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25
신소봉이 주덕유를 부르러 간 사이.
다른 내관을 불러 술상을 준비시켰다.
어차피 오늘 일과는 마무리된 상태였다.
평소 술을 즐겨 마시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내가 아닌 주덕유를 위한 상차림이었다.
하지만 주덕유가 곧장 오지는 않았다.
오늘은 근무가 아니기에 훈련장에 있었다.
내가 보낸 내관을 통해서 호출을 받고 급하게 달려오니 이미 사선서(司膳署)에서 정성껏 마련한 두 개의 술상이 내 앞에 놓여 있었다.
신소봉과 함께 안으로 들어온 그에게 나는 일단 자리부터 권했다.
“어서 와서 앉거라. 오늘은 과인과 술이나 한잔 하자꾸나.”
“어찌 감히 제가 전하와···”
“일단 앉으라니까.”
내가 손짓까지 하며 재촉하자.
주덕유는 마지 못해서 술상 앞에 앉았다.
어차피 겸상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나와 주덕유의 술상은 따로 차려져 있었다.
“오늘 과인이 특별히 부탁하니 사온서(司醞署)에서 아라길주(阿喇吉酒)를 내놓더구나.”
“향만 맡아도 좋은 것 같습니다.”
“일단 한잔 들거라.”
내가 먼저 잔을 들어서 단숨에 마시자.
목구멍이 불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아라길주는 희석식이 아니라 소주 본연의 모습인 증류식이라 도수가 강했다.
주덕유도 어디서 본 거는 있는지 조심스럽게 술잔을 들어서 손으로 잔을 가리면서 마셨다.
홀치로 있으며 배운 덕분이었다.
그곳에서 진행되는 예절과 충성에 대한 교육은 거의 세뇌 수준이었다. 그 탓인지 처음 그를 봤을 때와 비교하면 아예 다른 사람 같았다.
당시에는 상당히 거칠고 세상에 대한 불만이 가득해서 과연 고려로 데려와서 내 아래에 놓고 쓸 수 있을지 꽤 걱정되기는 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에 쌓은 공로를 생각하면 충분히 인정받을 만 했다.
이 자리도 그걸 위한 것이었다.
“나와 함께한 뒤로 항상 궂은 일만 시켜서 과인이 면구스럽구나.”
지난해 원나라에서 돌아올 때.
최유를 은밀하게 처단한 것부터 시작해서.
강화에서 왜구를 격퇴시켰을 때도 그가 있었고 임진정변에서는 기인걸을 잡아 공을 세웠다.
지금까지 그는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아직 그는 별장에 불과했다.
나 같아도 불만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 그는 아쉬운 소리를 한 번도 하지 않고 있었다. 역사서에 따르면 그의 성격은 의심이 많고 말년에는 피해망상 증상도 있었다.
30년 동안 처형한 신하만 10만 명에 달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곁에 두고 관찰한 현재의 주덕유는 아직 그런 모습이 전혀 없었다.
“아니옵니다. 저자거리를 굴러다니던 소신을 중하게 써주시는 것만으로 감사드립니다.”
만약에 자신이 황제가 될 운명이었음을 알게 된다면 고맙다는 말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술잔을 다시 채웠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고 되돌릴 생각도 없었다.
이왕에 주워왔으니 제대로 써먹을 생각이었다.
“고려에서 생활하면서 불편한 점은 없느냐?”
“많이 배려해주신 덕분에 전혀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하긴 내가 해준 것이 조금 많기는 했다.
원나라에서는 거렁뱅이로 살던 그였다.
하지만 이제는 개경 안에 번듯한 집까지 머물며 집안일을 해주는 사람까지 쓰고 있었다.
심지어 마당에는 한때 상당히 귀해서 부의 상징이라 여겨지는 포도나무도 심어져 있었다.
확실히 예전과 완전히 다른 삶이었다.
이제는 슬슬 그를 여기에 정착시키고 싶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주덕유를 제어할 수 있는 가족을 만들어놔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너도 이제 슬슬 혼인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
주덕유는 나보다 두 살이 더 많다.
올해 스물다섯이니 적지 않은 나이였다.
이 무렵의 고려는 조혼이 성행하고 있었다.
아직 원나라에 공녀를 차출하는 결혼도감(結婚都監)이 혁파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내가 슬쩍 그 이야기를 물어보자 주덕유는 잠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혹시 어울리지 않게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제 가족은 모두 굶어 죽거나 전염병에 걸려서 죽었사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도움을 받은 친척이 있기에 그들을 데려오고 싶습니다.”
“과인이 그건 생각지 못했구나. 근래에 소식을 들은 것은 있더냐?”
“전하를 따라나선 후에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사옵니다.”
“강남부터 시작해서 최근에 원나라가 꽤 혼란스러운데 상당히 걱정이 되겠구나.”
내 말에 주덕유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그를 향해 내가 친척을 데려올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하자 주덕유는 술잔에 코를 박을 기세로 허리를 숙여서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 정도쯤이야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야기가 그쪽으로 흐르자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기회에 어릴 적 동무를 데리고 와도 좋다. 능력이 있다면 출신을 가리지 않고 너와 같이 중히 쓸 것이다.”
그 말을 하자 주덕유는 잠시 고민했다.
어린 시절의 동무를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나는 숨죽여 기다리며 그가 적어도 한 명의 이름은 떠올려주길 바랐다. 얼마쯤 시간이 흐르자 주덕유는 조심스레 몇 명을 추천해줬다.
당연히 그중에는 내가 기대하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같이 목동 생활을 하던 서달과 탕화 그리고 주덕흥이라면 꽤 쓸만했던 거로 기억합니다.”
“그럼 이번 기회에 너희 친척과 함께 고려로 데려오면 되겠구나. 술 한 잔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으면 좋지 않겠느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내가 이름이 나오길 바랐던 이는 서달이다.
주덕유가 언급한 탕화는 지금쯤이면 홍건적에 가담했을 것이고 주덕흥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서달은 홍건적에 가입하는 계기가 주원장이기에 아직 고향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내가 그를 바라는 이유는 주원장 휘하에서 최고의 무관으로 있으며 북벌 총사령관으로 전선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처신도 현신한 편이었다.
다른 개국 공신이 주원장에게 죽어 나갈 때.
서달만큼은 권력과 재물에 욕심을 내지 않으며 고개를 숙인 탓에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 자라면 고려에 도움이 되면 되었지 해악을 끼치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굳이 지금까지 서달을 데려오지 않은 이유는 주덕유가 어느 정도 자리 잡을 필요가 있었다.
‘나 같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보장이 조금이라도 있어야지 따라서 이곳까지 오겠지.’
더구나 서달은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었다.
있으면 좋겠으나 없어도 상관은 없었다.
만약에 그가 주덕유 없이도 역사대로 자신의 능력을 펼친다면 그것 나름대로 원나라에게는 쉽지 않은 상대가 될 것이다.
어쨌든 현재 원나라에 있는 어용상인 동오를 통해서 데리고 올 수 있도록 손 쓸 생각이었다.
그쯤에서 나는 슬슬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라길주가 너무 독해서 더 미룰 수 없었다.
취하기 전에 일단 용무부터 해결해야 했다.
“오늘부로 너는 새로 창설된 해군의 중랑장으로 제수하고 강화에서 나포한 왜선을 앞으로 이끌게 될 것이다.”
“저는 바다에서 싸우는 법을 전혀 모릅니다.”
“이제부터 배우면 되지 않느냐. 설마 너도 다른 이들처럼 물이 무서워서 그러는 것이냐?”
“절대 아니옵니다!”
주덕유는 펄쩍 뛰면서 절대 그런 게 아니라며 손을 휘저었다. 하여간 자존심 하나는 알아줘야 하는 인물이었다.
“아직 이곳에서도 배울 게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 당분간 홀치로 있으면 아니 되옵니까?”
나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이미 임진정변이 끝난 상태였다.
계속 내 곁에 장수를 끼고 있을 수 없었다.
지금은 앞으로 다가올 수없이 많은 전투를 대비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시간밖에 없었다.
최영도 방호사(防護使)로 제수하여 전라도와 경상도의 해안 방어를 위해 보낼 생각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 그제야 주덕유는 어느 정도 납득을 하는 것 같았다.
“당장은 실전에 투입되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 1년 정도는 해군원수가 된 김휘남의 밑에서 해전에 대해서 배우거라.”
“어명을 따르겠사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명심하거라. 그에게 모든 것을 배우되 그게 전부라 여기진 말 거라.”
“소신이 불민하여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잠시 생각을 정리한 나는 최대한 쉽게 앞으로 그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내가 주덕유에게 바라는 것은 김휘남처럼 연안에서 왜구를 소탕하는 것이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멀리 원양까지 나가서 미리 접근을 차단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그래서 왜선을 모두 그에게 배치해 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선단의 규모가 너무 작다는 것을 주덕유가 슬쩍 지적하자 나는 해결책을 알려주었다.
“최대한 왜구의 배를 나포하면 되지 않겠는가.”
사료에 적힌 왜구의 기록은 많지만,
모든 일을 다 적을 수는 없는 일이다.
적어도 수십 척은 되어야지 기록되는데 서너 척 정도에 불과한 작은 규모도 분명히 있었다.
당장 며칠 전만 하더라도 전라도에 네 척의 배가 들어와서 마을 몇 곳을 박살 내고 갔다.
불과 백여 명에 불과했으나 그들을 막을 수 있는 병력도 없었고 막상 가보면 배를 타고 먼 바다로 유유히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말이 쉽지 왜선의 나포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상당히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너에게 무엇이 필요하겠느냐?”
“속도라 생각되옵니다.”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먼 훗날에 ‘낄끼빠빠’라는 말이 있는데 낄 때 끼고 빠질 때는 빠져야 하는 센스가 필요했다.
감당이 되지 않는 대규모 선단은 최대한 피하고 소규모 왜선을 노려야 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속도가 빨라야 한다.
굼벵이처럼 느린 고려의 전선으로는 불가능한 작전이었고 왜선은 원양 항해도 가능하니 장점을 활용해서 개조까지 염두에 둬야 했다.
그쯤에서 옆에 있던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하얀 천이 곱게 개어져 있었다.
그걸 꺼내서 주덕유에게 내밀자 이게 뭐나며 궁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앞으로 네가 쓸 부대의 대장기(大將旗)이다. 한 번 펼쳐서 확인해 보거라.”
주덕유는 그걸 조심스레 펼쳐봤다.
상당히 상기된 표정이었는데 그럴 만 했다.
조금 전에 중랑장이 된 그에게 자신만의 아기(牙旗)가 생긴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더구나 임금인 내가 직접 내려주는 것이기에 더 큰 의미가 있는데 디자인과 드로잉까지 내가 했다는 것을 알면 도대체 무슨 표정을 지을까.
그러는 사이에 주덕유는 대장기를 펼쳤다.
거기에 그려진 것은 눈이 부리부리한 귀면문(鬼面文)이었는데 흔하게 볼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 시대의 귀면문과 달리 최대한 단순하게 다시 그린 그림이기 때문이었다. 엄청나게 정성을 들인 형태는 아니었으나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은 문양이었다.
“마음에 드느냐?”
“상당히 강렬한 느낌이 들어서 좋습니다.”
“앞으로 이 깃발만 봐도 왜구가 꽁무니 빠지게 도망갈 수 있도록 할 수 있겠느냐?”
주덕유는 무척 흡족한 눈빛이었다.
상상만 해도 희열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세운 계획의 전부는 아니었다.
나는 조금 더 멀리 보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에 그가 내가 기대하고 있는 것들을 만족시킬 수 있다면 언젠가는 주덕유의 함대를 보내서 일본을 탈탈 털어올 생각이었다.
잘만 된다면 원나라를 털고 돌아가는 왜구를 중간에서 탈취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왜구들이 하는 짓을 그대로 갚아준다.’
그게 나의 최종적인 계획이었다.
주덕유는 앞으로 사략 함대를 이끌 것이다.
노역으로 써야 하는 인력은 되도록 왜구로 채우고 구리와 유황 그리고 은 같은 것도 일본에서 다 쓸어올 생각이다.
하지만 거기까지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적어도 그가 배를 이끌고 일본 원정을 나서기 전에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그의 친척과 가족 그리고 친구까지 모두 확보를 해놔야 했다.
그런 나의 생각은 전혀 모른 채 계속해서 대장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도 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덕유는 곧장 엎드려서 다짐을 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이뤄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