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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30화 (30/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30

곽충수가 궁궐에 도착했을 무렵.

동오 상단은 이미 벽란도에 도달했다.

먼저 온 다른 배들은 강화 밖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동오가 이끄는 배는 그런 절차조차 거치지 않았다.

고려의 왕비인 가진이 직접 관리하고 있는 어용상인의 특권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출발했을 때보다 배의 수가 많았다.

동오가 타고 간 배는 네 척이다.

심부의 배까지 합쳐도 다섯 척에 불과했다.

그러나 절강에서 상행을 마치고 돌아온 동오는 무려 여덟 척의 배를 이끌고 돌아왔다.

새롭게 추가된 네 척의 배 가운데 두 척은 심부가 약조한 투자였고 나머지 두 척은 동오가 있는 재산을 모두 털어서 사들인 배였다.

그런 탓인지 배에서 내린 동오는 자신이 타고 온 여덟 척의 배를 뿌듯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런 그의 곁에 심부가 나란히 서서 피식 웃었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물론이지. 이 정도면 이제 나도 개경에서 손꼽히는 상인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개경 최고의 상인은 지경탁이라고 들었습니다. 이 정도면 그쪽보다 더 커진 겁니까?”

“아직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지.”

동오는 그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지경탁이 지금까지 쌓아 올린 부는 아직 자신이 넘보기 어려울 정도로 상당했다.

벽란도는 물론이고 시전에서 그의 이름으로 운영되는 관허 상점이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각지에 퍼져있는 그의 상단 사람들이 움직이는 물자의 양은 상당했다. 오죽하면 지경탁이 마음만 먹으면 고려가 멈출 거라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어떻게든 지경탁을 넘어서고 싶었다.

탐욕을 채우기 위한 목표는 아니었다.

신분이 천하다는 이유로 지경탁에게 대놓고 무시당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그 수모를 되돌려주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그 자는 어떻게 부를 축적한 겁니까?”

“원래는 어용 상인이었던 남궁신 어르신의 아래서 일하던 자였는데 선왕께서 원나라로 압송당하실 때 어르신도 같이 끌려가셨는데 지경탁이 그때 모든 재물을 가로챘네.”

“어떻게 그게 가능했답니까?”

“상당히 높은 관직을 가지고 있는 뒷배를 잡고 있었던 덕분이지.”

하지만 동오는 그게 누군지 밝히지 않았다.

심증은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었기에 괜히 입에 담았다가 화를 당할 것이 분명했다.

“형님께서도 남궁신이란 분의 아래에서 일하셨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동오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 지경탁이 싫은 건지 모른다.

그로 말미암아 남궁신 어르신의 가족은 거지꼴을 하고 개경에서 쫓겨났을 정도였다.

동오는 사비를 털어서 오랜 시간 수소문하여 어르신의 가족을 찾았지만, 그가 그들을 찾았을 때는 이미 절반 이상이 굶어 죽은 후였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동오가 잠시 분노를 삭이고 있을 무렵.

그들이 타고 온 배에서 몇 명이 사람이 내렸다.

길었던 항해 때문에 멀미가 꽤 심했는지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는데 대충 열 명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고려인 노비 같아 보이진 않았다.

나이와 성별도 제각각이었다.

얼핏 봐서는 가족인 것 같아 보였다.

더구나 입고 있는 의복도 꽤 비싼 것이었다.

노예 상인에게 사들인 이들에게 그런 것을 입힐 리는 없었다. 심지어 상단 사람이 그들을 이끌고 벽란도에 있는 객잔으로 안내했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던 심부는 동오에게 물었다.

“저들도 전하의 지시로 데려왔다고 했죠?”

“그렇다네. 전하의 곁을 지키는 홀치 가운데 한 명의 가족이라고 하더군. 상당히 신임을 받고 있는 자라고 들었네.”

“솔직하게 말하면 제가 본 전하와 그렇게 많은 신하를 숙청하신 전하 중에 어떤 것이 그분의 진짜 모습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네.”

동오는 고민할 것도 없이 잘라 말했다.

비록 성문에 수많은 이들의 수급이 걸렸으나 아마 고려인이라면 다들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누구 하나 백성의 원망을 사지 않은 이가 없었고 그들의 죄는 개경 곳곳에 붙인 방문(榜文)을 통해서 낱낱이 까발려졌다.

당연히 그중에는 부원배도 있었다.

그들이 죽어야 하는 이유는 뻔한 것이었다.

심부도 그걸 알고 있었으나 어차피 원나라에 가진 미련 같은 것은 없기에 신경 쓰진 않았다.

누구에게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미 그는 원나라의 종말을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려에 다시 온 것일지 모른다.

아직 정확하게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촉이 드넓은 바다 너머의 고려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잠시 그런 생각을 사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에서 하역이 시작되었다. 여덟 척의 배에서 나오는 물품은 대부분 곡식과 소금 같은 것이었다.

배에서 물건을 나르는 이들은 이번에 동오가 사들인 삼백여 명의 유민들이었다.

하지만 고려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인과 회회인 그리고 왜국 출신은 물론이고 심지어 대식국(大食國, 아랍)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고려인과 달리 20년의 노역을 하면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게 되어 있었다.

한동안 하역을 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두 사람은 허기짐을 느끼고 쌍화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뭔가 예전과 달라진 느낌이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회회국과 왜국에서 온 상인이 많은 것 같습니다.”

“조만간 팔관회가 있으니 그럴 수밖에.”

“그게 뭡니까?”

“고려 최고의 행사지. 그래서 이 시기에 맞춰서 상인과 사절이 찾아오는 것이야.”

“제가 운이 참 좋군요.”

기분 좋게 심부가 웃자.

동오는 그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그의 일정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팔관회가 시작하려면 달포는 지나야 하는데 그때까지 고려에 남아 있을 건가?”

“달포 후요? 그게 어찌 조만간입니까.”

“자네도 나이를 먹으면 내 말이 뭔지 알 걸세.”

“이제 겨우 불혹(不惑)을 넘기신 분이 하실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원래 팔관회 시기가 되면 저런 것도 생기는 겁니까?”

심부는 잔교 너머의 벽란도를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동오의 시선에 보이는 것은 도로가에 길게 늘어선 수레였다.

“아니. 나도 생전 처음 보는 것들이네.”

“흠··· 이건 생선 굽는 냄새인가요. 쌍화점은 가격이 비싸니 저기서 요기만 하고 가죠.”

“돈도 많은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네.”

“허튼 돈이 새어 나가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던 분이 하실 소리도 아닙니다.”

“벽란도까지 오면서 매일 생선을 먹었는데도 그러고 싶나? 질리지도 않아?”

“바다가 제 체질인가 봅니다. 하하.”

심부는 동오를 이끌고 걷기 시작했다.

그들이 잔교에서 내려서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수레를 부목에 고정하여 평평하게 펼쳐 놓고 먹을 것들을 팔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심지어 그들의 앞에는 의자도 놓여 있었는데 앉아서 먹으라고 마련해 놓은 것 같았다.

그때 수레 사이에서 한 남자가 달려 나와 동오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동오 어르신 아닙니까. 저 늦동이입니다.”

“아··· 자네 여기서 뭐 하는 건가?”

“운 좋게도 관허 상점 자리 하나를 얻을 수 있어서 얼마 전부터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이곳도 경시서에서 관리하는 곳인가?”

“그렇습니다.”

잠시 두 사람이 이야기 나누는 사이.

심부는 그가 나온 가게에 더 관심이 갔다.

그곳에서는 눈이 매울 정도로 연기가 나오고 있었는데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슬쩍 안쪽을 바라보니 연탄 위에 밤이 올려져 있었는데 껍질이 터지며 난 소리 같았다.

늦동이라 자신을 소개한 이는 서둘러 달려와 밤을 한쪽 구석으로 치우기 시작했다.

“이크! 아직 제가 서툴러서 칼집을 넣지 않은 것들이 섞여 있었나 봅니다. 어르신, 제가 금방 구워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뭘 어떻게 신세를 진 건지 알 수 없지만,

늦동은 자신이 구운 밤을 동오에게 대접하려 했는데 심부는 그런 그에게 연탄에 대해 물었다.

“이보게. 연탄은 잘 나가던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연기도 독하고 땔감 가격이 훨씬 더 저렴하니 사가는 이가 없죠.”

“자네는 연탄이 비싸다면서 왜 그걸 쓰는가?”

“장사를 시작할 무렵에 경시서에서 공짜로 내어준 거라 쓰는 거죠. 이거 다 떨어지면 숯을 써야 할 것 같은데 걱정입니다.”

장사를 하면서 숯을 계속 쓸 경우.

적지 않은 양이 들어갈 것 같은데 엄청나게 장사가 잘 되지 않으면 오히려 손해였다.

그렇다고 불길이 높게 올라오는 나무를 쓰자니 밤이 익기도 전에 완전히 타버릴 것이다.

잠시 늦동의 하소연을 들어주던 동오는 계속 여기 있을 수 없기에 얼마인지 가격부터 물었다.

“얼마를 주면 되겠나.”

“제가 어찌 어르신에게 돈을 받겠습니까.”

“그렇게 장사하면 뭐가 남겠나. 원래 아는 이와 거래할 때는 더 철저하게 계산해야지. 안 그러면 나중에 크게 후회할 걸세.”

“아직 제가 배울 게 많습니다.”

늦동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두 사람의 실랑이가 계속되니 결국에는 심부까지 나서서 자신이 값을 치르겠다고 했는데 정작 그들이 낼 수 있는 돈은 없었다.

빈털터리라 그런 게 아니라 고려에 새로 생겼다는 화폐가 아직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르신이 상행을 떠난 사이에 벽란도와 개경의 시전에 저화라는 화폐가 생겼습니다. 이제는 경시서에서 관리하는 모든 상점은 은병 외에는 오직 그걸로 거래가 가능합니다.”

그걸 들은 심부는 크게 웃었다.

비웃는 것이 아니라 기가 막혀서였다.

고작 3개월 만에 이렇게 바뀌는 게 신기했다.

동오는 반대로 상당히 당황스러웠는데 늦동이 알려준 화매소에 가자 쌀과 오종포 등을 가지고 줄을 서 있는 이들이 보였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물건을 내주고 종이로 만들어진 고려의 화폐를 받아 가고 있었다.

하지만 잠시 지켜보니 원 보초와 기준 미달의 물건은 바꿔주고 있지는 않았다.

“보초는 교환이 안 됩니다. 다음 차례요.”

“이거 쌀 아래쪽에 모래랑 돌이 섞여 있는 거잖아요. 이런 거 받으면 저 큰일 나요. 당장 가지고 가세요.”

“아지매! 이런 품질 낮은 추포(麤布)는 못 받는다니까요.”

“여기 있는 쌀이 모두 합쳐서 두 말이니 백 저(楮)짜리 두 장 맞죠?”

저화로 바꾸려는 이들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달가운 표정을 한 이들은 없었다.

거래를 하려면 일단 저화가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이 화매소에서 필요한 만큼만 바꾸고 있었다.

아직 저화가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래도 몸이 편하다는 것은 다들 느꼈다.

이곳에서 물건을 처리하고 시전에 가서 다시 저화를 내밀면 물건으로 내주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벽란도와 개경이 가깝다고 하더라도 물건을 지고 거기까지 가는 것은 쉽지 않다.

개경과 벽란도까지 이어진 길을 따라서 물건을 옮기는 일만 전문적으로 하는 이가 있을 정도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심부는 동오를 바라보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봤다.

“이것도 아마 전하께서 하신 일이시겠죠?”

“당연하지 않은가.”

“하여간 추진력 하나는 대단하십니다.”

“그것뿐인가, 대담하고 또 명민하신 분이시네.”

“하하하! 물론이다 마다요.”

심부는 동오의 말에 맞장구를 쳐줬다.

확실히 그가 보아도 대단하신 분이었다.

오히려 그래서 원나라가 그냥 두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함마저 생길 정도였다.

올해 일어난 조일신의 변은 그럭저럭 넘어간 것 같은데 너무 일찍 발톱을 드러낸 것 같았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던 그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상단 사람을 불러서 저화를 바꿔오도록 시켰다.

“비단을 가져와서 바꿔오거라.”

잠시 후에 심부는 새로운 화폐를 받았다.

동오와 함께 한 장씩 쥐고 살펴보기 시작했는데 크기는 원보초에 비해서 절반도 안 되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었고 테두리에는 뭘 바른 건지 노란빛이 감돌았다.

두 나라의 화폐를 놓고 비교하면 당연히 고려의 것이 훨씬 더 정성이 많이 들어간 느낌이었다.

그중의 한 장을 늦동에게 내밀자.

그는 나무 접시에 껍질을 깐 군밤을 올려줬다.

갈색으로 구워진 모습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 정도로 상당히 맛있어 보였다.

심지어 이를 쑤실 때 사용하는 버드나무 가지 같을 것을 군밤 위에 꽂아 주었다.

“이건 왜 주는 건가?”

“아직 뜨거우니 찍어서 잡수시면 됩니다.”

“흐음··· 알겠네.”

이렇게 음식을 먹는 것은 처음이지만,

심부는 그가 알려준 대로 군밤을 찍어서 베어 물었다. 그런 후에 그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늦동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흐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맛있군요.”

“고려의 밤이 알이 실하기로 유명하지 않은가.”

“만약 절강까지 가는 거리만 가까웠다면 제가 싹 다 사들였을 겁니다.”

“누구 마음대로. 여기 사람들도 먹고살아야지.”

“배에 곡식을 한가득 싣고 오신 분이 저에게 하실 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이십여 개가 넘던 군밤은 금방 사라졌다.

배에 최대한 많은 물건과 사람을 싣고 오느라 한 달 가까이 식사를 부실하게 했던 탓이었다.

마지막 하나 남은 군밤을 놓고 잠시 두 사람이 눈치 보고 있을 무렵에 누군가가 동오를 불렀다.

잠시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사이에 심부는 마지막 남은 군밤을 낚아챘는데 정작 동오는 그와 잠시 이야기를 나더니 다급하게 일어섰다.

왜 그러냐고 심부가 묻자 그는 소리를 낮춰서 답을 해줬다.

“전하께서 우리를 찾으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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