도 상당히 오래됐다.
과연 자신이 주덕유의 친구라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굳이 그런 부분은 헤집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대부분의 친구가 그렇듯이 다시 만나게 되면 또 느낌이 사뭇 다를 것이 분명했다.
“그대 외에도 다른 친구가 있었을 텐데 혼자 온 것이냐?”
“최근 전국이 혼란스러워서 어린 시절의 친구 대부분이 각지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친우 중에 대부분이 홍건적에 가담한 거로 알고 있다. 너도 백련교도 아니냐?”
“아니옵니다! 저는 그들과 관련이 없습니다.”
내가 백련교를 언급하자.
서달은 펄쩍 뛰며 아니라 부정했다.
얼굴에는 정말 억울한 표정이 가득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백련교는 비밀결사 형태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는데 원나라에서는 역적의 무리로 보기에 잡히면 죽는다고 보면 되었다.
상황이 그러니 내가 여기서 묻는다고 그렇다고 답을 할 리가 없었다.
“주덕유의 친우이니 믿겠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는 정말 아니옵니다.”
“알겠다. 너는 고향에서 무슨 일을 하였느냐?”
“대대로 농사를 지어서 먹고살았습니다.”
“고려에서도 농기구를 잡고 싶으냐?”
내 질문에 서달은 잠시 말을 아꼈다.
자신의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란 걸 아는 걸까.
그는 머리를 조아린 상태로 잠시 있다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열망의 불꽃을 내비쳤다.
여기까지 왔는데 낫을 휘두르며 밑바닥 생활을 다시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니옵니다. 저에게도 기회를 주신다면 덕유처럼 열과 성을 다해서 고려에 충성을 하겠습니다.”
“네가 태어난 나라도 저버리겠다는 것이냐?””
“이미 그럴 각오로 모든 가족을 데리고 배에 올라탄 것이옵니다. 이제부터 제가 충성을 바칠 나라는 원나라가 아닌 이곳 고려입니다.”
서달의 말에는 진심이 묻어났다.
그가 말한 것처럼 혼자 고려에 온 것도 아니다.
설마 서달이 일가친척을 모두 데리고 고려로 향하는 배에 올라탈 거란 생각은 못 했다.
주덕유처럼 자리를 잡으면 다시 그의 가족을 데려오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좋다. 네가 한 그 말은 내가 잊지 않고 있겠다.”
“허온데 누구시온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하하. 그건 비밀이다. 나중에 네 친우인 주덕유에게 물어보면 알 것이다.”
“그리하겠습니다.”
“방금 네가 한 말이 진심이라면, 내일부터 응양군을 이끄는 이방실 장군을 찾아가거라. 하지만 아무리 네가 주덕유의 친우라도 가장 밑바닥인 병사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를 주덕유 밑에 넣을 생각은 없었다.
둘의 관계가 그렇게 굳어버리면 서달의 성장에 방해가 될 것 같았다. 더구나 그들이 뭉쳐있으면 무슨 일을 꾸밀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었다.
아무리 서달이 백련교와 연관된 것이 없다고 맹세를 했어도 아직은 조심해야 했다.
이 무렵의 백련교는 들불 같았다.
강남부터 시작해서 원나라 전체로 너무 빠르게 퍼지고 있었고 심지어 고려의 내부에도 백련교로 의심되는 이들이 꽤 발견되었다.
덕분에 이인복과 감찰사에서 상당히 긴장한 채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뭐든 열심히 하겠습니다.”
서달은 지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가족을 먹여 살리려면 뭐든 해야 했다.
더구나 친우의 주덕유가 이런 커다란 저택에서 사는 것을 직접 보니 자신도 공을 세우면 이런 곳에서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답을 하는 그의 눈빛은 꽤 마음에 들었다.
간절한 자만이 보일 수 있는 눈빛이었는데 그쯤에서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서달을 보기 위해서 왔으니 볼일은 끝났다.
환궁을 하려고 주덕유의 집에서 나서던 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훗날 어느 정도 둘 다 자리를 잡으면 주덕유와 경쟁을 시켜보아도 재미있겠구나.’
*
팔관회를 준비하고 있을 무렵.
주덕유는 이원림의 누이인 이연과 마침내 혼례를 올렸다. 두 사람은 네 살 차이가 났는데 그가 장가가는 날에 크게 잔치가 열렸다.
두 사람의 혼례를 축하하기 위해 찾아간 이들은 대부분 홀치에서 함께 훈련을 받았던 이였다.
평소에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실력도 좋으니 무관 중에 그를 싫어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더구나 현재 주덕유는 변안열과 함께 주상의 총애를 받으며 새롭게 떠오른 신진 무관이었다.
얼굴도장을 찍으려 하는 이들이 꽤 많았다.
그 덕분에 이원림의 본가는 북새통이었다.
고려에서는 남귀여가혼이라 하여 신부의 집에서 혼례를 치르고 처가살이를 해야 했다.
그게 이 시대의 풍습이었고 조선 시대에 친영혼과 달리 여러 날에 걸쳐서 혼례가 진행되는데 보통 셋째 날에 상견례를 치른다.
주덕유는 그런 풍습을 오히려 반겼다.
요즘 김휘남과 새로운 전술을 훈련하느라 집에는 거의 들어오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다.
실제로 전라도와 경상도의 초계를 다녀오느라 개경에 돌아온 것도 거의 두 달 만의 일이었다.
그러니 차라리 부인을 처가에 두는 것이 마음이 편한 것 같았다. 현재 그가 사는 곳은 비워 놓을 수 없기에 마침 원나라에서 온 주덕유의 형과 친척이 당분간 쓰기로 했다.
“늦장가를 들더니 아주 입이 찢어졌습니다.”
신소봉은 자신이 본 걸 소상하게 말해줬다.
내가 직접 주덕유의 혼례에 가지는 못했다.
아직 이 시대의 혼례를 본 적이 없기에 어떻게 진행되는지 상당히 궁금했으나 거기 참석한 대부분의 이들이 나를 알아볼 것이 분명했다.
괜히 나 때문에 혼례가 어수선해질 것이 뻔했고 거기에 더불어 안 그래도 주덕유를 편애한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어서 자제해야 했다.
“그럴 만도 하지. 주덕유의 나이가 적은 것은 아니고 오히려 조금 늦은 편이야.”
“신부도 상당히 고왔는데 주변 사람들 말에 의하면 현명하고 참하다고 합니다.”
“과인이 고르고 골라 마련한 혼처니 당연한 일이 아닌가.”
괜히 생색내기 위해 하는 말은 아니었다.
주원장은 원래 마수영(효자고황후)이란 걸출한 여걸과 연이 닿아 결혼을 하게 된다.
그녀는 곽자흥의 양딸이었는데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는데 아주 큰 공헌을 했다.
내조의 여왕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하지만 곽자흥 아래에 있는 마수영까지 데리고 올 수도 없기에 주덕유를 바른길로 이끌어줄 현명한 여인을 그의 짝으로 맺어줘야 했다.
그런 면에서 이연은 상당히 잘 어울렸다.
이원림의 누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녀는 상당히 명민했는데 남자로 태어났으면 걸출한 문인이 되었을 거라 평가가 있을 정도였다.
더구나 현명하기로 어린 시절부터 유명해서 가진과 함께 따로 만나본 적이 있었는데 그녀도 상당히 이연을 마음에 들어 했다.
“내가 내려준 폐물(幣物)은 만족하던가.”
“물론이옵니다. 그런데 보석보다는 이번에 왕후마마의 공방에서 짠 면포로 만든 옷을 상당히 좋아했습니다.”
“바닷바람이 생각보다 매서울 것이야.”
벌써 날이 많이 차가워졌다.
겨울 바다의 추위는 상상 이상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소량에 불과하지만, 드디어 면포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 남해안 일대에서 시행되었던 목화의 시배(始培)는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고 보면 된다.
커다란 상자에 가득 담아온 씨앗을 심었으나 살아남은 목화 나무는 수백 그루에 불과했다.
대충 1할에서 2할 정도만 살아남았다.
그래도 가능성은 충분히 보았다.
파종 시기와 재배 가능한 지역이 구분됐다.
이걸 토대로 내년에는 살아남은 목화 나무에서 거둔 씨앗을 다시 그 근처에 뿌릴 예정이다.
올해 수확된 목화로 짠 면포는 수십 필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걸 가지고 만들 수 있는 옷은 몇 벌 수준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중에 두 벌이나 주덕유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지난여름부터 짓기 시작한 가진의 공방은 이제 완성되어 면포를 만들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다.
하지만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가서 아예 완성품을 만드는 것까지 시도하는 중이었다.
면포를 만드는 거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걸 가지고 또 다른 가치를 창조해야 했다.
이미 그걸 이뤄내기 위해서 가진의 공방은 분업과 전문화가 서서히 자리 잡고 있었다.
재단과 재봉 그리고 수를 놓는 것부터 옷고름을 바느질하는 것까지 나눠서 하고 있었다.
각자의 역할은 모두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다들 처음에는 꽤 생소해 했지만,
한번 적응하니 생산 속도가 꽤 빨라졌다.
과정이 단순화되니 나올 수 있는 효율이었다.
이미 효과는 연필을 제작하며 검증이 되었다.
주덕유에게 준 옷은 그 과정에서 나온 시제품 가운데 하나였다.
그때 밖에서 내관 하나가 인기척을 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감찰부사 이인복이 밖에서 와있다고 신소봉을 통해 알려주었다.
여전히 지방의 탐관오리를 잡기 위해 어사들과 함께 지방까지 오가며 바쁘게 움직이던 그가 나를 찾아온 것은 상당히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를 안으로 들이라고 하명하자.
잠시 후에 이인복이 김속명과 함께 들어왔다.
두 사람이 내게 인사를 올린 후에 자리하자 나는 곧장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물어봤다.
그러자 이인복은 내가 기다리던 소식을 알려주었다.
“고용보를 해인사에서 추포하였습니다.”
“그게 정말이오? 지금 어디에 있소?”
“개경 밖의 은밀한 곳에 가둬놨습니다.”
“도대체 지금까지 어디에 숨어 있었다고 하오?”
“신분을 완전히 숨기려고 작정한 건지 머리를 깎고 탁발승 행세를 하고 다녔답니다.”
“쯧! 그러니 찾을 수 없었군. 정말 수고가 많으셨소.”
무려 4개월이나 걸린 일이었다.
그간 들인 노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인복은 아예 해인사의 스님 한 명을 매수하고 김속명과 감찰사 소속의 관리 몇 명을 보내 그 인근의 숙소에서 지금까지 계속 감시를 해왔다.
그렇다고 그들이 무작정 고용보만을 기다린 것도 아니고 틈틈이 그 인근의 관리가 저지른 비리를 탐문하고 다닐 정도 꽤 바쁘게 지냈다.
“하명하신 대로 끌고 오기는 했으나 그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옵니까?”
이인복은 내 의중을 물었다.
공개적으로 효수를 할 것인지 아니면 아무도 모르게 묻어 버릴 건지 지시를 기다렸다.
마음 같아서는 고용보의 목을 잘라서 효수하여 나라를 팔아먹은 죄가 어떤 건지 보여주고 싶었다. 만약에 그가 기 황후를 원나라 황실에 들여보내지 않았다면 기씨 집안이 고려에서 횡포를 그렇게 부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조일신의 변은 봉합 단계를 지났기에 다시 그걸 들추고 싶진 않았다.
더구나 그는 기철의 무리에 포함되어 있었기에 어떤 말이 그의 입을 통해서 나올지 몰랐다.
가능하면 조용하게 처리를 해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최유 못지않은 부원배라 불리던 그의 최후를 직접 보고 싶었으나 참기로 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깔끔하게 뒤처리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