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8
그날 밤의 개경은 난장판이었다.
거리마다 칼을 쥔 이들이 뛰어다녔다.
섬득한 비명은 여기저기서 들렸고 피를 흘리고 쓰러진 이들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조일신이 이끄는 무리는 거의 오백 명에 달할 정도였는데 그들을 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개경의 치안을 맡고 있는 순군만호부도 뭘 하는 건지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은 개경에서 불길까지 치솟기 시작하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왜구가 여기까지 들어온 거 아니여?”
“이 사람아 그럴 리가 있나.”
“그럼 이게 무슨 난리인가 말이여.”
“설마, 우리 임금님을 시해···”
“예끼 이 사람아! 부정 타니 그런 말은 하덜 말어. 그리고 거기는 그 무섭다던 왜구를 박살 냈던 홀치와 응양군이 지키고 있잖은가.”
일부는 임금님을 지켜야 하는 거 아니냐며 분개했으나 궁궐로 향하는 이는 없었다.
괜히 무기라도 쥐고 그곳에 다가갔다가 역모를 저질렀다고 오해를 받아서 죽기 십상이다.
그러는 사이에 조일신과 그의 일당은 너무나도 손쉽게 부원배의 무리를 하나둘 처단했다.
가장 먼저 당한 것은 덕양군 기원이었다.
그의 집에는 이백 명이 넘는 사병이 쳐들어가서 순식간에 집 안에 있던 식솔은 물론이고 덕양군과 그의 아들인 기욀제이부카(奇完者不花)까지 목이 떨어져 마당을 뒹굴었다.
병력의 차이가 몇 배나 되니 너무 쉬웠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머지않아 조일신은 기철까지 잡아냈다.
원래의 역사에서는 그를 놓쳤는데 이번에는 조일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승동에 있는 기철의 저택에 순식간에 수많이 병사가 들이닥치니 아무리 그라도 어떻게 막아낼 방법이 전혀 없을 정도였다.
고충절이 기철의 멱살을 잡고 끌고 나와서 강제로 조일신 앞에 무릎을 꿇렸음에도 그는 오만한 표정으로 조일신에게 일갈(一喝)했다.
“네 이노옴! 이러고도 무사할 성싶더냐.”
“황후가 무서웠다면 이번 거사를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전하께서도 이 일을 아시느냐?”
혹시 전하의 사주를 받은 거냐 묻자.
조일신은 그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자신의 충정을 이해할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가지고 있었다. 그런 것마저 없다면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걸 지켜보던 기철은 어이가 없었다.
이딴 자에게 죽는 것은 상상도 못 한 일이다.
‘아아···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이라 했던가.’
붉은 꽃이 오래가지 않듯이.
권력도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았다.
예전에 노책 등이 조언했던 대로 사병을 조금 더 많이 저택 주변에 배치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고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 않았기에 기철은 아무런 말없이 눈을 감고 꼿꼿하게 허리를 폈다.
“끝까지 굽히지 않겠다 이건가.”
조일신은 진짜 마음에 들지 않는 작자라며 중얼거리더니 곧장 그의 목을 쳐버렸다.
시간이 없기에 더는 여유 부릴 틈이 없었다.
바닥에 피가 흩뿌려지며 기철의 머리가 떨어져 버리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불령배의 무리는 기철의 식솔을 하나도 남김없이 참살했다.
그중에는 기원이 당한 것도 모르고 술을 하러 찾아왔던 기철의 동생인 기주와 기윤 그리고 장남 기유걸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일신 네 놈이 감히! ”
저택 뒤에 있는 야산의 수풀 너머.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남자가 하나 있었다.
횃불이 밝혀진 저택의 피비릿내 가득한 모습을 보고 분개하고 있는 것은 기인철이었다.
기철의 차남이자 기유걸의 동생인 그는 조일신이 처들어올 무렵에 운 좋게 뒤뜰에 있어서 사병 몇 명과 함께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집안에는 아내와 아들 기신(奇愼)이 있는 상태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뛰어 들어가서 처자를 구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그를 사병들이 한사코 만류했다.
지금 다시 저택 안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겨우 다섯 명이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다.
“일단 어서 피하십시오. 기회를 봐서 저희가 어떻게든 도련님을 구하겠습니다.
“너희는 나보다 아버님을 구하여야 했다.”
“송구하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그때 횃불을 든 무리가 다가왔다.
아무래도 자신을 찾는 것 같아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자리를 피한 그들은 저택에서 멀리 떨어진 산 중턱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잠시 멈췄다. 추격을 해오는 이들을 뿌리치기 위해서 정말 쉬지 않고 달려야 했다.
“일단 덕양군 숙부님에게로 가자. 그분이라면 조일신 그놈의 죄악을 징치할 수 있을 거다.”
“아까 그놈들이 하는 이야기 못 들으셨습니까. 이곳에 오기 전에 덕양군 마님 댁 먼저 들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일단 흥국사 안으로 피하시지요. 흉수들도 차마 그 안까지 들이닥치지 못할 것입니다. 날이 밝으면 다시 방도를 찾아보겠습니다.”
“흠··· 알겠네. 자네의 말에 따르겠어.”
기인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병들도 그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흥국사까지 가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남대가는 조일신의 수하로 보이는 불령배가 가득했고 골목길에서도 칼이 부딪치며 나는 소음과 고함이 곳곳에서 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일신이 노린 것은 자신의 가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래도 최대한 조심스럽게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주위를 살피며 골목을 걷던 그들은 수창궁 북쪽에 있는 만수정(萬壽亭) 부근을 지날 무렵에 발걸음을 멈췄다.
어둠 속에서 서른 명 정도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가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제기랄···”
저절로 욕설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누가 봐도 수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복면을 하고 있었고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있어서 어둠 속에서는 쉽게 찾아내기도 어려워 보였다. 더구나 그들의 손에 쥐고 있는 칼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이 누가 봐도 이번 일과 연관이 없어 보이지 않았다.
승산이 없어 보인다는 생각이 든 기인걸은 그들을 향해 회유를 시도해봤다.
“누군지 몰라도 나를 도와주면 자네들을 고용한 이들보다 몇 배 아니 몇십 배를 주겠네. 그러니 그 칼을 거두시게나.”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아마 조일신이 고용한 불령배였다면 기인걸의 제안에 조금 솔깃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가로막고 서 있는 것은 주덕유가 이끌고 있는 홀치들이었다. 어명을 받고 칼을 든 이들답게 돈 따위에 넘어가지는 않았다.
잠시 두 무리는 서로 마주 보고 대치하고 있었는데 주덕유는 뒤에 서 있던 감찰사 소속의 어사인 김속명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자들도 명단에 있습니까?”
개경의 사람들 모두를 죽일 수는 없었다.
칼을 뽑으려면 적어도 누군지 확인을 해야 했는데 그 역할은 감찰사에서 맡고 있었다.
오늘을 위해 그들은 목표로 삼은 이들의 얼굴을 완벽하게 숙지해야 했다. 당연히 김속명은 기철의 아들인 기인걸을 곧바로 알아봤다.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이었으나 마침 높게 뜬 보름달이 그의 얼굴을 비췄기 때문이었다.
“기인걸이다. 저놈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이야기 들었지. 다들 가자!”
앞에 있는 이들이 목표물이란 것을 확인하자 주덕유는 주저 없이 곧장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쇠도리깨를 휘두르며 뛰어드는 그의 모습은 야차와 같았고 그의 뒤를 이어서 홀치들이 쇄도했다. 제아무리 기철의 사병이 실력이 좋아도 네 명에 불과했으니 이겨낼 수 없었다.
순식간에 상황은 정리되었다.
그들이 막아선다고 홀치를 이길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기인걸의 사병은 정리되었는데 그들이 목숨을 버려가며 지키려 하던 기인걸도 무사하지는 않았다.
팔과 다리 곳곳에는 칼에 베어 피가 흐르고 있어서 변변한 저항도 못하고 있었다.
담벼락에 기댄 채 어떻게든 일어서려는 그를 향해 주덕유가 힘껏 쇠도리깨를 내리치자 기인걸의 머리는 반쯤 무너져 내렸다.
굳이 숨을 거뒀는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얼굴에 튀어 오른 피를 닦아내며 주덕유는 상당히 만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알량한 권력으로 양민의 피를 착취하는 이들을 때려잡는 것만큼 희열을 느끼는 일은 없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홀치들에게도 두려움의 대상이 될 정도였는데 뒤에서 지켜보던 감찰 어사 김속명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다른 조에 들어갈 걸 그랬다며.
김속명은 메스꺼운 속을 애써 다스렸다.
그러나 주덕유가 올린 성과는 인정해야 했다.
오늘 밤에 그들과 함께 다니며 잡은 부원배가 적다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대어(大魚)가 조금 전에 잡은 기인걸이었다.
김속명은 서둘러 병사 하나를 지목해서 품에서 기인걸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꺼내 건넸다.
“어서 가서 기인걸을 잡았다고 알려라.”
*
그와 비슷한 일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개경의 골목길조차 안전한 곳은 없었다.
조일신의 무리를 피했다고 하더라도 정체 모를 이들의 습격에 피를 쏟으며 죽는 이가 허다했다.
박도래대와 이수산 등이 그렇게 죽은 대표적인 예였는데 생각 외로 복면을 쓴 홀치와 조일신의 무리가 조우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주어진 시간이 부족한 탓인지 조일신의 무리는 마치 폭풍처럼 개경 전체를 휩쓸고 다녔으나 홀치는 철저하게 몸을 숨기며 기회를 노렸다.
그때 이인복이 새로 들어온 소식을 알려줬다.
“주덕유가 기인걸을 잡았다고 알려왔습니다.”
“김용은 어찌 되었는가?”
“아직 아무 소식이 없사옵니다.”
내 질문에 이인복은 고개를 저었다.
군사들이 백방으로 찾아보고 있었지만,
아직 그의 흔적조차 찾아낼 수 없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살짝 골치가 아팠다.
훗날 흥왕사의 변을 일으키는 그를 살려뒀다가 어떤 짓을 벌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계속 그를 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조일신은 벌써 시어궁까지 침범하여 나를 확보하려 시도까지 했다. 다행히 그럴 거란 사실을 미리 알았기에 당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가진과 어머니 공원왕후는 이미 안전한 곳으로 모셔 놓고 그 주변은 순군만호부와 응양군 일부가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면 기철 쪽은 완전히 정리된 건가?”
“현재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김용을 제외하면 거의 다 마무리되어가는 중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권겸과 노책도 모두 은밀하게 처단했다고 변안열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원나라에 있는 기세걸과 기새인티무르를 잡지 못한 것이 아쉽군.”
“다음에 또 다른 기회가 있을 것이옵니다.”
이제 그만 정리하자는 의미였다.
더 시간을 끌수록 개경의 백성들만 다친다.
나도 그걸 알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는데 김용이나 고용보처럼 아직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이들이 있으나 이쯤에서 정리해야 했다.
그나마 내가 쓴 살생부에 이름을 올린 이들의 대부분이 오늘 밤에 정리되어서 다행이었다.
이제는 조일신을 잡아들일 시간이었다.
갑주를 입은 채로 앉아있던 내가 검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서자 이방실과 정세운이 곧장 부복하며 내가 내리는 지시를 기다렸다.
“지금 당장 출병하라.”
내 말이 떨어지자 얼마 지나지 않아 궁궐과 개경 너머에서 호각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여러 곳에서 동시에 울리고 있었는데 메아리치듯 개경 전체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부원배를 잡기 위해서 은밀하게 내보냈던 주덕유 등의 홀치에게는 이제 그만 철수하라는 신호이자 출정을 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후원에서 수많은 이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숨기고 있던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궁궐을 가득 메울 정도로 많았다.
홀치와 응양군 그리고 순군만호부까지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이라 할 수 있었다.
순군만호부의 병사는 그리 많지 않았는데 대부분은 성문에 배치되어 개경을 벗어나려 시도하는 이들을 막아서고 있었다.
오늘 밤에 개경에서는 누구도 나갈 수 없었다.
병사들은 그대로 곧장 성문 밖을 나섰다.
이미 이방실과 정세운 등은 그들을 이끌기 위해서 말을 타고 달려 나갔고 나는 최영 등의 홀치와 함께 천천히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내가 직접 나가겠다는 말에 상당히 많은 반대가 있었으나 훗날 임진정변으로 기록되는 이 날의 모든 것을 직접 보고 싶어서 참을 수 없었다.
일종의 직업병이라 봐도 되었다.
‘이걸 기록해놓을 수 없는 것이 아쉽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