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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31화 (31/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31

곽충수를 시켜 두 사람을 부르자.

그들은 얼마 후에 궁궐로 입궁했다.

심부는 평상시의 의복이었으나 동오는 언제 갈아입은 건지 녹색의 관복까지 차려입었다.

어용 상인으로 그를 지목하면서 내수사의 정7품인 승(丞)이란 관직도 주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더 높은 자리에 앉히려고 했지만,

당시에는 조일신 등이 있어서 반대가 많았다.

가장 큰 걸림돌이 그의 신분이었다.

결국에는 일정 관품 이상은 받을 수 없는 한품자(限品者)라는 조건을 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동오는 관직을 받은 것만으로도 상당히 만족했는데 벽란도의 자리 잡은 후에 밑바닥부터 올라온 그에게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관복이 상당히 잘 어울리시오.”

매번 밖에서 만나던 터라.

나도 그가 관복을 입은 것은 처음 보았다.

그러자 동오는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는데 심부도 내 말을 거들었다.

“맞습니다. 고관대작이 따로 없으십니다.”

“흠흠! 이 사람아, 전하도 계시지 않나 작작 놀리시게. 나 같은 자에게 그런 자리는 가당치도 않네.”

동오는 내 눈치를 보며 심부의 말에 반박했다.

마음 같아서는 못 할 것도 없지 않냐며 말을 해주고 싶었으나 괜한 말은 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에 가깝기 때문이다.

고려를 통째로 개혁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신분제만큼은 쉽게 볼 수 없었다.

이번에 연탄을 만들며 느낀 점이 많았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시대에 맞아야 했다.

산에서 직접 구하거나 땔감을 사는 것이 훨씬 더 저렴하기에 사람들은 연탄에 관심을 안 뒀다.

저 멀리 동해에서 힘들게 캐낸 뒤에 가루내어 연탄을 만들고 이곳까지 옮겨야 하는 물건이다.

결코 저렴해질 수 없기에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완전한 실패라 보긴 어려웠다.

광산을 알아보러 다니던 장야서의 사람들은 아예 내수사에서 채방사 역할을 시작했다.

그들은 광산 개발에 경험이 있는 이들과 함께 고려에 숨겨진 광산을 찾아 채산성(採算性)을 확인해서 계속해서 내수사에 알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채광이 시작된 석탄은 기와소 같이 항시 불을 때야 하는 곳에서 활용하고 있으니 아예 성과가 없다고 보긴 어려웠다.

내가 잠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다과와 함께 내온 차는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슬슬 이번 상행의 성과에 대해서 듣고 싶소.”

동오는 그 말을 듣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품에서 이번 상행의 기록을 꺼냈다.

이미 이럴 것이라 알고 준비해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원나라에서 판 것에 대한 것에 대한 내용은 전혀 적혀있지 않았다.

원나라로 향한 물건은 심부와 금액과 수량을 협의한 터라 운송을 해주는 거로 끝이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이번에 데리고 들어온 고려의 유민과 타국 출신의 노예였다.

“생각보다 데리고 온 이들이 꽤 많은 것 같소.”

“나라가 혼란스러우니 노예 상인이 곳곳에서 활개 치고 있습니다.”

“그쪽은 왜구에 의한 피해가 없었습니까?”

“말도 못 할 정도입니다. 불타서 없어진 마을이 한두 곳이 아니고 바다로 나갈 엄두도 못 내는 상단이 허다하옵니다.”

“그대들도 각별히 주의해야 하오.”

한 번 상행을 오갈 때마다.

얻게 되는 수익은 상상 그 이상이다.

하지만 반대로 왜구한테 잘못 걸리면 그걸로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이 원나라와의 상행이다.

물건만 잃는다면 재기의 기회라도 있다.

하지만 목숨까지 잃을지 모르고 간신히 살아남더라도 목숨과 같은 배를 잃으면 재기를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른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었다.

당연히 고려도 그사이 꽤 많이 당했다.

6월과 9월에 각각 전라도와 합포(창원)에 상당히 큰 규모의 왜구가 침입했다.

전라도로 쳐들어온 왜구는 마침 그 주변에 해상 훈련을 하던 김휘남과 주덕유가 있어서 상륙도 하기 전에 바다에서 요격에 성공했다.

하지만 합포는 그 이전에 막을 수 없었다.

해안가 주변에 있던 마을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죽고 모든 가산을 왜구에게 빼앗겼다.

그나마 최영이 소식을 듣고 병사들을 이끌고 달려간 덕분에 야영을 하던 왜구를 새벽녘에 습격하여 그들을 완전히 도륙 내놨다.

최영은 생각보다 대단한 장수였다.

병사도 왜구보다 적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장수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런 병력의 차이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기습의 묘미를 살린 것도 있으나 말에 싣고 다니며 쓰고 있는 소형 화포도 한몫을 했다.

하지만 화포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심부는 여전히 외부인이기 때문이었다.

그와의 관계는 거래에 의해 맺어진 것이다.

아직 심부는 나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맹세나 의지를 보여주진 않고 있었다.

만약에 그가 모든 가족과 재산을 가지고 고려로 와서 의탁한다면 어느 정도 믿음이 갈 것이다.

내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동오는 상당히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날이 갈수록 왜구가 저리 날뛰니 큰일입니다.”

“그래서 상행을 통해서 얻는 재물 중에 일부는 새로운 전선을 조선하는 데 쓸 생각이오.”

“이번에 데리고 온 이들도 모두 그쪽으로 보내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시오.”

심부와 동오는 그 소식을 무척 반겼다.

새롭게 만들어졌다는 해군이라는 곳이 앞으로 전폭적인 투자를 해서 강성해지면 자연스럽게 바닷길도 안전하게 바뀔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쯤에서 심부가 가져간 오천 자루의 연필의 성과가 어떤지 궁금해졌다.

심부는 내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답을 했다.

“당연히 없어서 못 팔 정도였습니다. 상당히 많은 이들이 연필의 편리함에 매혹되었습니다.”

“그렇게 반응이 좋았단 말이오?”

“물론이옵니다.”

“이 사람이 절반 가까이를 돈도 안 받고 관리와 상인들에게 나눠준 탓에 실제로 판매를 한 것은 그리 많지 않사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동오는 보다 못해 자신이 직접 보았던 것을 내게 고했다. 그런 그를 향해 심부는 쓸데없는 말을 한다며 구시렁거렸다.

오히려 나는 그럼 심부의 결단을 칭찬해줬다.

역시 직접 경험해봐야 연필의 편리함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그 효과를 본 것인지 이번에 심부가 원하는 주문은 상당히 컸다.

“이번에는 2만 자루를 가져가고 싶사옵니다. 그중에 천 자루는 황실로 들어간 고급품으로 부탁드립니다.”

“2만 자루? 그걸 다 팔 자신이 있소?”

“물론이옵니다. 그런 확신이 없었다면 그 많은 연필을 공짜로 뿌리진 않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원나라가 워낙 크지 않습니까.”

내수 시장이 크다는 것은 정말 부럽다.

이 무렵의 원나라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전염병 등으로 죽었는데도 고려의 열 배 이상이다.

당연히 판매되는 물건의 양에서 차이도 그만큼 상당히 클 수밖에 없었다. 심부는 2만 자루를 못 팔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물량 확보가 가능할 수 있는지 더 걱정하고 있었다.

내가 연필의 생산량이 어느 정도인지 알려줬기 때문이었는데 그건 예전 이야기였다.

나는 흔쾌히 그의 주문을 받아들였다.

“2만 자루면 열흘 정도만 기다리시오.”

“그렇게 빨리 가능한 겁니까?”

“팔관회가 열리면 각국의 상인이 모일 텐데 그때 선보일 예정이라 미리 만들어 놓은 것들이 제법 많소이다. 2만 자루 정도는 조금만 더 수량을 채우면 내줄 수 있소.”

“연필을 팔관회에서 선보이시다뇨.”

심부는 깜짝 놀라서 나를 바라봤다.

자기한테 독점을 준 게 아니냐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계약을 맺은 적이 없었다.

당시에 그에게 독점을 준 것은 엄연히 원나라를 의미했고 계약서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 외에 동남아 지역에 있는 곳들은 별개였다.

이 부분은 나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 고려는 대식국 등에서 오는 각국의 상인이 필요했다.

원래 역사대로 고립되고 싶진 않았다.

조선은 고려보다 대외 활동이 적었다.

거기에는 왜구 등의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애초에 그럴 의지조차 갖추고 있지 않았다.

남들은 신대륙이다 뭐다 바쁘게 움직일 시기에 유교만 죽어라 파고 있었을 뿐이었다.

향기로운 꽃이 피어야 벌과 나비가 날아오듯 고려에서만 찾을 수 있는 물건이 있어야 했다.

연필은 그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걸 모두 심부에게 맡길 경우.

과연 상인과 사절단 등이 중국을 지나서 더 멀리 떨어진 고려의 벽란도까지 안 올 것이다.

내가 굳이 그걸 설명하지 않아도 심부는 내 의도를 눈치채고 이 문제는 설득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도 인정했다.

어쨌든 자신이 원하는 수량을 생각보다 빨리 얻었다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생산량이 많이 늘었나 봅니다.”

“그대들이 상행을 떠난 후에 연필 생산에 투입된 인원이 몇 배나 늘은 덕분이오.”

“하루 생산량이 얼마나 되옵니까?”

“그건 자네가 해주기에 따라 다르지.”

심부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되물었다.

동오도 비슷한 표정이었는데 나는 그들에게 현재의 상황을 천천히 설명을 해주었다.

일단 사람은 부족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석탄 광산으로 보냈던 이를 다시 불러들여 연필 생산으로 대부분 돌렸다. 그리고 계정골에 있던 장인을 양광도의 진위로 모두 보냈다.

흑연을 굳이 개경 부근까지 옮기지 않고 광산 앞에서 곧장 생산하기 위해서였다.

인력을 대폭 늘리고 원자재를 옮길 필요가 없어지니 당연히 생산량도 늘어났다.

“문제는 송진과 아교 같은 재료가 부족하다는 거요. 고려에서 생산되는 것으로는 대량으로 연필을 만들어내기 어렵소.”

아무리 접착제를 최소한으로 쓰더라도.

사용 중에 갈라져 버리는 일은 줄여야 했다.

더구나 여름이 되니 녹아내려서 연필이 두 조각으로 갈라지는 일이 빈번하게 생겼다.

그래서 요즘에는 쓸 수 없는 비단 조각으로 뒷부분을 감아서 리본처럼 묶는 편법을 쓰는 중인데 장식처럼 보여 반응이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심부는 그 이야기를 듣자 자신 있는 얼굴로 내가 내린 지시를 받아들였다.

“소인이 최대한 많이 가져오겠습니다. 그러니 연필을 사들이는 우선권은 저희 상단에게 할당해주시길 부탁드리옵니다.”

“물론이오. 저들이 와봐야 일 년에 한두 번이 전부일 테니 그리 심려치 마시오.”

내가 살살 구슬리기 시작하자.

심부는 진심으로 부탁한다며 고개를 조아렸다.

역시 거래에 있어서 대체 불가능한 물건을 파는 쪽이 갑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전하만 믿고 있겠습니다.”

*

원나라에서 돌아온 동오를 만난 뒤.

다음날 나는 주덕유의 집으로 향했다.

그곳에 간 이유는 동오가 수소문 끝에 찾아낸 주덕유의 친척이 머물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데리고 온 이들은 주덕유의 큰 형수와 조카 그리고 사촌들이었다. 그런데 그중에는 죽은 줄 알았던 둘째 형인 주중육도 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주덕유가 고려에서 이렇게 성공을 했다는 것에 대해 믿지 못했다.

하지만 주덕유는 그의 집에서 볼 수 없었다.

현재 그는 김휘남의 밑에서 해전에 대한 이론과 실전을 훈련받으면 굵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도 둘째 형과 큰형의 형수님이 왔다는 소식을 보냈으니 며칠 내에는 개경으로 잠시 돌아올 것이다.

어차피 돌아와야 할 시기였다.

주덕유는 얼마 후에 혼례를 치러야 했다.

봄부터 계속해서 적당한 혼처를 찾고 있었는데 원나라 사람인 데다가 출신도 좋은 편은 아니라 생각보다 그 일이 쉽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에 이원림의 어린 누이가 물망에 올랐고 다행히도 주덕유를 받아 들여줬다.

그 과정에서 변안열이 상당히 도움을 줬다.

이원림은 그와 함께 훈련도감에서 자주 얼굴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마다 주덕유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고려로 들어온 두 사람은 생각보다 많이 가까웠다.

변안열과 주덕유는 여섯 살이나 차이가 났으나 이 시대에는 여덟 살 정도는 동급으로 쳤다.

잠시 주덕유의 집을 돌아보면서 직접 불편한 게 없는지 살펴주자 주덕유의 친척은 나를 고려의 관리 중에 하나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나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관심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니었다.

한동안 주덕유의 집을 살피던 중에 나는 대여섯 명이 따로 머물고 있는 사랑채에 눈길이 갔다.

딱 봐도 주덕유의 친척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쪽으로 다가서자 마루에 앉아 있던 이가 다급하게 일어나 허리를 조아렸다.

그 남자의 인상은 무척 강했다.

키도 크고 건장한 체격에 광대뼈가 유독 튀어나와 있는 것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아무래도 내가 찾는 이가 맞는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나는 그의 이름을 물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우리를 보며 조금 경계하는 눈빛을 보였으나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중팔의 어린 시절 동무인 서달이라 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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