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24
변안열에게 내가 한 약속.
그것은 무예 도감의 설치였다.
원나라에서 귀국하며 의기투합했을 당시.
고려로 돌아가면 군사 훈련과 전술 개선을 위해서 도감(都監)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보통 도감이라 함은 중요한 문제를 관장하기 위해서 만드는 임시적인 관서라 할 수 있다.
당연히 변안열도 곧장 알아들었다.
“전에 논하셨던 훈련도감이 맞사옵니까?”
변안열은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
이듬해에 약관이 되는 어린 나이였지만, 그가 꾸고 있는 꿈은 상당히 원대한 편이었다.
자신에게 권한이 주어진다면 대륙에서 최고로 강한 군대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당연히 그만한 실력도 분명히 있었다.
누군가는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고 말할지 몰라도 그런 거는 시간이 알아서 채워줄 것이다.
더구나 이 시대는 평화롭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실전 경험을 쌓을 곳은 많았다.
“다만, 홀치에 소속된 자리는 지키고 계시오.”
“겸직을 하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앞으로 훈련도감에 참가하는 다른 장수들도 겸직으로 둘 것이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 일을 믿고 맡길 만한 이가 별로 없다.
이 무렵의 고려는 겸직을 허용해주는 터라 크게 문제 될만한 사항은 아니었다. 더구나 머릿속에 생각만 가지고 완성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실제로 병사에게 이론을 적용해봐야 한다.
그럴 때마다 매번 다른 장수가 거느린 병사를 차출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그 이야기를 해주자 변안열도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다.
“혹시 염두에 두고 있는 이가 있소? 전술과 책략에 밝은 이면 더 좋을 것이오.”
변안열의 사람 보는 눈은 어떨까.
그게 궁금해서 일단 그의 의견을 물어봤다.
고려에 온 지 몇 개월 안 되었기에 아직 그가 접한 무관이 그리 많지는 않았으니 그건 어느 정도 감안은 해야 할 것 같았다.
내 질문에 그는 염두에 둔 이들이 있었는지 곧장 몇 명의 무관의 이름을 언급했다.
“가장 필요한 이는 최영과 최무선이옵니다.”
“최영은 그렇다고 쳐도 최무선은 왜 필요한가?”
“강화에서 왜구와 싸웠을 때처럼 앞으로 화포가 상당히 중요해질 것으로 보입니다.”
“나도 동의하는 바일세. 설마 그들이 전부는 아니겠지?”
변안열은 그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원림 외에도 젊은 무관과 노련한 장수 몇 명을 적절하게 안배하여 내게 언급했다.
대충 십여 명은 되는 것 같았는데 그중에 지방으로 발령받은 상태거나 문제가 조금 있는 이들을 제외하니 아홉 명으로 압축되었다.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앞으로 닷새에 한 번은 훈련도감에 모여서 훈련과 전술에 대하여 논의하시오.”
당연히 나도 종종 참여할 거라 밝히자.
변안열은 오히려 무척이나 반기는 얼굴이었다.
평소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동서양의 전술과 군대에 대해서 내가 기억하는 것들을 슬쩍 흘려주고는 했는데 그걸 무척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제식 훈련을 통한 진형의 유지였고 그게 현재 그가 구상해냈던 소규모 전술로 발전했다.
“당연히 홍귀도 이제는 훈련도감에 귀속될 것이오. 그러니 그들의 양성도 담당해야 하오.”
“명심하겠사옵니다. 전하께서는 어느 정도 숫자까지 염두에 두고 계신지요?”
“오십 명은 넘지 않아야 할 것이오.”
변안열은 너무 적은 것이 아닌가 걱정했다.
그러나 군대가 남아 있지 않은 고려에서 그 이상은 잉여였고 홍귀는 양성이 쉬웠다.
몇 개월 정도 죽도록 굴려주면 알아서 몸에 익게 되니 걱정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급하면 기존에 제식 훈련을 받은 이를 활용해도 된다.
아마 조교를 하라고 하면 다들 반길 거다.
자신이 당한 만큼 되돌려주려 하는 마음은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은 다들 가지고 있다.
그걸 언급하자 변안열은 살짝 웃음 지었다.
“확실히 그럴 것 같사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수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는 뽑지 않으시오?”
“배 위에서 싸우는 방식은 물론이고 구조도 완전히 다릅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그쪽은 전혀 모르기에 엄두가 안 납니다. 그러니 다른 적임자가 있을 것이라 생각되옵니다.”
자신이 없다는 말은 하기 어려웠겠지만,
변안열이 그렇게 나올 만한 이유가 있었다.
뭍에서 아무리 날고뛰는 정예병이라도 배를 전문적으로 타는 이들에게는 상대가 안 된다.
중심을 잡는 것도 힘들고 전술도 다르다.
그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자신 있는 것을 최우선에 두고 싶었던 것 같았다.
나도 그 생각에는 동의했다.
‘그러면 도대체 누구에게 맡겨야 할까?’
*
변안열에게 훈련도감을 맡긴 뒤.
나의 고민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다.
바다를 지킨다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육지를 지키는 병사보다 더 육성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수군이다. 하지만 이 시대의 고려는 정식으로 편성된 해상 병력조차 없었다.
지방의 수군을 지휘하는 도부서(都部署)도 사라진 지 오래됐다. 임시로 김휘남을 포왜사로 두기는 했으나 아직 부족함이 많았다.
건국 당시에 강력한 해상 세력을 밑바탕으로 일궈진 고려는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이었다.
손봐야 할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하기도 어려움이 있었다.
아직은 원나라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다.
왜구의 수탈을 핑계로 대려면 그만큼 피해를 보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는 싫었다.
그렇다며 지금 해야 하는 것은 뭘까.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가장 시급한 것은 전선의 개발이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화포용 전선(戰船)이다.
기존에 강화에서 왜구에게 화포를 쏠 당시.
배의 선수(船首)에 화포를 달아서 다행이지 옆면에 배치했으면 뒤집혀 졌을 것이다.
적어도 측면에서 화포를 쏴도 버틸 수 있는 배가 필요했다. 당연히 최무선도 훗날 그런 문제를 인지하고 누전선을 만들게 된다.
누전선(樓戰船)의 특징은 바닥이다.
평평한 배의 바닥에는 돌로 채우는데 그 덕분에 어느 정도 기울어도 복구가 가능하다.
더구나 갯벌 위에 배를 대도 넘어지지 않는다.
서해안에서 활동하기에는 V자 형태를 가지는 첨저선보다 누전선이 가지는 장점이 많았다.
하지만 내가 꿈꾸는 것은 판옥선이었다.
‘그 정도는 되어야 싸울 만 하지.’
누전선과 판옥선의 차이는 뭘까.
일단은 배의 설계부터 완전히 달랐다.
누전선은 갑판이 하나인 일반적인 구조지만, 판옥선은 그 위에 다시 상장갑판을 설치한다.
당연히 상당히 높은 위치를 차지하니 왜구가 흔히 사용하는 보딩 전술도 방어가 가능하고 화포를 쏘는 각도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심지어 배에 난입해도 비전투원인 노군은 노출되지 않으니 피해도 적게 발생했다.
노군의 수가 많이 필요하고 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조선에서 판옥선을 주력 함선으로 사용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이렇게 생겼던가?”
그때부터는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판옥선의 구조는 그리 복잡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설계도를 그리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그리 큰 부담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대략적인 형태만 잡아주면 나머지는 이 시대의 기술자가 알아서 해결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조선 기술은 아직 괜찮았다.
불과 72년 전만 하더라도 고려는 4~5개월 만에 900척의 배를 만들어낼 정도였다.
물론, 4만 명에 달하는 노역의 결과였으나 그 덕분에 조선 기술이 상당히 발전되기도 했다.
안 써먹어서 문제지 기술이 없는 게 아니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판옥선과 누전선의 설계도가 나왔다.
연필로 몇 척의 배를 그린 지 셀 수 없었다.
그쯤 되자 포왜사 김휘남을 궁궐로 불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적임자는 그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선을 이끌고 전라도에 내려가 있는 상태라 그가 궁궐로 돌아온 것은 며칠 뒤였다.
보평청으로 들어온 그를 보는 순간.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닌가 착각을 했다.
불과 한 달 만에 김휘남의 얼굴은 검게 탔는데 동남아 사람을 보는 느낌이었다. 아마 바닷물에 반사되는 햇볕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선크림을 사주고 싶었으나 이 시대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대신 상당히 품질이 좋은 차를 신소봉을 시켜서 내왔다.
다행히 김휘남은 무척 흡족한 표정이었다.
“요즘 왜구들의 동태는 어떠한가?”
“소신이 내려가 있던 달포 동안은 서너 척 미만의 작은 규모만 보이고 있사옵니다.”
“언제 대규모 선단을 몰고 올지 모르니 포왜사도 단단히 대비해야 하오.”
“명심하겠사옵니다. 허나 소신에게 주어진 배는 고작 쉰 척이 되지 않사옵니다.”
그 점을 강조하며 지난해의 일을 언급했다.
괜히 여기서 맡겨만 달라고 떵떵거렸다가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자연도와 삼목도에 침구한 백여 척의 규모가 다시 몰려오면 아무리 화포가 있더라도 막아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현재 최무선에 의해 화약이 생산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소량에 불과한 상태라 몇 번 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김휘남은 지는 싸움을 시작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기는 했지.’
역사에 기록된 얼마 안 되는 내용을 보건대.
김휘남은 가능하면 이길 수 있을 때만 싸웠다.
누군가는 비겁하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병력의 손실을 최소화하는 것도 분명히 실력이었다.
조선 시대의 누군가처럼 막무가내로 돌진하다가 아까운 수군과 전선을 모두 바닷속으로 처박아버리는 것보다 훨씬 현명했다.
“과인도 그 부분은 염두에 두고 있소. 강화에서 포획한 왜구의 배는 어떻게 되었소?”
“암초가 많은 연안을 운행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나 속도가 빠르기에 먼바다에서 초계(哨戒)용으로 쓰게끔 준비 중이옵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걸 들으려고 부른 것은 아니었다.
이쯤에서 본론으로 들어가 그에게 새롭게 주어진 직책을 알려주었다.
“과인이 그대를 부른 이유는 해군원수(海軍元帥)로 명하기 위해서요.”
김휘남은 그걸 곧장 알아듣지는 못했다.
일단 원수라니 높은 자리인 것은 알았으나 해군이라는 단어는 이 시대에 사용하지 않았다.
나는 그걸 쉽게 풀어서 바다 위에서 싸우는 병사들의 총지휘관이라고 설명을 해줬다.
이미 최고 정무 기관인 도평의사사에서 이야기가 끝났으며 앞으로 이끌 병사는 해군이라고 부를 거라고 첨언을 해주었다.
그걸 듣자 그는 자리에서 넙죽 엎드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아직은 허울 뿐에 불과한 조직이지만,
시간을 두고 계속 덩치를 키울 생각이다.
머지않아 병마사보다 운용 가능한 병사의 수가 더 많아질 가능성이 있는 직위를 준 것이다.
그를 그 자리에 앉히며 훈련도감의 예를 들어 해전에서 사용하는 전술 개선과 해군의 훈련을 위해 힘써야 한다는 말은 잊지 않고 해줬다.
명예만큼이나 의무도 상당히 크다는 것을 상기 시켜 줘야 했는데 그를 부른 진짜 이유는 이제부터였다.
“해군원수에게 내리는 첫 임무는 새로운 군선을 조선(造船)하여 바다를 지키는 것이오.”
김휘남은 자신이 원수가 된 것보다.
새로운 전선을 만든다는 말에 더 기뻐했다.
누구보다 이 순간을 애타게 기다리던 그였다.
처음에 포왜사의 관직을 받았을 때는 조금 원망스러웠으나 지난번의 강화에서 그는 상당히 큰 감명을 받은 상태였다.
대열을 이룬 배에서 쏘는 화포.
상상만 해도 희열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는 말을 타고 싸우는 것은 상상도 안 될 정도였는데 문제는 화포를 싣고 싸울 수 있는 배가 현재로는 그리 마땅한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김휘남은 정작 몇 대나 건조하는 건지 듣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 올해는 다섯 척의 배를 조선할 생각이오.”
내가 지시한 숫자가 너무 적었던 걸까.
김휘남은 살짝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내 눈에는 그게 고스란히 보였다. 하지만 새로운 배를 만들 생각이라 다섯 척도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나는 일단 직접 그린 설계도를 건넸다.
그걸 본 김휘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까지의 상식이 완전히 깨진 느낌이었다.
잠시 배의 설계를 바라보던 김휘남은 굳이 내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2층 건물처럼 배를 만들 경우에 얻는 장점을 금방 알아차렸다.
하지만 어림짐작하게 할 수 없기에 나는 자세히 이번에 만들 배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이 배의 단점은 무어라 생각하시오?”
“아무래도 노를 젓는 이들의 수가 너무 많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현재 운용하는 전선은 크기가 작아서 한 척에 서른 명에서 많아야 쉰 명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정도의 크기면··· 적어도 백 명이 필요할 것 같사옵니다.”
“전투 병력까지 포함하면 백오십 명이오.”
거기서 더 늘어날 수도 있었다.
그걸 들은 김휘남의 표정은 복잡해졌다.
배가 문제가 아니라 거기 태울 이들을 어떻게 찾느냐도 꽤 심각한 문제였다. 바다에서 노를 젓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고된 일이다.
이 무렵의 사람들은 바다는 왜구와 풍랑으로 인해 두려움의 대상에 가까웠기에 배를 타려 하는 이들은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단순히 해안가에 산다는 이유로 차출하기도 조금 애매한 구석이 많았다. 죽을지도 모르는 사지에 끌려가는데 다른 이들과 똑같이 공물도 내야 하니 삶이 두 배쯤 더 팍팍해진다.
“해군에 복무하는 이들은 공물을 부과하지 않도록 조치를 해주겠소.”
그 이상은 나도 혜택을 주기 애매했다.
연필 등을 팔아서 이제 조금씩 생기기 시작한 재물은 모두 배를 건조하는 비용으로 쓸 거다.
그마저도 없었다면 엄두도 안 났을 것이다.
중요한 이야기는 얼추 끝났기에 마지막으로 김휘남에게 지시 하나를 내렸다.
“초계용으로 쓰는 배는 제외하고 나머지 왜선은 내가 임명하는 자에게 넘기시오.”
“누구인지 여쭤봐도 되겠사옵니까?”
“홀치 별장인 주덕유라 하오.”
김휘남은 그 지시에 곧장 따랐다.
어차피 지금 그의 관심은 새로 만들어질 배에 꽂혀 있었기에 화포도 제대로 쓸 수 없는 왜선은 모조리 넘겨줘도 불만이 전혀 없었다.
잠시 후에 해군 원수로 제수된 김휘남이 자리에서 물러서자 나는 곧장 신소봉을 불렀다.
“가서 주덕유를 불러오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