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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9화 (19/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9

만월(滿月)이 뜬 밤늦은 시각.

만월대에서 수많은 군사가 밀려 나오자.

밤잠 못 이루고 밖을 내다보던 개경의 백성들은 깜짝 놀라서 혼비백산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뒤숭숭한 기묘한 밤이었다.

그런데 끝이 안 보일 정도의 병력까지 나타나 개경의 중심지로 향하니 무서워할 만 했다.

선두는 홀치가 섰는데 삼족오 깃발을 흩날리며 달려가는 그들의 모습은 꽤 살벌했다.

확실히 훈련을 한 보람이 있었다.

매일 아침마다 구보를 한 덕분인지 몰라도 그들은 발까지 맞춰가며 질서정연하게 달렸다.

감히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이들은 없었다.

오히려 도망가기 바빴는데 그런 이들을 발견할 때마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 장수들이 한 무리의 병사를 이끌고 쫓아가서 참살하고 있었다.

“칼을 지닌 자는 한 놈도 남김없이 처단한다. 또한 옷에 피가 묻은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포박하여 압송하라!”

정세운은 앞으로 나서서 독려했다.

개경의 치안을 맡는 것은 순군만호부이다.

아무래도 홀치나 응양군에 비해서 개경의 지리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다.

그들을 길잡이 삼아서 관도부터 남대가 주변의 골목을 뒤지며 불령배 무리를 추적했다.

그러면서도 개경의 주민들에게는 절대 밖에 나오지 말고 머물라는 경고는 잊지 않았는데 일종의 토끼몰이 사냥과 흡사한 구석이 있었다.

그렇게 병력의 일부가 떼어지니 남대가에 도달했을 때는 홀치 중에 일부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리 걱정되지는 않았다.

임무를 마친 변안열과 주덕유 등이 옷을 갈아입고 서둘러 합류를 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적었다.

대놓고 그 이유를 물어볼 수는 없기에 슬쩍 이방실을 불러서 물어보니 죽은 이만 십여 명이고 다친 이들은 그 두 배나 많다고 했다.

워낙 격렬하게 저항한 탓에 생긴 일이었다.

우리 쪽의 피해가 큰 만큼이나.

조일신이 이끄는 이들도 많이 죽었다.

확실히 기씨 가문의 사병은 만만치 않았다.

지금까지 들러온 정보를 토대로 추정해보면 조일신 쪽의 피해가 기씨 가문과 부원배보다 오히려 훨씬 더 많은 것 같아 보였다.

그런 탓인지 감찰사에서도 현재 그가 이끄는 무리의 수는 그리 많지 않고 그마저도 개경 곳곳에 흩어져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폭이 넓은 남대가를 천천히 이동하자.

좌우의 골목길에서는 쫓고 쫓기는 소리가 가득했고 십자거리에 도달할 무렵이 되니 병사들이 수십 명을 추포하여 끌고 나왔다.

어차피 성문 밖으로 도망갈 길조차 모두 막혀 있었기에 다들 자포자기한 표정이었다.

심지어 순군만호부의 병사들은 개경에 있는 작은 야산까지 샅샅이 훑으며 이번 기회에 공을 세우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때 남쪽에 있는 태안문 방향에서 황상이 한 무리의 병사들과 함께 달려왔다.

이인복은 그에게 다가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환하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김용이 태안문에서 잡혔습니다.”

“그가 이번 변란에 참가했다는 증좌는 없으니 어서 이리 데려오시오.”

“안타깝게도 김용은 순군만호부의 경고를 무시하고 성벽을 몰래 넘으려다 순군이 쏜 화살을 맞고 성벽에서 떨어져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고 하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구려.”

입에서 나오는 가식적인 말과 달리.

입가에서는 웃음이 저절로 지어졌다.

그 모습을 이인복이 지켜보고 있었으나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역시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용에게 이렇게 큰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훗날 그가 나에게 칼을 들이대는 역사 때문이다.

흥왕사의 변이라 알려진 그 사건에서 가진이 목숨을 걸고 가로막고 환관 안도치 등의 희생이 없었다면 공민왕은 그 자리에서 죽었을 거다.

더구나 그 이전에 김용은 간계를 써서 정세운과 이방실까지 죽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당연히 김용은 내 살생부에서 조일신 그리고 기철과 함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이였다.

‘김용이 진짜 악질이지.’

그러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내가 잠시 이인복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이방실과 정세운은 사로 잡은 이들에게 조일신의 소재를 물어봤으나 안타깝게도 어디에 있는 건지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조금 전에 잡혀들어온 이들도 조일신은 못 봤다고 하는데 갑자기 하늘로 솟아버린 것도 아닌데 이상한 일이었다.

“혹시 길이 엇갈려 본궐로 향한 것은 아니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본궐로 향하는 길목마다 병력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만약 그쪽으로 향했다면 벌써 연통이 왔을 것이옵니다.”

“그럼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이오.”

벌써 시간이 축시가 다 되어간다.

아직 3월의 끝자락이라 추위도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기했던 시간도 길었기에 서둘러 정리하고 병사들도 쉬게 해주어야 한다.

혹시 날이 밝아올 때까지 잡지 못할까 싶어서 곳곳에 화톳불을 놓기는 했으나 모든 군사가 불을 쬘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 이인복이 감찰 어사 서호에게 뭔가 보고를 받더니 다급하게 내 앞으로 다가왔다.

“조일신을 뒤따르고 있던 장녹생이 병사를 보내 현재 위치를 알려왔습니다.”

“도대체 어디 있다고 하던가?”

“미륵사에 모여 있다고 합니다.”

미륵사는 개경의 서쪽에 있는 사찰이다.

주변에는 충선왕이 태어난 사판궁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모래재 고개에 세워진 주작문을 통과하면 곧장 궁궐의 입구인 승편문이 나온다.

조일신이 무엇을 획책하고 있는지는 뻔했다.

뒤늦게나마 나와 가진을 확보하려 다시 한번 시도해볼 생각인 것 같았다. 확실히 지금 그의 입장에서 보면 그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기는 했다.

“현재 그들의 수가 몇 명이나 된다고 하더냐.”

“대략 백여 명은 되는 것 같사옵니다. 그러니 그들이 주작문을 통과해도 궁궐안까지 들어갈 가능성은 없습니다.”

“혹시 모르니 서둘러 군대를 보내시오.”

주작문을 지키는 병사는 거의 없었다.

애초에 그곳의 기능은 구획을 나누는 수준이다.

몇 명 되지 않는 이들로 백여 명이나 되는 조일신을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쩌면 그냥 문을 열어줄지도 모른다.

이인복도 그런 문제를 간과할 수 없기 당연히 장군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서둘러 이동했다.

쉬지 않고 달리면 금방 도달할 거리였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역시 홀치였다.

그들이 성문 앞에 도달하자 조일신의 무리는 칼을 뽑아 들면서 경계를 했다. 오늘 밤에 저지른 짓이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정작 조일신은 상당히 여유롭게 선두에 서 있던 이방실을 맞이했다.

“이 장군, 전하께서는 무사한 거요?”

“당연하지! 네놈이 감히 넘볼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당장 무기를 내려놓고 죄인은 오라를 받거라.”

“무슨 소리요. 나는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전하를 지키러 가는 길이었소.”

“웃기지 마라. 네놈이 기철과 그의 가족을 참살했다는 것을 모를 줄 아느냐.”

이방실이 크게 노해서 고함을 치자.

조일신의 표정이 살짝 찡그려지기 시작했다.

벌써 그 소식이 응양군과 홀치의 수장인 이방실의 귀까지 들어갔을 줄은 생각 못 했다.

하지만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감히 내게 누명을 씌우는 거요?”

“이 작자가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되는 건가. 마지막 경고니 어서 무기를 내려놓거라.”

“절대 그럴 수 없소. 당신이 반란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노릇 아니오.”

“하하하! 감히 과인에게 반란군이라 하는 건가?”

조금 뒤늦게 도착한 내가 앞으로 나서자.

조일신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잠시 망설이다가 대뜸 차가운 땅에 엎드렸다.

살려면 일단 꿇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자 반사적으로 나온 신체적인 반응이었다.

그의 뒤에서 살기 등등하게 서 있던 이들조차 조일신의 모습을 보고 의아하게 여길 정도였다.

나의 얼굴을 모르니 벌어진 일이었다.

“전하! 무사하셔서 다행이옵니다. 소신이 미력하나마 전하의 옥체를 지키기 위하여 이렇게 왔사옵니다.”

아주 구구절절하게 그가 아뢰자.

뒤늦게 상황을 판단한 불령배와 사병 모두가 무기를 내려놓고 조일신처럼 넙죽 엎드렸다.

딱 봐도 내 뒤에 보이는 병사의 수가 수백 명을 넘어가니 그것도 한몫을 한 것 같았다.

내가 잠시 아무런 말도 없이 말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자 조일신은 뭔가 잊은 것을 떠올렸는지 수하를 시켜 보따리 하나를 가져오라 지시했다.

그는 두 손으로 그걸 쥐고 내게 내밀었다.

“소신이 이렇게 역적 최화상의 목을 베어 가져왔나이다. 오늘 개경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이자가 저지른 것이 부디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역사에서도 조일신에게 당했던 최화상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또 당한 것 같았다.

그를 희생양으로 삼아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자신은 오히려 공신으로 남으려는 것 같았다.

조일신은 지금 상당히 큰 착각을 하는 중이다.

내심 고려를 좌지우지하던 기철 등을 모두 처단해 주었으니 오히려 칭찬을 받을 거라고 자기 합리화를 심하게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거 어쩌냐.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애초에 측근이라 여긴 적도 없었다.

그냥 조일신은 여기서 죽는 게 모두를 위해 도움이 되기에 아량 또한 베풀 수 없었다.

괜히 그를 품고 있다가 조일신이 저지른 흉살을 내가 모두 책임져야 할 가능성이 너무 컸다.

이미 마음의 결정은 예전에 내려놨기에 망설임 없이 곧장 이방실을 향해 소리쳤다.

“역도의 무리를 모두 포박하거라! 반항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도 좋다.”

내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렸다는 듯이.

수많은 병사들이 달려들어 조일신의 무리를 제압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자포자기한 얼굴로 순순히 포박을 당했지만, 드물게 칼을 맞대고 싸우거나 도망치는 이도 있었다.

그중에는 조일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도망가려는 했으나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 하나가 정확하게 그의 뒷통수에 보기 좋게 꽂혔다.

쉬이이잉!

그대로 조일신은 엎어져서 움직이지 않았다.

다들 깜짝 놀라서 주변을 살폈으나 어디서 날아온 건지 이 밤에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홀치들도 굳이 그걸 찾아볼 생각도 않았다.

이 정도의 활 솜씨를 가진 이라면 누군지 뻔했기 때문이었다. 임진정변을 일으킨 조일신의 최후치고는 볼품없는 죽음이었다.

그가 죽으니 더는 어쩔 수 없다고 느꼈는지 마지막까지 발악하던 이들도 투항했다.

“저들을 모두 끌고 가서 하옥하거라!”

이방실이 나서서 외치자 홀치와 응양군이 포승줄로 그들을 포박하여 압송하기 시작했다.

대충 헤아려 보면 아흔 명 정도였는데 그러는 사이에 나는 정세운을 불러서 뒤처리를 부탁했다.

“순군만호부는 이번 일에 가담한 역적의 식솔을 모두 추포하고 모든 가산(家産)을 압류하시오. 쌀 한 톨도 남겨선 안 되오. 그리고 조일신과 주모자의 시신은 일단 순군만호부로 옮기시오.”

“어명을 받들겠사옵니다.”

그가 나머지 순군만호부를 이끌고 사라지자.

주작문 앞에는 죽어서 차디차게 식고 있는 시신 외에는 이인복과 감찰사에 소속된 이들 그리고 이번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홀치만 남았다.

그중에는 결정적 막타를 날린 황상도 있었는데 조일신이 입을 열게 되면 우리가 난처해지기에 애초부터 생포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우선 그들의 노고부터 치하했다.

처음 회동(會同)을 갖은 후부터 거의 석 달 가까이 하루도 쉬지 않고 준비를 한 덕분이었다.

“생각보다 잘 마무리된 것 같소. 다들 그동안 거사를 준비하느라 수고가 많으셨소.”

“황공하옵니다. 전하.”

“하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하오. 그동안 준비한 탐관오리에 대한 탄핵 준비는 어찌 되었소?”

“날이 밝는대로 시작하려 하옵니다.”

“좋소이다. 이번 기회에 썩은 부위는 모두 다 잘라낸다는 심정으로 임하시오.”

지금과는 아예 다른 고려를 만들 생각이다.

그러려면 어느 정도의 출혈은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상한 부위를 다 도려내서 씨앗만 남더라도 상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 상태가 더 수월할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새 해가 떠올랐다.

산등성이 빼곡한 나무 틈으로 따뜻한 햇볕이 내려와 내 어깨에 살포시 떨어졌다.

새로운 고려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부원배의 상당수가 처리되었으니 당분간 도당에서 원나라의 편을 드는 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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