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26
장수들의 발령은 곧 이뤄졌다.
김휘남은 일단 전국의 수군을 모았다.
얼마 안 되는 수라도 몇 척의 배와 군사가 있는 건지 그 수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당연히 주덕유도 그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모은 이들을 데리고 김휘남이 향한 곳은 강화와 그 부근의 섬이었다.
하지만 해안가를 모두 비워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주덕유의 함대였다.
그들은 해군이 전체적으로 재편성을 하는 중에 속도가 빠른 왜선을 이끌고 남해로 향했다.
아직 주덕유가 해상 전투에 익숙하지 않으나 김휘남은 자신의 경험 많은 부장을 주덕유의 밑으로 보내어 개인 교습을 해주기로 했다.
그 외에도 배에 탑승한 이들의 대부분이 경험 많은 이들이라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최영도 방호사가 되어 남해로 향했다.
그의 임무는 육지에 상륙한 왜구의 토벌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병사가 따로 주어지진 않았다.
남해 지역을 돌면서 병사를 차출하여 모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기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동시에 여러 일을 처리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러서 순식간에 초여름인 6월이 되었다.
그쯤 되니 원나라에서 보낸 단사관(다루가치)이 개경의 만월대에 도착했다.
이부 상서(吏部尙書) 불화첩목아.
종정부 상판(宗正府常判) 양렬첩목아.
두 사람은 곧장 조일신의 잔당을 처형했다.
그들이 오기 전에 대부분의 역적이 처형을 당했으나 단사관은 정황상 증거만을 가지고 의심되는 이들까지 모두 처형대에 올렸다.
기 황후의 분노가 얼마나 강렬했는지 단사관의 서슬 퍼런 모습만 봐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들이 처단한 이들만 수십 명에 달했다.
하지만 나를 추궁하지는 않았다.
기 황후의 외종 오라비인 이공수가 사력을 다해서 나에 대한 의심은 지워버린 것 같았다.
그나마 내가 군사를 보내어 기 황후의 모친인 영안왕대부인(榮安王大夫人) 이 씨를 지켜낸 덕분이었다. 이씨 부인은 애초부터 우리의 목표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조일신도 차마 그녀까지 건드리진 않았다.
만약에 기 황후의 어머니마저 죽었다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이공수 못지않게 이쪽도 꽤 노력했다.
바쁜 와중에도 대부인을 틈틈이 찾아갔는데 어머니인 공원왕후를 뵙는 날보다 더 잦았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순군을 배치해놨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지키겠다는 의지였다.
원나라에서 온 단사관들도 그걸 보고 조금 화가 수그러졌는데 조일신의 아내를 기천린에게 주어 노비로 삼으려 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의 아들은 구했다.
대외적으로는 죽은 거로 되어 있으나 현재 계정골에 아무도 모르게 숨겨 놓은 상태였다.
긴 시간 나를 호종했던 것 외에도 기씨 일가를 한 방에 정리할 수 있게 해준 공헌도 있기에 적어도 그의 아들은 보살펴줄 생각이었다.
“조일신의 아들은 잘 있느냐?”
계정골에서 온 이인민이 들어오자.
나는 우선 그의 아들에 대해서 물었다.
현재는 원나라의 시선 때문에 잠시 계정골의 출입을 자제하고 있기에 이인민의 궁궐 출입이 평소보다 잦아지고 있었다.
“계정골에 거주하며 소신과 함께 일을 보는 화공(畫工)의 양자로 들였습니다.”
“누구의 아들인지 밝히지는 않았겠지?”
“그건 저만 알고 있사옵니다. 제가 곁에서 계속 지켜볼 테니 심려치 마시옵소서.”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면 친척 집에 보내고 싶었지만,
지금 조일신의 집안은 풍비박산하여 삼족을 모두 멸할 기세로 단사관이 조사하고 있었다.
어쩌면 평생 자신의 출신을 모르고 사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과인이 예전에 제작을 해달라고 지시 내렸던 것들은 어찌 되었느냐.”
“완성품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리 가져와 보거라.”
이인민은 작은 상자를 내게 내밀었다.
그 상자를 열자 안에는 연필 몇 자루가 있었다.
하지만 시전에서 파는 그런 수준과는 차원이 아예 달랐는데 투박하던 몸통은 보이지 않았다.
사각의 형태에서 모퉁이를 깎아서 8각으로 만들었는데 심지어 자개로 치장까지 해놓고 뒷부분에는 홈을 파서 흑진주도 박아놨다.
이건 깎아서 쓰는 용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장식용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자개 연필 외에도 낙화와 같은 기법으로 고풍스럽게 만든 연필이 상자 안에 가득 들어 있었다.
이건 내가 쓸 게 아니라 기 황후와 단사관에게 줄 뇌물이자 수출용 견본에 가까웠다.
“훌륭하구나. 수고가 많았다.”
상당히 만족하는 나의 표정을 보자.
이인민은 긴장하고 있던 얼굴을 풀었다.
최근에 내가 벌인 대대적인 숙청 때문인지 요즘 다들 그와 비슷한 반응을 보일 때가 많았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광종의 환생이 나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다.
환생이 아니라 빙의라고 말을 한다면.
그들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귀신에 씌었다며 굿을 거하게 한판 벌일까.
아니면 왕의 자격이 없다고 뒤집어엎을까.
내심 상당히 궁금했으나 지금은 그런 장난을 칠 때가 아니었다. 당장 단사관부터 시작해서 급하게 처리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 같았다.
그중에서도 연필의 생산이 문제가 많았다.
이 무렵의 고질적인 시장 경제의 문제는 수요에 비해서 공급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이다.
생각 이상으로 연필은 잘 팔렸다.
귀신을 쫓는다는 버드나무로 연필을 만든 게 의외로 셀링 포인트가 되고 있었다.
하지만 하루 생산량이 그리 많지 않았다
흑연을 옮겨오고 나무를 구하는 것이 생각보다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연필심이 들어가는 홈을 파는 것도 손이 많이 갔다.
그나마 버드나무가 그리 단단한 목질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도 나무에 익숙한 장인이 온종일 작업을 해도 백 개 정도가 한계였다.
생산량을 대폭 늘리는 방법은 간단했다.
계정골에서 연필을 만들던 이들을 차라리 흑연이 나오는 양광도의 진위로 보내는 것이다.
안 그래도 이전을 위해 적당한 자리를 알아보고 연필심을 구울 가마를 마련 중이었다.
그와 관련된 보고를 받던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인민에게 다시 주의를 줬다.
“나무를 베는 것 이상으로 다시 심어야 하는 것은 잊지 않아야 한다.”
한 그루의 버드나무를 벨 때마다.
몇 배 이상을 다시 심도록 지시를 해놨다.
혹시 몰라 그 부분에 대해서 지적하자 이인민은 잊지 않고 있다며 대답을 했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씨앗을 모아 예성강을 따라 장단까지 물가에 빼곡하게 심었습니다.”
“잘하였다.”
“그런데 화포는 언제까지 보류하여야 합니까. 다들 허송세월을 보내는 것 같다며 상당히 의기소침해 있습니다.”
최무선이 화약을 만진 지 벌써 반년이다.
이제는 어느 정도 기초적인 부분은 뛰어넘고 제대로 된 화포를 만들기 위한 작업 중이다.
내구도가 강한 화포를 만들고 거기에 들어가는 화약의 양이 어느 정도가 적절한지 찾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폭음도 끊이지 않았다.
“단사관이 돌아갈 때까지는 어쩔 수 없다. 안 그래도 요즘 개경 밖에 사는 이들이 계정골에서 시도 때도 없이 벼락이 친다고 벽성(霹聲)골이라고 부르다고 하더구나.”
계정골은 생각보다 개경에서 멀지 않다.
만약 고려에서 자체적인 화약 생산을 하고 있다는 것이 들키면 화약을 공물로 보내라고 압박할 것이 뻔했다. 나는 당장 할 게 없으면 염초부터 모아서 화약의 보유량을 늘리라는 지시를 내리고 이인민을 내보냈다.
‘이게 과연 효과가 있을까?’
*
결론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단사관에게 보낸 수많은 재물이 있었지만,
정작 가장 큰 효과를 보인 것은 전쟁 물자였다.
없는 살림에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공물을 늘리자 단사관은 만족하며 돌아갔다.
현재 상황이 그만큼 좋지 않다는 뜻이다.
피 같은 물자를 내줘야 하니 상당히 속이 쓰렸으나 짧게는 3년 정도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에 깔끔하게 내주기로 했다.
하지만 그걸 한 방에 다 줄 생각은 없었다.
할부로 끊듯이 나눠서 보내는 조건으로 협상 되었는데 병사를 요구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나마 부원배와 탐관오리에게 걷은 재물이 있으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열흘 정도가 지난 뒤.
원나라로 상행을 떠났던 동오가 돌아왔다.
생각보다 꽤 오래 걸린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원나라에서 보초를 처분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움이 많았던 것 같았다.
그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그와 만날 수 있는 자리를 감찰사에서 따로 만들었다.
“수고가 많았다.”
“덕분에 무탈하게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요즘 원나라의 분위기는 어떠하더냐?”
“상당히 뒤숭숭하옵니다. 반원(反元)을 외치며 일어난 한족 출신의 군벌이 허다합니다.”
거기까지는 나도 알고 있는 내용이다.
보다 자세하게 듣길 원하자 동오는 자신이 이번 상행에서 보고 들은 것을 내게 이야기를 해줬다.
가장 인상적인 내용은 송문도(松門島)에 근거지를 둔 방국진이 태불화를 죽이고 황암 성을 차지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역사보다 약간 빨랐다.
뭔가 영향을 준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는데 동오는 이번 일을 상당히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원나라가 그리 오래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찌하여 그렇게 생각하느냐?”
“대도 외에 다른 지역에서는 황제의 영향력이 그리 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난해 봉기한 백련교의 위세가 더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생각보다 감이 좋은 자였다.
그러니 이문(利文)에 밝은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그쯤에서 이번에 교역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다. 이미 가진을 통해서 간략하게 듣기는 했으나 조금 더 정확하게 알고 싶었다.
그러자 동오는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이번에 원나라에서 보초를 처분하고 데리고 온 이들은 모두 합쳐서 이백오십 명이옵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많구나.”
“다행히 절강 행성에서 벽란도로 오는 배를 수배할 수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하긴 동오가 상행을 떠날 당시.
타고 간 배가 고작 세 척에 불과했다.
아무것도 안 싣고 돌아와도 거기에 그 많은 인원을 태우는 것은 무리인 일이었다.
그가 데리고 돌아온 고려의 유민은 대부분 젊은 나이의 사람들이었는데 간혹 섞여 있는 나이 많은 이들은 대부분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는 올해 수확될 목화로 무명을 짤 수 있는 이와 베틀까지 가져온 상태였다.
“혹시라도 검은 점이 생긴 이는 없었느냐?”
“출항하기 전에 한 번 살피고 도착한 뒤에도 빼놓지 않고 살펴보았는데 그런 이는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원나라를 오갈 때는 선원들도 빼놓지 않고 살펴봐야 하느니라.”
“명심하겠사옵니다.”
고려에 흑사병이 퍼지는 경로 가운데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이 원나라를 오가는 상선이다.
당연히 벽란도에서도 엄격하게 통제했다.
하지만 고국에 돌아온 유민을 곧장 풀어줄 수는 없었다. 나라의 돈으로 사들인 것이기에 10년의 노역을 마치면 모두 양민으로 풀어주기로 했다.
그중에 10살 미만의 아이도 있었는데 부모가 양민이 되면 같이 면천을 해주기로 했다.
“군역을 자처하는 이들도 있사옵니다.”
“원나라에 대한 증오 때문인가?”
“그러하옵니다. 그들에게 복수를 할 수 있다면 죽을 자리라도 가리지 않고 뛰어들 이들입니다.”
“일단은 알겠네.”
이 자리에서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대신 원나라에서 데리고 온 이들 가운데 여자는 대부분 내수사와 가진에게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군역을 지겠다는 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광산으로 보내고 손재주가 좋은 이들은 연필을 만드는 진위로 보내라고 지시를 내렸다.
얼추 이야기가 끝나가기에 나는 다음 상행에 대해서 물었다.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지만, 다음 상행은 언제 떠날 예정인가?”
“보름 이내에 다시 갈 생각입니다.”
“이번에도 돌아올 때 자네의 이문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사람으로 데리고 왔으면 하네.”
“이미 왕후마마께서도 그리하라 저에게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해줘야 할 일이 있다.”
나는 그에게 사람 하나를 찾아오라 명했다.
당연히 내가 찾는 이는 주덕유의 친인척과 친구인 서달이었다. 돈만 쥐여주면 그런 일을 해줄 이가 넘쳐나기에 동오는 쉽게 받아들였다.
그쯤에서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자 동오는 할 말이 남았는지 다급하게 말을 이어갔다.
“소신이 절강 행성에서 만난 이가 있사온데 노비로 전락한 이들을 사들이는 일을 도와주고 이곳까지 직접 사람들을 태워주었습니다.”
“그것참 고마운 일이로구나. 과인이 어떤 보상을 해주면 좋겠느냐?”
“그게 아니옵고 전하를 뵙고 싶다하옵니다.”
“내 밑에서 일한다고 밝혔던 것이냐?”
벽란도에서는 동오가 내 밑에서 일한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알려지긴 했다.
그의 상단 사람이 곽충수와 가진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수없이 드나드니 모를 수 없었다.
그래도 대놓고 원나라에서 고려의 유민을 다시 데려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동오는 그런 것은 아니라며 다급하게 부정했다.
“절대 아닙니다. 제가 누구 아래서 일하고 있는지 밝힌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를 찾는단 말인가?”
“전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제 상단을 원나라로 보낸 실질적인 상단주를 찾는 것 같습니다.”
“상단에 관련된 것은 과인이 아니라 숙옹부로 가서 이야기하거라.”
“하오나 왕후마마께서 이번 일은 전하께서 맡아주셨으면 한다고 말씀하신 터라···”
진짜로 바지사장이 되려는 걸까.
가진은 상단 일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이름만 빌려주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상단보다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수공업 공장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이번에 새로 투입되는 인원이 적지 않았고 목화가 생산되는 것을 대비해서 무명을 만들기 위한 준비를 하느라 상당히 바쁘긴 했다.
“아마도 제가 다른 오르탁 상인처럼 왕실에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앞으로 많이 도움이 될 것이라며 먼저 접근을 해왔습니다.”
“허허. 당돌하기 짝이 없구나. 그자의 이름이 무엇이라고 하더냐.”
일단 이름이라도 들어볼 생각으로 묻자.
동오는 이번에 같이 벽란도까지 왔다던 그 자의 이름을 내게 밝혔다.
“오흥 출신의 심부(심만삼)라 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