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22
곽충수는 생각보다 꽤 유능했다.
일단 사람을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상당히 과중한 일을 주었는데 막힘이 없었다.
적재적소에 필요한 이를 배치해서 효율성 높게 일하는 이는 이 시대에 그리 흔하지 않았다.
아직 이 시대의 DNA에는 ‘빠르지만, 정확하게’ 일하는 것이 입력되어 있지 않은 느낌이었다.
거리상 멀리 떨어진 간성과 익령의 흑토는 도달하려면 멀었으나 양광도 진위에서 찾아낸 석묵은 곧장 계정골로 옮겨졌다.
하지만 연필을 만드는 것이 쉽진 않았다.
완성품을 써봤을 뿐이지 이걸 직접 만들어 볼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다. 당연히 그 과정은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흑연을 곱게 파쇄하는 것과 비율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적당한 점토를 구하는 것과 나무틀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군기감에서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한 장인 몇 명을 계정골로 은밀하게 빼돌려야 했다.
목장(木匠)은 연필심을 감쌀 나무틀을 만들고 송진과 아교를 다루는 아교장(阿膠匠)과 가마의 온도를 맞출 자기소(磁器所)의 장인도 합류했다.
확실히 최고의 장인은 뭔가 다르긴 했다.
그들은 문제점을 하나씩 해결해 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최적의 조합 비율과 생산 방식도 찾아냈다. 시간이 흘러 초파일이 되자 드디어 시제품 소식이 들려왔다.
‘하필이면 오늘이라니.’
당장 계정골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오늘은 석가탄신일이라 그게 어려웠다.
불교가 뿌리 깊게 내려 있는 고려에서 석탄일은 상당히 중요한 날이었는데 경사스러운 날을 맞이하여 궁궐에서 연등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집어치우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기존에 연등회가 없던 것은 아니다.
신라 진흥왕 시절에 시작된 연등회는 팔관회와 함께 고려에서 진행되는 국가적인 행사다.
하지만 작년까지 2월 보름에 진행되던 것을 올해부터는 석탄일로 시기가 바뀌었다.
음력 4월 8일 연등은 훗날이 되면 유네스코에 등재되는데 올해가 그 시작점이자 내가 즉위하고 처음 열리는 국가적인 행사라 빠질 수 없었다.
덕분에 시제품 확인은 잠시 뒤로 미뤄야 했다.
대신 원래의 연등회보다 규모는 작아졌다.
공민왕은 무려 승려 백 명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불꽃놀이와 기생의 가무까지 벌였다.
하지만 나는 훗날 왕사가 되는 보우를 비롯해 고승 몇 명을 초대하는 거로 끝냈고 강화에서 화약을 다 써서 불꽃놀이도 진행할 수 없었다.
당연히 기생과 가악도 궁궐에 들어오지 않았다.
피, 땀, 눈물을 모아서 만든 재물을 연등회 같은 곳에 다 써버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홀대할 수도 없었다.
국회의원이 종교 단체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듯이 나도 불교가 가진 힘을 무시할 수 없다.
완전히 그쪽에 심취하지도 배척하지도 않고 적절하게 거리를 두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그래서 몸으로 때우려고 행사에 참가해서 이리저리 얼굴을 비추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을 보고 무척 반기는 이들도 있었는데 대부분 이제현과 이색 같은 유학자들이었다.
이 무렵에 이색은 시사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이미 중이 된 자에게는 도첩(度牒)을 주고 도첩이 없는 자는 즉시 군대에 충당하고, 새로 창건된 사찰은 모조리 철거하며 철거하지 않는 절이 있으면 즉시 수령(守令)을 벌하여 주옵소서···(중략)··· 부처란 지극히 거룩하고 지극히 공평하여 대우하기를 몹시 박하게 하더라도 노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중략)···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라’ 하였으니, 신은 원컨대 부처에게도 또한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합니다.]
도첩제는 나도 관심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급발진할 문제는 아니었다.
이색이 가지고 있는 불교에 대한 극혐 만큼이나 나도 유교에 대한 극혐이 있으니 계속 이러면 고위 관직에 대한 꿈은 접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앞으로 성균관은 유학자만의 공간이 아니게 될 것이고 과거 시험을 쳐도 그와 관련된 과목은 최대한 배제할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공무원을 뽑는데 도덕책만 달달 외운다고 일을 잘하는 것은 아니잖아.’
어쨌든 행사는 오후 무렵에 끝났다.
나는 곧장 의복을 갈아입고 나와서 계정골로 가기 위하여 말에 올라탔다. 쉴 틈도 없이 움직였으나 호위를 맡은 최영이나 홀치는 다들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제는 어딜 가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몇 개월을 함께 있다 보니 내가 나가봤자 벽란도 아니면 계정골에 갈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단숨에 달려간 계정골은 처음에 최무선이 자리를 잡았을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일단 규모부터 많이 차이가 났다.
숙소로 쓰는 집도 늘어났고 계정골에 머무는 이들의 수도 이제는 수십 명에 달했다.
당연히 최무선은 오늘도 화약을 가지고 씨름하고 있었고 한쪽 편에서는 제작 방법이 잊혀진 쇠뇌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한때는 송나라보다 더 강력한 쇠뇌를 만들던 고려였으나 최근에는 기술이 소실되어 제대로 된 쇠뇌 하나 만들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때 멀리서 한 청년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전하! 시제품이 나왔사옵니다.”
그의 두 손에는 연필이 쥐어져 있었다.
청년의 이름은 이인민으로 이인복과 이인임의 동생이었다. 이로써 성주 이씨 육형제 가운데 세 명이 내 밑에서 일하게 된 것이었다.
그가 이곳에서 하는 일은 계정골의 모든 일을 기록하는 일종의 비공식적인 사관이자 이곳에서 연필을 만드는 장인들을 지휘 중이었다.
심지어 그의 밑에는 화국(畫局)에서 뽑아온 이가 있어서 그림까지 그려 넣고 있었다.
나와 동갑이니 상당히 어린 편이나 영특하기 그지없어서 일처리는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이인민의 호들갑 덕분에 내가 온 것이 알려지자 계정골의 사람들은 나와서 허리를 조아렸다.
나는 그들에게 가서 일 보라고 손을 휘저은 후에 이인민이 가지고 온 연필을 살폈다.
당연히 내 마음에 드는 수준은 아니었다.
공장에서 반듯하게 뽑아내는 연필이 이 시대에 만들어질 수는 없는 일이다. 심지어 사각으로 만들어져서 손가락이 꽤 아플 것 같았다.
가능하면 삼각형이나 육각형으로 만들고 싶었는데 수작업으로 만들만한 것이 아니었다.
일단 나는 그걸 가지고 종이 위에 줄을 그어서 얼마나 잘 써지나 확인부터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인민이 내게 가져온 종이는 고려에서 만드는 최고급 종이인 고려지(高麗紙)였다. 아마도 도침법을 이용해서 만드는 특성 때문일 것이다.
확실히 고려지는 먹의 번짐을 막는데 탁월하나 광택이 있어서 코팅된 종이 위에 쓰는 것처럼 자국만 남고 글씨는 흐릿해서 맞지 않았다.
그걸 본 이인민은 안절부절못했다.
“분명 조금 전에 제가 확인했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농도도 이보다 훨씬 진했습니다.”
“종이의 재질 때문이겠지. 네가 사용했던 종이로 다시 가져오거라.”
“당장 대령하겠사옵니다.”
그가 서둘러 몇 장의 종이를 챙겨오자.
나는 다시 그 위에 선을 그어보기 시작했다.
확실히 하품의 종이가 오히려 잔털이 많고 거칠어서 연필의 가루가 잘 묻어나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는 나는 계정골의 모습을 연필로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공민왕의 예술적인 재능이 어김없이 발휘된 덕분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동안 앉아서 묵묵하게 그림만 그리고 있자 이인민은 그런 내 곁에서 계속 곁눈질을 했다.
장인들은 물론이고 신소봉도 상당히 궁금한 눈빛이었나 혹시라도 방해될까 감히 내 곁으로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거의 반 시진 정도 그림을 그린 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연필을 다시 살폈다.
그리는 중간에 두어 차례 작은 칼로 연필을 깎아내야 했는데 삼나무는 아닌 것 같았다.
하긴 우리나라에 삼나무가 심어지기 시작한 것은 일본에서 들여온 1900년대쯤이다.
그러니 다른 나무를 쓴 것 같은데 도무지 이게 어떤 나무인지 알 수는 없었다.
“무슨 나무를 쓴 거지?”
“여러 나무 중에 그나마 버드나무가 가장 적합했사옵니다. 다만, 다른 나무보다 잘 부러진다는 것이 단점이옵니다.”
“깎아서 쓰는 물건이니 장점이기도 하지.”
버드나무 목재는 직접 만져본 적은 없었는데 생각보다 나뭇결이 상당히 고운 느낌이었다.
외형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기능적인 면은 상당히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단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형태의 연필은 권문세족에게 파는 것은 조금 무리였다. 그들은 생각보다 깐깐한 소비를 하기에 조금 꾸며줄 필요가 있었다.
내가 그 말을 꺼내자 이인민은 인두를 이용한 낙화(烙畵)나 황칠 등을 검토 중이라고 했다.
당연히 그만큼 비싸지겠지만, 원래 있는 이들은 자기 과시를 위해 돈을 아끼지 않기 마련이다.
가진 자들의 허영심은 무시할 수 없다.
그들은 연필의 편리함보다는 새로운 필기구에 대한 소유욕이 앞설 것이 분명했다.
“일단 굵기부터 조금 더 줄여 보아라.”
연필심의 경도나 농도는 괜찮았으나 아직 기술의 부족으로 상당히 굵은 편이었다.
이렇게 되면 획수가 많은 한자를 쓰는 것은 쉽지 않아질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싸고 있는 나무까지 있으니 굵기가 약지 정도는 되었다. 그 부분을 지적하자 이인민은 즉시 개선 방법을 찾아보겠다며 약속했다.
시원시원한 대답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반 시진 정도 그렸던 그림을 이인민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그는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연필로 이렇게 그릴 수 있는지 몰랐습니다.”
“선물이니 가지거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기록에 연필로 그려진 역사상 첫 그림이라고 남기는 것도 잊지 말도록.”
내 그림을 자랑하려고 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런 기록 하나하나가 모여서 연필이란 물건을 임진년에 고려에서 만들었다는 증거가 된다.
기록은 생각보다 상당히 중요하다.
만약에 해례본이나 조선왕조실록이 없었다면 우리는 한글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몰랐을 거다.
그러니 어떤 것이든 놓치지 말고 세세하게 기록을 하라고 항상 이인민에게 시키고 있었다.
“현재 계정골에 들어와 있는 재료로 연필을 몇 개나 만들 수 있지?”
“조금 전의 시제품 정도의 물건은 백 개 정도 만들 수 있사옵니다..”
“일단 그거라도 완성되면 궁궐로 보내주게.”
“어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준비되는 대로 보내주겠다는 이인민의 대답을 들은 나는 슬슬 궁으로 돌아가려고 일어났다.
괜히 내가 여기 오래 있어봤자 일하는 데 방해만 될 뿐이었다. 하지만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연탄 특유의 냄새가 마을 한쪽에서 풍겨왔다.
연탄은 연필보다 더 빨리 시제품이 나왔는데 9할의 흑토에 물을 1할을 섞은 뒤에 무거운 돌을 올려서 압축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현재는 벽돌 형태만 만들고 있었지만,
조만간 철로 만든 원형의 압축기만 완성되면 19공탄도 가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슬쩍 연탄을 만드는 이들 쪽으로 향하니 다들 아궁이만 바라보며 불멍을 때리고 있었다.
그냥 노는 것이 아니라 형태별로 연소하는 시간을 재고 있는 중인지 그들의 곁에는 해를 이용해서 시간을 재려고 볕이 좋은 곳에 쇠못이 박혀 있었다.
“자자! 다들 어서 모여보시오.”
그때 계정골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뭔가 싶어서 고개를 돌리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저마다 지게를 지고 땀을 흘리며 걸어왔다.
수레 같은 것이 들어올 만한 곳이 아니기에 이곳에 물건을 가지고 오려면 어쩔 수 없었다.
슬쩍 살펴보니 다들 내수사에 소속된 이들이라 얼굴이 낯설지는 않았는데 사람들이 무척 반기는 걸로 보아 먹거리를 가져온 것 같았다.
그들이 내려 놓은 것들 중에는 벽란도에서 방금 잡은 싱싱한 생선도 몇 마리 보였다.
무슨 이름을 가진 생선인지 모르겠지만,
그걸 보는 순간에 연탄으로 할 수 있는 또 다른 활용 방법이 떠올랐다. 이번 기회에 요식업에도 손을 뻗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내수사의 관리를 불렀다.
그에게 종이 위에 그린 물건을 보여주며 야장(冶匠)에게 가서 똑같이 만들어 오라고 시켰다.
내가 그려준 그림은 도로가에 있는 격자식 맨홀 뚜껑과 상당히 흡사한 형태였다.
‘연탄불의 맛이 뭔지 보여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