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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23화 (23/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23

연등회를 마치고 얼마 뒤.

개경 시전의 상점 세 곳이 닫혔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다들 신경 쓰지 않았다.

경시서에서 민간에 허용해주는 관허 상점도 아니고 관영 상점이기 때문이었다.

조금 아쉬워하는 이들도 있기는 했는데 술맛이 좋기로 유명한 주점도 포함되어 있던 탓이다.

그리고 며칠이 더 지난 뒤.

세 개의 상점은 동시에 장사를 시작했다.

그제야 상인들은 의아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시전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도 도대체 다시 열린 상점에서 뭘 팔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한 곳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물건을 쌓고 있었고 다른 쪽은 종이만 보였다.

그걸 본 상인들은 지전(紙廛)으로 오해했다.

“아니 바로 위에 종이를 파는 두 곳이나 있는데 여기에 지전을 왜 또 만드는 거야?”

“누가 또 뇌물을 거하게 줬나 보지.”

“쯧쯧. 하여간 있는 놈들이 더 하다니까.”

“그런데 저기 쌓여 있는 시커먼 것은 도대체 어디에 쓰는 건가? 숯은 아닌 거 같은데.”

“난들 알겠는가.”

사람들이 쑥덕거리는 사이.

한 무리의 남자들이 뭔가를 들고 왔다.

그들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나무판자였다.

그 위에는 한지를 덧발라 놓고 뭔가를 그려 놓았는데 누가봐도 상점 산에 물건과 흡사했다.

그림 아래에는 연탄과 연필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그게 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시대를 앞서가는 입간판은 꽤 생소했다.

시전에 있는 상점은 간판도 흔하지 않았는데 현판처럼 위에 걸어 놓는 것이 전부였다.

대부분 진열해 놓은 물건만 봐도 뭘 파는 곳인지 뻔히 알기에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확실히 효과가 있기는 했다

도대체 뭘 파는 곳인지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데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력한 한 방은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였다.

치이익···

한 번씩 생선을 뒤집을 때마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소리는 덤이었다.

생선구이는 벽돌 모양의 연탄 4장을 두 겹으로 쌓아서 그 위에 올려진 철판에서 굽고 있었다.

아직 석쇠라 말하기는 민망할 정도로 굵고 투박한 형태였으니 차라리 철판에 구멍이 뚫린 형태라 보는 것이 더 적당할 것 같았다.

그래도 생선을 구울 정도의 수준은 되었다.

안 그래도 슬슬 식사를 할 때였다.

주변을 지나던 이들은 다들 배가 요동치기 시작했는지 주변 상인은 물론이고 지나가던 이들마저 하나둘 멈춰서 주점에 눈길을 뒀다.

시전에 있는 주점은 수가 꽤 많았으나 이렇게 생선을 구워서 파는 곳은 아직 본 적이 없었다.

그쯤 되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한 무리의 남자들이 주점으로 들어섰다.

“여보시오. 이곳은 뭐 하는 곳이요?”

“저기 걸어놓은 깃발 안 보이시나요. 당연히 주점이지 뭐겠어요. 생선구이에 탁주 한 사발 하고 가시지요.”

“그런데 그건 생김새로 보면 숯은 확실히 아닌 거 같은데 도대체 뭔가?”

“연탄이라는 물건인데 이게 한 번 불붙으면 숯보다 더 오래 가서 좋아요.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일단 앉으시어요.”

주모는 넉살 좋게 사람들을 맞이했다.

이 장사를 한 지 벌써 스무 해가 넘어간다.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은 이미 이골이 났다.

도대체 뭐 하는 건지 궁금해서 온 이들도 그렇게 한두 사람씩 앉기 시작하니 주점은 가득 찼다.

그리고 방금 구워낸 생선을 접시에 담아서 술과 함께 내놓았다.

“냄새가 참 좋구나.”

가장 먼저 들어온 남자들은 코를 킁킁거리며 갈색빛으로 구워진 생선의 냄새를 맡았다.

형태를 봐서는 보락(甫鮥, 볼락)인 것 같아 보였는데 먹음직스러운 모습에 그들은 참지 못하고 젓가락으로 살점을 떼어내 입에 넣었다.

그러더니 이내 그들을 쉴 틈도 없이 생선구이와 함께 탁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숯으로 구워 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다고 말하기는 힘들었으나 확실히 조금 색달랐다.

더구나 이 시대에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 석쇠 사이로 떨어진 기름의 훈연 효과는 상당했다.

넓적한 솥뚜껑 같은 곳에서 굽거나 꼬치에 꿰어서 굽는 것과는 또 다른 맛이었다.

“이거 참 너무 맛있구려!”

“주모, 여기 탁주 하나 더 주시오.”

“술이 쭉쭉 들어가는구나.”

그들의 목소리는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지나가는 이들이 돌아보며 낮술을 하는 그들을 향해 혀를 찰 정도였는데 오히려 그게 홍보가 되었던 것 같았다. 조금 뒤늦게 들어온 이들도 생선을 주문하니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연탄에 대해 묻는 이들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주모는 아주 친절하게 연탄의 좋은 점을 알려주면서 옆에 있는 가게를 가리켰다.

그 가게 위에는 9공탄이 그려져 있었다.

앞으로 연탄을 판매할 상점인데 가격이 땔감보다 조금 더 비싼 것이 단점이었다.

더구나 날도 어느 정도 풀렸기에 사람들의 관심을 그리 많이 끌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에 처음으로 주점에 들어온 이들이 다급하게 주모를 불렀다.

“이보시오. 급하게 서신을 보낼 게 있어서 그러니 먹과 벼루 좀 빌려주오. 값은 후하게 쳐주겠네.”

“주점에서 별 거를 다 찾으시네. 그냥 이걸로 쓰시지요.”

주모는 주머니에서 연필을 꺼냈다.

갑자기 나무 막대기 하나를 쥐여주니 그 남자들은 물론이고 다른 손님들도 의아하게 주모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정신이 나간 건가 의심하는 이들조차 있을 정도였다.

그런 눈빛을 알아챈 주모는 버럭 화를 냈다.

“아니, 사람을 뭐로 보는 거예요? 이걸로 쓰면 된다니까.”

“자네 나랑 장난하는 건가?”

“사람 말을 정말 못 믿으시네요. 이거는 먹물 없이도 글을 쓸 수 있는 물건이라니까요.”

“예끼 이 사람아. 도대체 그런 게 이 세상 어디 있단 말인가.”

“진짜라니까요. 아효··· 답답해. 이리 내봐요.”

주모는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쳤다.

그러더니 자신이 건네주었던 연필을 낚아채서 종이 위에서 뭔가를 열심히 쓰기 시작했다.

글을 깨우친 주모가 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그보다 사람들이 더 놀라는 것은 그녀의 손에서 쓰여지는 글씨였다.

종이 위에 쓰이는 것은 <가시리>라는 가요의 가사였는데 마지막 글자를 쓸 때까지 먹물 한 방울 묻히지 않았는데도 정말 글이 쓰여졌다.

그제야 주모는 연필을 내려놓고 자신이 쓴 <가시리>를 간드러지게 한 곡조 뽑았다.

“가시렵니까, 가시렵니까, 저는 어찌 살아가라고 가시렵니까. 붙잡아 두고 싶지만, 다시 오지 않을까 두려워, 서운한 님 보내오니, 가시는 즉시 돌아오소서.”

노래도 정말 간드러지게 잘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그녀의 노랫가락보다 손에 쥐어져 있는 연필에 쏠려 있었다.

누군가는 도술을 부린 것이 아니냐고 할 정도였는데 상인들 대부분은 그게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 건지 금방 알아차렸다.

그제야 붓을 빌려달라고 하던 이들도 주모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여보시오. 그건 도대체 어디서 난 건가.”

“아··· 이거요. 바로 옆에 있는 저 상점에서 오늘부터 판매하니 가서 물어보시지요.”

“그렇단 말이지. 여보게들 어서 일어나세.”

그들은 다급하게 일어나 옆 가게로 향했다.

그리고는 얼마 후에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연필 한 움큼씩 쥐고 상점에서 나왔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뒤를 따랐는데 순식간에 연필 상점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한동안 반대편의 찻집에서 지켜보고 서 있던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서 곽충수를 바라봤다.

“연필에 비해서 아직 연탄의 반응은 생각보다 그리 좋진 않군요.”

“아무래도 날이 풀린 탓에 관심이 덜한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거라 생각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시전 앞으로 미복잠행을 나온 터라.

곽충수는 적절한 선에서 예의를 지켰다.

나도 그의 말에 동의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어차피 연탄은 당장 대량으로 만들어 판매를 하는 것도 조금 어려웠다. 아직 흑토를 캐는 광산은 준비 단계에 불과한 상태였다.

그나마 포로로 사로잡은 왜구와 역적의 죄를 지은 이들이 노역을 하는 중이라 추위가 오기 전에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몇 명의 사람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내가 직접 그려준 입간판을 지나서 연탄을 파는 상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연탄을 판매할 때 주의 사항을 말해주는 것은 잊지 않았겠지요?”

“물론입니다. 밀폐된 방안에서 피우는 것은 절대 안 된다고 최소 서너 번은 말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전수도 계속 신경을 써줘야 합니다.”

“지시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연탄의 가장 큰 단점은 일산화탄소이다.

하지만 숯이라고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아궁이에 들어가 연소되면 자연스럽게 생기게 되는 것이니 기존의 장작을 대체한다고 죽는 이가 크게 늘어나진 않을 거다.

더구나 이 무렵에는 통구들도 널리 퍼지고 있는 상황이라 서서히 고려의 입식 문화가 좌식 문화로 넘어가는 시기라고 볼 수 있었다.

그때 다점(茶店)의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것은 아까 주점에서 주모에게 먹과 벼루를 빌려달라고 했던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주저했다.

다점 안에는 나와 곽충수 외에도 홀치가 거의 대부분의 좌석을 차지하고 노려보고 있었다.

허튼짓을 하면 곧장 베어버릴 기세였다.

덕분에 그들은 상당히 긴장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는 다른 이들과 달리 웃는 얼굴로 내게 다가와 깊숙하게 허리를 숙이며 조아렸다.

“시키신 대로 했는데 괜찮았습니까?”

그들의 정체는 우인(優人)이라고도 불리는 일종의 연극배우인 잡극기인(雜劇伎人)이었다.

궁궐에 있는 대악서나 관현방 등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민간의 배우라 나를 권문세족의 돈 많은 도련님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조금 전에 일어난 모든 일은 내가 그들에게 시킨 일이었는데 연필이 뭔지 직접 활용도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 벌인 일이었다.

적어도 뭔지 알아야 사람들이 살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데 생각보다 그들은 바람잡이 역할을 능청맞게도 잘 해주었다.

“기대 이상이더구나. 옜다. 이거는 기분이니 가져가거라.”

나는 품에서 원 보초를 꺼내 쥐여줬다.

가치가 아무리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아직 고려에서는 어느 정도 사용이 가능했다.

적어도 쌀 두어 섬은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이라 그들은 크게 기뻐하며 엎드려 절이라도 할 기세로 허리를 깊숙하게 숙였다.

“감사하옵니다. 나으리.”

“생선구이 맛은 괜찮았느냐.”

“지금까지 먹어봤던 생선구이 중에 가장 맛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꽤 괜찮았사옵니다.”

“솔직해서 좋구나.”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주모를 섭외하고 며칠 동안 요리와 접대를 훈련시켰으나 아직 미숙한 점이 많았다.

그래도 쇼호스트로 세워둔 보람은 있었는지 연탄과 연필에 흥미를 느끼고 기웃거리는 이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잠시 상점 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지켜보고 있자 곽충수는 어정쩡하게 서 있던 우인들에게 이제 가보라며 손짓했다.

“소인들은 그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들이 찻집을 나가자.

나도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은 문제없이 판매가 시작되었다.

어차피 나머지는 곽충수가 알아서 할 것이다.

연탄은 겨울이 올 때까지 안 팔리더라도 계속 생산을 해놓으면 될 일이고, 연필은 수요가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개량하는 부분만 챙겨주면 될 것 같았다.

그럼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끝에 나는 궁궐로 돌아가서 홀치의 훈련을 봐주고 있던 변안열을 불렀다.

그는 반 시진 정도 후에 궁궐에 들어왔는데 훈련을 얼마나 격하게 했는지 먼지투성이였다.

오죽하면 신소봉이 저포로 만든 수건에 물을 묻혀서 그에게 건네줬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쉬엄쉬엄하시오.”

“이제 날이 따뜻해졌으니 본격적으로 훈련할 시기이옵니다.”

“하긴 심양은 이곳보다 꽤 춥지 않소.”

“전하가 소신을 거둬주신 덕분에 지난겨울은 따뜻하게 잘 지냈사옵니다.”

모처럼 따로 자리를 마련한 터라.

나와 변안열은 이런저런 할 이야기가 많았는데 신소봉이 차를 들여오자 그쯤에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과인이 했던 약조를 이제 지키려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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