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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7화 (17/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7

두침의 시신은 이틀 후에 발견됐다.

그것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인 일이었다.

감찰사에서 이미 시신이 있는 위치를 알고 있으니 거기에 그냥 놔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끄집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일개 가노의 죽음에 불과한 일이었지만,

그의 죽음은 일종의 격발 장치와 비슷했다.

이인복은 그걸 절대 놓치지 않고 활용하려 했고 수하를 나무꾼으로 가장해 두침의 시신을 우연하게 발견할 수 있도록 은밀하게 움직였다.

더구나 목격자도 상당히 많았다.

덕양군에게 끌려가던 모습과 더불어 수레에 실려 나온 시신은 은연중에 소문이 나고 있었다.

그런데 이인복이 시신까지 꺼내 놓았다.

이제 이 문제는 그냥 넘어갈 수 없게 되었다.

당연히 두침을 포함한 네 구의 시신은 개경의 치안을 담당하는 순군만호부로 넘어갔다.

마당에 놓인 시신을 본 정세운은 일단 한숨부터 크게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같이 호종한 세월이 있기에 조일신의 성격을 뻔히 아는 그였다.

상당히 난감한 일이었다.

“그냥 넘어갈 이가 아닌데···”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이걸 그냥 뭉개자니 조일신이 어떻게 나올지 뻔했고 파고들자니 상대가 덕양군이었다.

차라리 전법사로 넘겨버릴까 고민하던 그를 구해준 것은 다름 아닌 이인복이었다.

잠시 그와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고 나온 그는 곧장 휘하의 제공(提控)을 불렀다.

“지금 당장 시신을 수습하여 첨의참리 조일신의 집으로 보내거라. 무슨 일이냐고 묻거든 지금까지 밝혀진 모든 것을 그대로 말해주거라.”

제공은 곧장 정세운의 지시를 따랐다.

그는 병사를 동원해 곧장 네 구의 시신을 싣고 조일신의 저택으로 향했다. 잠시 후에 도착한 저택에 그들의 시신을 내려놓자 가족으로 보이는 이들의 곡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 소리가 조일신의 귀에 안 들릴 리가 없었다.

“뭐시라? 두침이가 죽어서 돌아왔어?”

“순군만호부에서 온 이가 전해준 말에 의하면 진봉산 부근에서 죽은 채로 매장된 것을 발견했다고 하옵니다. 저에게 슬쩍 말해주길 덕양군 가노와 시비가 있었는데 그 때문인 것 같다고 조사할 예정이라 했습니다.”

“누이를 팔아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들이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기철 형제의 아버지인 기자오는 종6품의 총부산랑(摠部散郎) 출신으로 그것도 음서제(蔭敍制)를 통해 겨우 관직에 오른 인물이다.

애초에 권문 세족과는 거리가 먼 이들이 행주 기씨였다. 아무리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기윤숙의 후손이라도 그게 언제적 일인가.

벌써 백 년이나 지난 과거의 영광이다.

“이놈들! 나 조일신이 그냥 넘어갈 듯싶더냐.”

가노 몇 명 잃은 것은 아깝지는 않았다.

그런 놈들은 수십, 수백 명이라도 살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것이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조일신은 이번 기회에 아예 행주 기씨 가문을 이 세상에서 없애버릴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지금껏 애써 참아왔던 권력욕이 꿈틀거렸다.

그들만 없다면 손쉽게 고려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계속 거슬리던 이들이었다.

기나긴 인고의 시간 끝에 얻은 권력이다.

원나라에서 전하를 즉위시키기 위해서 그가 써야 했던 재물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이제 겨우 본전을 뽑으려는데 방해를 하는 이가 있다면 누구라도 가만둘 수 없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내 편이 될까.

조일신은 자신이 이룬 파벌 중에 이해관계가 들어맞는 이들 몇 명이 떠올랐기에 그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 노복을 몇 명을 보냈다.

대청마루 위에서 대문 너머로 사라져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흐릿하던 하늘에서 눈와 비가 섞여 내리기 시작했다.

“감히 나를 건드린 대가는 치러야지.”

*

조일신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를 주시하던 감찰사도 비상이 걸렸다.

노복 몇 명이 조일신의 측근을 불러 모았다는 소식은 궁궐에 있던 내게도 곧장 전달되었다.

나는 곧장 이인복과 이방실을 불러들였다.

감찰사와 홀치는 이번에 준비 중인 거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줘야 하는 이들이었다.

오후 늦게 궁궐에 들어온 두 사람은 상당히 근심이 많아 보였다. 자칫 개경 내에서 칼부림이 날 것 같은 분위기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는데 지금 가장 궁금한 것은 조일신이 움직이는 시기였다.

“조일신, 그자가 언제 움직일 것 같소?”

“아무래도 오늘은 아닐 것입니다. 사병을 불러모으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옵니다.”

“제 생각도 그러하옵니다.”

이방실도 이인복의 말에 동의했다.

아무리 조일신이라고 해도 개경 내에 자신의 사병을 놔두진 않았다. 몰래 노복으로 가장한 이들이 있더라도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반역의 여지가 있어서 강력하게 통제를 하는 편이다.

대부분의 권문 세족은 괜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개경현 안쪽으로는 사병을 배치하진 않았다.

하지만 신변을 지키기 위한 호위 정도는 대부분 눈을 감아주는 편이었고 언제나 예외는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기씨 일가였다.

“덕양군과 덕성부원군이 개경 내에 보유한 사병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되었소?”

“개경현 곳곳에 몰래 숨기고 있는 이들까지 합쳐서 삼백 명은 될 거라 판단되옵니다. 거기에 개경부 내에서 호위하는 이들의 수가 기씨 형제의 저택마다 수십 명 씩은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동시에 모이면 오백 명은 된다는 이야기 아니오?”

이인복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쉽게 볼 수 없는 수준의 사병이었다.

만약에 기씨 가문이 아니었다면 이 정도까지 손 놓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다른 이들이라면 역모의 죄까지 거론됐을 수준이다.

더구나 그들이 보유한 사병은 정예로 유명한 이들이라 쉽게 봐서는 안 되었다.

“조일신은 어느 정도 규모일 것 같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현재 조일신의 난에 가담한 이들의 명단도 정확하게 나오지 않은 상태다. 그나마 확인된 이는 최화상과 장승량을 비롯해 고충절과 장강주 그리고 이송경 등이 확인되었다.

원래의 역사에서 한몫을 했던 정천기는 제주에 좌천되어 아직 복귀하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래도 조일신은 모은 사병 못지않게 불령배(不逞輩)의 수도 많은 것이옵니다.”

“저자거리의 탁류(濁流)들 말이오?”

“최근에 조일신이 그들을 이용해서 꽤 많은 양민을 노비로 삼았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겨우 그 정도 되는 이들로 가능하겠소?”

겨우 그걸로 그 난리를 쳤던 것일까.

역사에 기록된 조일신의 난이 절반의 성공밖에 안 되었던 이유가 거기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런 자들을 데리고 움직였기에 가장 중요한 기철을 놓치고 말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는데 당시에 조일신은 대부분의 기씨 일가 사람들을 놓쳤다.

그때 이방실이 다른 문제를 지적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기철과 조일신 모두 매수해 놓은 군관이 상당히 많다는 것입니다. 자칫 순군만호부의 병사끼리 싸우게 되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사옵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순군 만호 정세운은 내가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아직 그의 영향력이 강하지 않았다.

관직을 제수 받은 지 얼마 안 된 탓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있다면 개경 내의 군사 세력은 대부분 장악해놨다는 것이다.

여기 있는 두 사람과 정세운이 있다면 개경을 다시 장악하는 일은 크게 우려되지 않았다.

그보다 중요한 일은 따로 있었다.

조일신이 기철 등을 기습하는 시기에 맞춰 우리 쪽도 은밀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조일신의 무리가 놓치는 인물이 있다면 우리가 마무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가 차린 상에 수저만 올리면 되는 일이다.

이번 기회에 나는 그의 이름을 빌려서 살생부에 이름이 올라간 이들을 최대한 많이 처리할 생각이었다.

“기철과 기원 등의 형제는 물론이고 그들의 가족과 부원배 전부를 처리해야 하오.”

“이미 모두 숙지하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절대 우리가 드러나선 안 되오.”

이게 이번 일의 가장 핵심이었다.

모든 죄는 조일신이 뒤집어써야 한다.

기 황후의 가족을 죽이는데 나까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원나라에게 들통나면 끝장난다.

그녀의 성격상 당장 수십만 명이나 되는 대군을 보내서 나를 잡겠다고 난리를 칠 것이 뻔했다.

나는 이방실을 바라보며 준비 상황을 물었다.

“홀치는 몇 명이 준비 중이오?”

“입이 무거운 자로 백 명을 선별해놨습니다. 모두 세 개의 조로 나눠서 이번 거사에 참가하기로 되어 있사옵니다.”

한 조당 서른 명 정도에 불과했다.

기습하기에는 적당했으나 정면으로 붙기는 조금 애매한 숫자였다. 하지만 아직 홀치에 있을지 모르는 세작(細作)을 추려내진 못했다.

사람이 부족해서 충원을 한 지 얼마 안 되어서 현재는 홀치라고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이방실은 그리 걱정하진 않았다.

“아무리 기씨 가문과 조일신의 사병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일당백인 홀치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옵니다. 더구나 이번 일에 감찰어사 황상도 함께하니 심려치 마시옵소서.”

그 말을 들으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황상 정도의 활 솜씨면 굳이 앞에 나서서 칼을 맞대지 않아도 멀리서 암살이 가능할 것이다.

어차피 사병을 토벌하는 목적은 아니기에 무슨 수를 쓰더라도 부원배만 잡으면 된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 분명히 있었다.

조일신의 패거리와는 되도록 조우하면 안 된다.

지금은 오히려 그들에게 응원을 보낼 때였다.

그들은 모든 일을 마친 후에 나머지 홀치와 응양군 등을 동원해서 내가 직접 잡아 족쳐야 했다.

“명심하시오. 절대 한 명도 놓쳐서는 안 되오.”

*

조일신은 생각보다 신중했다.

곧장 병사를 끌고 나설 줄 알았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만큼 상당히 치밀하게 준비하는 것 같았다.

덕분에 지켜보는 입장인 나와 감찰사는 피가 말라 죽을 것처럼 긴장되었다. 그러나 조일신도 인내심에는 한계가 분명히 있었던 것 같았다.

두침이 죽은 지 닷새째가 되자 마침내 조일신과 그 무리들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가 저물 무렵에 개경의 나성 동남쪽에 있는 장패문(長覇門)을 통해서 인상이 상당히 험악해 보이는 이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을 막는 이는 없었다.

덕양군이 그랬던 것처럼 장패문을 지키는 무관 역시 조일신에게 포섭되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수레에 무기를 숨겨왔는데 그렇게 개경 안으로 들어간 무리만 적어도 대여섯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당연히 조일신의 저택도 무척 분주했다.

그의 집에는 이번 일을 함께하기로 약조한 이들이 사병들을 이끌고 모이기 시작했다.

조일신은 그들을 향해 신신당부를 했다.

“내가 직접 기철과 기원을 잡을 터니 나머지 분들은 고용보를 비롯한 우리가 목표로 하는 다른 기씨 일가를 절대 놓치지 마시오.”

“걱정마십시오. 안 그래도 기씨 가문에 당한 게 많아서 다들 벼르고 있었습니다.”

“후환을 남겨 놓을 수는 없지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가시죠.”

조일신이 결연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서자.

수많은 사병이 넓은 마당에 나열해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모두 날카로운 칼과 함께 아직 불을 붙이지 않은 횃불이 하나씩 쥐어져 있었다.

잠시 그들을 살펴보던 조일신이 마침내 신호를 주자 그들은 횃불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저택의 주변은 불이라도 난 것처럼 환하게 밝혀졌다.

“오늘 우리는 고려를 좀먹게 만드는 행주 기씨를 하나도 남김없이 처단할 것이다. 역사는 우리를 충신으로 기록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모두 자부심을 갖고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라.”

조일신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흥분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았는데 이 기분을 만끽할 시간이 없어서 아쉬웠다. 마음 같아서는 잠시 이 자리에서 일장연설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거사는 최대한 빠르게 이뤄져야 한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한 것은 이쪽이었다.

이궁에 있을 전하가 움직이기 전에 끝내야 했다.

허리춤에 걸린 칼집에서 칼을 뽑아 들어서 높게 치켜든 그는 있는 힘껏 소리쳤다.

“모두 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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