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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27화 (27/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27

아직 정체가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아는 그 심만삼이라면 대박이었다.

중국 역사상 10대 갑부에 들어갈 정도로 엄청난 거부였던 심만삼의 본명이 심부이다.

훗날 명나라보다 가진 재산이 더 많다고 말할 정도로 엄청난 거부가 고려에 찾아온 것이 맞다면 당연히 만남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약속을 잡은 뒤.

바로 다음 날에 그를 만나기로 한 다점(茶店)으로 들어가자 자신이 심부라고 주장하는 청년이 홀로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점 내에는 그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는데 고려에서 운영하는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소인은 오흥 출신의 상인 심부라 합니다.”

심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차렸다.

그의 나이는 이십 대 중후반쯤으로 보였는데 얼굴에는 곰보와 여드름이 상당히 심했다.

그래도 자세히 보면 못난 인상은 아니었다.

나는 잠시 그를 살펴보다가 앉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그에게 자리를 권하며 반대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호구 조사에 들어갔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그가 진짜 대부호 심만삼이 맞는 건지 확인부터 해야 했다.

내가 심만삼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수재(水災)로 어머니를 잃고 주장(周庄)으로 이사했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심부는 내가 아는 것과 동일한 삶을 살았고 현재도 주장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상인이기에 확실히 맞는 것 같았다.

‘그런데 고려는 왜 왔을까?’

심부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국제 무역상이라 말하는 이가 있을 정도로 수많은 원거리 교역을 하는 것은 알고 있으나 그건 더 훗날의 일이다.

현재 그의 상단을 아무리 높게 쳐도 강소성과 절강성에서 어느 정도 알려진 정도이지 원나라를 대표하는 부호는 아직 아닐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혀 그의 의도가 가늠되지 않고 있었다. 소주에서 손을 맞잡았던 소금 장수 장사성은 내년쯤에 거병을 할 예정이다.

그러니 그와 관련된 문제도 아닌 것 같았다.

그쯤에서 나는 그가 벽란도까지 찾아온 진짜 이유를 물었다.

“나를 만나 보고 싶다고 들었습니다.”

“동오가 이끄는 상단의 실질적인 주인이 누군지 궁금해서 찾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 것 같으시오?”

“제 생각으로는 적어도 왕족이나 고위 관직에 계신 분이라 생각하는데 맞습니까?”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심부는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고 여겼는지 슬쩍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나를 만나고자 하는 이유는 아직 듣지 못했기에 지긋이 바라보고 있자 그제야 심부는 자신이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저는 고려와 거래를 트고 싶습니다.”

“그런 거라면 차라리 내수사나 시전을 관리하는 경시서(京市署)의 관리와 만나보는 것이 더 빠르지 않겠소. 필요하다면 소개해주지.”

“중간에 걸쳐 있는 이들과 거래하는 것은 여러모로 번거로운 점이 많습니다.”

긴 시간 오르탁 무역이 성행한 탓일까.

대부분의 상단은 어느 정도 규모를 넘어서면 가능하면 황실이나 고위 관료와 직접 연결하여 상행을 떠나려는 습성이 있었다.

심부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확실히 그편이 일 처리가 편하기는 했다.

중간 과정을 거칠수록 번거로운 일이 많이 생기고 콩고물을 바라는 이도 많아진다.

“그래서 내게 원하는 게 무엇이오?”

“동오의 상단이 싣고 온 물건과 동일한 품질로 저희 상단에게 지속적인 공급을 해주실 수 있다면 거래를 하고 있습니다.”

“이미 동오의 상단이 그 일을 하고 있지 않소.”

“제가 직접 그걸 운송하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동오의 상단이 절강으로 물건을 가지고 오면 원나라에서의 판매는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그다지 크게 우리한테 이익이 될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소만···”

한 마디로 그가 원하는 것은 독점 거래였다.

우리 물건을 운송해주면 모든 것을 자기가 맡아서 판매하겠다는 뜻이었다.

분명히 장단점이 있는 문제였다.

이 시대는 해상 운송에 대한 리스크가 컸다.

“위험한 일은 이쪽에서 다 떠맡고 앉아서 이익을 올리겠다는 뜻은 아니겠지?”

“만약에 그런 일이 생겨서 손해가 발생하면 제가 절반은 책임지겠습니다.”

심부는 그 외에도 배를 투자하기로 했다.

그 정도까지 나오니 나도 조금 마음이 동했다.

제대로 된 값으로 쳐주기만 한다면 고정적인 판매처가 있는 것이 좋기는 하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심부였다.

하지만 곧장 답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자 심부는 거기에 조건을 더했다.

“고려의 유민을 환국시키려고 하시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 일을 돕겠습니다.”

“뭘 어떻게 돕는다는 건가?”

“아무리 동오가 상인이라 협상에 능하다고 하더라도 현지의 상인과 비교하면 다소 비싸게 값을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자네가 그 일을 대신해주겠다는 건가.”

“또한 황실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지요.”

생각보다 거래에 능한 자인 것 같았다.

하긴 그러니까 엄청난 재물을 가진 대부호가 되었던 거겠지. 일단은 그가 원하는 물건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들어보기로 했다.

거래를 원하는 물품을 말해보라고 하자 그는 어느 정도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한 건지 신나는 표정을 지으며 품목을 열거하기 시작했다.

심부는 상당히 간절한 상태였다.

애써서 그 표정을 감추고 있을 뿐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번의 고려에 온 것은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현재의 심부는 상단을 이끈지 얼마 안 되어 주장을 중심으로 절강에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으나 아직 대형 상단이라 보긴 어렵다.

더구나 최근 들어 분위기가 너무 흉흉했다.

각지에서 거병을 하는 세력이 많아지고 해상에서 왜구마저 난동을 부리니 상단을 운영하는 것이 상상 이상으로 어려워졌다.

심부는 그 돌파구로 고려를 찾은 것이다.

그가 바라는 것은 차별성이었다.

“고려의 나전칠기와 종이를 제가 운영하는 상단을 통해 원나라에서 판매하고 싶습니다.”

그것 외에도 바라는 것은 꽤 많았다.

심지어 고려의 동(同)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쯤에서 잠시 그의 말을 끊어야 했다.

“잠깐, 고려동은 거래가 금지되었소.”

“동오한테 들어보니 문제가 없었다고 했는데 그사이에 바뀐 것입니까?”

“그렇소. 그가 상행을 떠난 사이에 바뀌었소. 정말로 필요하다면 경시서 몰래 챙겨줄 수는 있는데 관심 있으면 말하시오. 다만, 가격은 상당히 비쌀 거요.”

“아닙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심부는 괜찮다며 손을 휘저었다.

괜히 그런 물건을 건드렸다가 밥줄은 물론이고 명줄도 끊기는 것을 자주 보았다며 철저하게 선을 긋고 다시 그에 대해서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그는 품에서 뭔가를 꺼내서 내놓았다.

“그렇다면 이걸 알아봐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가 내민 것은 재미있게도 연필이었다.

벽란도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알고 있는데 벌써 이걸 손에 넣었을지는 몰랐다.

최근에 연필은 고려필(高麗筆)이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하단에는 고려가 한자로 낙인까지 찍혀 있었고 제품의 품질도 개선되고 있었다.

장인들이 3개월 동안 계속해서 연필만 만들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건 또 언제 구하셨소?”

“시전에서 사람이 많이 모여있는 곳이 있길래 한번 들어가 봤는데 정말 구하기 어렵더군요. 저도 간신히 다섯 자루를 구했습니다.”

“그 정도면 운이 좋았던 거요.”

“혹시 담당하는 이를 소개해주실 수 없습니까? 직접 찾아보려고 해도 아무도 안 알려주더군요.”

연필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였지만,

이걸 원나라로 가져가면 대박이 날 것 같다는 상인의 감이 강하게 들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런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는 언제나 상상도 하지 못할 돈을 벌었다. 남들이 안 될 것 같다는 것도 결과를 보면 항상 자신의 감이 맞았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잠시 심부를 살폈다.

시시각각 바뀌는 그의 표정을 보니 연필이 원나라에서도 잘 팔릴 거라 자신하는 것 같았다.

원래는 11월에 있을 중동팔관회에 방문할 각국의 사절단과 상인에게 제대로 선보이려 했으나 조금 일찍 풀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얼마 전에 기 황후에게도 보냈기에 이제 슬슬 반응이 나올 시기였고 재신이라 불리던 심부라면 누구보다 잘 팔아치울 것 같았다.

“고려필에 관한 것이라면 내게 말하면 되오.”

“정말입니까? 역시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한 것 같습니다.”

“기뻐하기는 조금 이른 것 같소. 이건 고려 내에서도 수량이 부족하여 원나라에 가져가서 팔고 싶어도 물건을 구하기 힘들 거요.”

그리고 판매하는 가격도 문제였다.

그가 시전에서 산 가격으로는 팔 수 없었다.

지금은 연필을 홍보하는 시기라 할인 중이었다.

현재는 쌀 한 섬에 연필 스무 자루를 바꿔주고 있었는데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가격을 올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시대의 모든 물건이 그렇겠지만,

수작업으로 만드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그나마 조금 더 단단하고 오래 쓸 수 있도록 2H 정도의 수준으로 만들고 있기에 흑연의 비율이 그리 높지 않아서 손해를 볼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지금 가격으로는 불가능한 이유를 설명해주자 심부는 현재 판매가의 두 배를 제시했다.

“쌀 한 섬에 열 자루를 사겠습니다.”

“그렇게 가져가서 팔 자신은 있는 건가?”

“물론이죠. 창고에 쌓아두려고 물건을 사들이는 상인은 없습니다.”

현재 만드는 연필을 심부에게 모두 팔 경우.

하루 생산량이 이백에서 삼백 자루 정도는 되니 매일 이십 섬의 쌀이 생기는 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쌀로 대금을 치를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많은 양을 가져오는 것도 무리였고 원나라의 식량난 때문에 쌀을 구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울 것이다. 내가 그 부분을 지적하자 심부는 간단하게 해결책을 내놨다.

“그만큼의 고려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니, 그건 내가 싫소.”

“혹시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일부러 고려인을 노비로 삼는 이들이 생기지 말라는 보장이 없으니 하는 말이오.”

내가 하는 말에 심부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수요가 생기면 공급하려는 이가 저절로 생긴다.

때로는 인간이길 포기하는 이들도 있기에 괜히 멀쩡하게 잘살고 있는 고려 출신의 사람을 노비로 전락시키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그렇다고 금이나 은으로 값을 치르자니 해외로 반출을 금지한 상태라 애매했다.

“이번에 동오를 따라오면서 배를 몇 척이나 가져오셨소?”

“모두 합쳐서 세 척입니다.”

“그럼 그 배로 값을 치릅시다.”

앞으로 더 많은 교역을 하게 될 것이다.

새롭게 배를 만들 바에는 조금 저렴하게 중고로 사들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심부는 그런 내 제안이 나쁘지 않다고 여겼는지 받아들였다.

심부는 곧장 자신의 배를 두 척이나 내놨다.

한 척은 아까 약조한 동오의 상단에 대한 투자였고 나머지 한 척은 연필의 값이었다.

문제는 그가 바라는 연필의 주문량이었다.

“이번에 돌아갈 때 오천 자루를 가져가고 싶습니다. 혹시 가능하십니까?”

대충 이십일 정도의 작업량이었다.

그 정도면 그리 부담될 정도는 아니었다.

“달포 정도는 기다려야 할 것이오.”

“충분히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럼 거래는 다 끝난 것 같으니 여기 앞에 주점에 가서 술이라도 합시다.”

“그거 좋지요!”

심부는 흔쾌히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내가 그를 끌고 간 곳은 개경에서 유명한 주점이었는데 다른 곳과 달리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개별적인 공간이 있어서 편했다.

나보다 먼저 달려간 신소봉이 독립된 방에 자리를 마련해 놨는데 그곳에 앉은 심부와 나는 거래 성사를 축하하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둘 다 주량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시작된 자리는 오래 이어졌다.

일단 심부와 나는 생각보다 말이 잘 통했다.

태어난 해도 같은 덕분인지 상당히 빨리 친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술김에 나온 행동은 아니었다.

원래의 역사대로면 그는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에게 충성을 하며 재정적인 지원도 많이 하게 된다.

그런데 주덕유가 나와 함께하고 있으니 이번 기회에 그걸 나로 바꾸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앞으로 빨대를 제대로 꽂아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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