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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28화 (28/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28

다음날 심부는 무척 늦게 일어났다.

보통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는 그였지만,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어쩔 수 없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기억을 더듬어 봐도 어제 숙소에 들어온 기억조차 없었다.

누가 말끔하게 기억을 모두 지운 것 같았다.

일어나서 끙끙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상단에 소속된 노비 하나가 눈치 좋게 시원한 물을 한 그릇 떠다 주자 심부는 단숨에 마셨다.

하지만 그런다고 두통이 지워질 리 없었다.

잠시 그렇게 머리를 부여잡고 있자 밖에서 자신을 다급하게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굳이 내다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심부가 노비에게 그를 안으로 들여보라고 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동오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자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글쎄요. 설마 그걸 물어보려고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무슨 일이 있었냐니까.”

다급하게 묻는 동오와 달리.

심부는 느긋한 표정으로 답을 해줬다.

솔직히 아직 그는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여전히 비몽사몽 중이었다.

“어제 소개해주신 분과 함께 한잔했지요. 상당히 만족스러운 거래를 했거든요. 앞으로 계속 같이 일하게 되었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상인에게 거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까?”

“그분이 누군지는 알고 하는 말인가?”

동오의 질문에 심부는 답하지 못했다.

분명히 술을 마시면서 들은 것 같기는 했다.

그런데 전혀 떠오르지 않는 어제의 기억 중에 그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동오의 표정 때문인지 몰라도 무척 찜찜하기는 했다.

분명히 뭔가 중요한 것을 들은 것 같은데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 그를 끌어서 의자에 앉히며 동오는 재차 그에게 물었다.

“혹시 무례한 짓을 하진 않았겠지?”

“글쎄요, 그런 일은 없었던 거 같은데···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습니다.”

“어떻게든 기억해야 하네.”

“제 마음대로 그게 됩니까. 그냥 속 시원하게 먼저 말하시죠.”

안 그래도 머리가 아픈 상태였다.

여기서 동오와 선문선답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심부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러자 동오는 잠시 고민을 했다.

자신이 그분의 정체를 밝혀도 되는 걸까.

하지만 무슨 무례를 범할지 모를 일이기에 심부에게는 알려줘야 할 것 같았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그는 심부에게 다가가서 귓속말로 어제 그가 만난 분의 정체를 알려줬다.

잠시 동오의 말을 듣고 있던 심부는 사색이 된 얼굴로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아니! 그걸 지금 말해주시면 어떻게 합니까?”

*

심부가 내 정체를 알고 경악할 무렵.

나도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오늘도 아일이 있어서 새벽부터 끌려 나와 재추들이 떠드는 것을 들어주는 중이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헛구역질을 참으며 앉아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은 오늘도 별거 아닌 문제로 싸우며 혈압을 올리고 있었다.

개중에는 고려의 힙스터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 엄청 빠른 이들도 있었다.

그들이 갑론을박하는 것을 듣고만 있자.

눈치 좋은 이인복은 금방 내 표정과 상태를 보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 건지 생각보다 빨리 일정을 끝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런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살짝 눈인사를 하고 나온 나는 곧장 가진이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

헬쑥한 얼굴로 숙옹부로 들어서자 그녀는 피식 웃으면서 향이 좋은 차를 한 잔 내왔다.

“어제는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자셨어요?”

“모처럼 마음에 드는 이를 만나서 마시다 보니··· 그런데 내가 어떻게 왔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신 환관이 가마에 태워서 아무도 모르게 모셔왔어요.”

“흠흠. 다음부터는 주의하겠소.”

슬쩍 고개를 돌려 신소봉을 바라보자.

그는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확실히 그가 아니었다면 미복 잠행을 나가서 술에 취해 돌아온 망나니 같은 왕이 됐을 거다.

가진도 그런 소문이 돌지 않도록 가능하면 술은 궁궐 내에서 마시라고 조언을 해줬다.

임진 정변이 일어난 후부터 그녀는 매사에 조심성이 많아진 것 같았다.

나는 흔쾌히 가진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그녀가 내온 차를 마시며 쉬고 있자 어느 정도 정신이 드는 것 같아서 어제 심부를 만나 나눈 이야기를 그녀에게 해줬다.

아무리 그녀가 중요한 일은 내게 결정권을 넘겼다고 하더라도 엄연히 상단은 그녀의 이름으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하루아침에 배가 두 척이나 더 생겼군요.”

“두 척 모두 동오에게 맡길 생각이오.”

“그만큼 더 많은 물건을 실어야 하니 서둘러 준비를 해야겠군요.”

“이번에는 무엇을 보낼 생각이오?”

“단산에서 만드는 단산오옥((丹山烏玉, 먹)과 청자가 좋을 것 같아요.”

청자라는 말에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아쉽게도 최근의 고려는 청자를 예전처럼 굽는 장인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긴 시간 사회 불안과 함께 경제가 좋지 않아서 퇴락이라는 단어가 쓰일 정도로 품질이나 문양 그리고 번조수법이 퇴보되어 있었다.

그런 나의 표정을 본 가진은 대답을 해주었다.

“수소문하여 자기소(瓷器所)에서 일하던 청자장(靑瓷匠)의 후손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제작 방법을 기억하는 이가 있단 말이오?”

“저기 놓여있는 청자가 그가 만든 것이옵니다.”

가진은 한쪽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상감모란무늬의 상감청자가 보였다. 그 형태가 표주박 형태로 만들어진 국보급 문화재와 무척 흡사했다.

순청자만의 매력이 분명 있기는 하나 내 취향에는 이쪽이 더 맞는 것 같았다.

“상당히 훌륭한 솜씨 같아 보이오.”

“제 눈에도 그렇게 보입니다. 동오의 말을 들어보니 아직 고려의 청자를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니 최대한 준비해서 보낼 생각이옵니다.”

아무래도 희귀해진 탓이겠지.

비록 청자의 유행은 거의 지나갔지만,

저마다 개인적인 취향이 있으니 수요가 아예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물량이 많지는 않다고 했다.

이제 겨우 작업을 시작한 탓에 십여 점이 전부였는데 일단은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일단 반응이 괜찮은지부터 봐야 했다.

하지만 가진이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하고 직접 준비까지 했다는 점은 무척 놀라웠다.

“이런 거는 또 언제 준비한 거요?”

“엄연히 제 이름을 걸고 운영하는 상단인데 놀고만 있었겠습니까.”

그 이야기를 들으니 조금 뜨끔했다.

어제 그녀의 의중은 물어보지도 않고 심부에게 3년이나 독점을 주기로 약조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물건을 그와 거래하는 것은 아니고 20종의 물품으로 한정되었으나 연필은 물론이고 청자도 거기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슬쩍 그 이야기를 꺼내자 가진은 그다지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웃어줬다.

그보다 그녀는 무명에 더 관심이 많았다.

“절강행성에서 싣고 온 것들을 보니 전하께서는 무명에 관심이 상당히 많으시더군요.”

“역시 벌써 눈치채셨군요.”

“목화씨를 남해안으로 보내서 재배를 시킬 때부터 어느 정도 느낌이 오기는 했습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만약에 올해 면화가 어느 정도 수확이 되면 무명을 짰으면 합니다.”

“그러실 것 같아서 벌써 준비하고 있습니다.”

생각외로 가진의 추진력은 대단했다.

청자부터 시작해서 무명까지 스스로 생각하고 미리 준비하는 모습은 낯설 정도였다.

지금까지 물 흘러가듯 내 말을 따라주던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슬쩍 내가 그 이유를 묻자 그녀는 모두 나 때문이라고 말해줬다.

“뭔가 더 넓은 세상을 보는 기분이랄까요.”

“고려보다는 그대의 나라가 훨씬 더 크오.”

“제 나라도 이제는 고려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넓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흐음··· 미안하오.”

가진이 정색을 하자 나는 곧장 사과했다.

원나라의 공주 신부이지만, 그녀는 이제 고려를 자신의 고향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최근 들어서 그녀가 고려의 말을 배우며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요즘 우리 둘의 대화도 가능하면 고려의 말로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아졌다.

“어쨌든 동오가 데려온 이들까지 합류하면 숙옹부에 마련한 공간으로는 무척 비좁을 테니 이번 기회에 넓은 곳으로 옮기는 것은 어떻소.”

“봐두신 곳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광화문 동쪽에 있는 노군교(勞軍橋) 부근에 새로 2층 건물을 하나 짓는 것이 어떨까 싶소.”

“굳이 새로 건물까지 지을 필요가 있을까요?”

“앞으로 고려 백성의 옷감은 그곳에서 책임질 각오로 일하셔야 할 거요.”

가진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싫은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바쁘게 지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확실히 궁궐에만 있을 때와 비교하면 생기가 흐르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당장은 그 정도 수준은 아니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상당히 많은 면화가 나올 것이 분명했다. 괜히 숙옹부쪽으로 원나라에서 데려온 여인들 대부분을 배치한 것이 아니다.

그녀가 앞으로 운영하게 될 무명은 조선 시대에 화폐 대용으로 쓸 정도로 상당히 중요한 것이다.

내가 슬쩍 그 이야기를 해주자 가진도 상당히 심각한 표정으로 최근의 분위기를 말해주었다.

“보초를 발행한 원나라에서 거의 무용지물이 되고 있어서인지 벽란도와 시전에서도 보초를 받아주지 않는 곳이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나도 그게 요즘 걱정이오.”

“문제는 보초가 사라지니 시전에서 거래를 하는데 여러모로 혼란이 많이 생겼습니다.”

고려의 시장 경제를 받치고 있던 보초가 사라지니 다시 물물거래로 돌아가고 있었다.

은병 등의 화폐가 분명히 있기는 했으나 워낙 화폐의 단위가 커서 상단에서 무역 거래 같은 곳에나 쓰는 편이었다..

그래서 충혜왕이 즉위한 원년에 소은병을 만들었으나 말이 은병이지 동의 비율이 너무 높아진 위조 화폐가 나돌고 있었다.

‘차라리 동병(銅甁)이라 불리는 게 적당하지.’

문제는 소은병도 화폐 단위가 컸다.

오종포 10포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니 백성이 거래할 때 보초가 아니면 쌀 등의 물건을 가지고 물물 교환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연필과 연탄을 파는 상점에서도 보초는 안 받고 쌀과 면직물로만 값을 치를 수 있게 해놨다.

그런 탓인지 올해는 유독 쌀 가격이 전년에 비해서 생각보다 많이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소?”

“기존의 은병은 포기하고 실생활에 필요한 소액의 화폐를 만들어서 사용하는 것은 어떤지요.”

흡족한 미소가 지어지는 대답이었다.

정확하게 내가 하고 있는 생각과 동일했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권문세족을 밀어내고 있는 신진사대부보다 오히려 가진의 시선이 더 정확하고 예리할 때가 많은 것처럼 느껴졌다.

훗날 공양왕이 화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내놓은 해법이 저화(楮貨)였다.

그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이미 고려는 원나라의 보초를 사용해본 경험이 있기에 종이 화폐가 생소한 개념은 아니었다.

그녀가 지적한 대로 소액의 화폐가 필요했는데 당장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쉽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려의 역대 왕들도 꽤 고민이 많았다.

시전에 주점이 생긴 이유도 화폐가 돌게 하기 위한 정책 중의 하나였다. 상당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인식의 변화는 쉽지 않았다.

심지어 세종대왕님마저도 실패한 것이 바로 화폐 정책이었다.

그래서 큰 욕심은 없었다.

시전과 벽란도에서 유통이 가능한 지역 화폐 수준의 기능만 하더라도 만족할 것 같았다.

연필 몇 자루 사겠다고 무거운 쌀을 짊어지고 땀 흘려가며 시전까지 오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도달하자 나는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저화를 만들 준비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나갈 수는 없었다.

모처럼 숙옹부에 찾아왔는데 금방 일어나려니 가진의 눈치가 조금 보였다.

그녀는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내 모습을 보고 그럴 줄 알았다며 웃으며 조용히 일어섰다.

일단 뭔가를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는 내 성격을 알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급하신 것 같으니 어서 가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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