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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6화 (16/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6

강화에서의 일은 금방 소문이 났다.

안 그래도 개경 인근까지 왜구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이 퍼져서 난리가 났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마침 강무를 나가 있던 내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왜구를 일망타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개경에서는 환호성이 끊이지 않았다.

덕분에 환궁으로 하려 개경에 들어서자 수많은 인파가 몰려나와 나와 병사들을 맞이해줬다.

처음에는 병사뿐만 아니라 나도 얼떨떨했다.

원나라에서 환궁했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뭔가 가슴 아래에서 벅찬 느낌이 들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그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일부러 환궁하는 길을 바꿨다.

고려에는 개선문 같은 것이 전혀 없지만,

개경을 관통하는 남대가(南大街) 거리가 있다.

조금 돌아서 궁궐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될 수 있으면 사람이 많은 곳을 골라야 했다.

이번에 전투를 치른 홀치와 응양군을 위한 배려이자 패배 의식을 지우기 위한 계산이었다.

더구나 병사들이 지금까지 홍귀에게 끊임없이 갈굼을 당하며 익힌 제식을 보여주고 싶었다.

착착착!

같은 박자에 맞춰 움직이는 발걸음마다.

경쾌한 발소리가 남대가에 울릴 정도였다.

더구나 선두에는 최근 들어 화제가 되고 있는 흑마포를 입은 사내들이 걷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부대기(部隊旗)로 정한 삼족오 깃발이 쥐어져 있었다. 국뽕을 자극하기 위한 나름의 계산이었는데 효과는 꽤 좋았다.

이 시기의 고려는 예상외로 고구려에 대한 선망(羨望)이 강한 편이었다. 광활한 영토를 다스린 강력하던 그 시절에 대한 갈망이기도 했다.

어쩌면 씁쓸한 현실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모습을 보던 청년들은 그 모습에 홀딱 반했는지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역시 나는 홀치나 응양군에 들어가야겠어.”

“누가 너를 뽑아? 그 자리는 이 나라의 모든 병사와 무관이 간절하게 원하는 자리잖아.”

“맞아. 전하를 바로 곁에서 호위하는 곳인데 적어도 무예가 출중해야지.”

“그나저나 삼족오 깃발이라니. 뭔가 가슴이 웅장해지는 기분이 든다.”

정확하게 내가 바라던 반응이다.

저런 이들이 점차 많아져야 하는 고려다.

억지로 끌려와서 나라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강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숨에 이뤄질 거라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게 남대가를 지나 궁궐에 들어서니 승평문(昇平門)에 도달하니 가진이 나와 있었다.

내가 있는 곳으로 왜구가 쳐들어와서 직접 싸우기까지 했다는 소식 때문에 상당히 걱정을 많이 했던 것 같았다. 그런 탓인지 그녀는 나를 보더니 촉촉한 눈망울을 한 채로 곧장 달려와 품에 안겼다.

“무탈하셔서 다행입니다.”

*

강화에서 왜구를 격퇴했으니.

한동안 약탈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다음에 시도하는 침략은 여름쯤이었다.

환궁을 한 이후에 나는 이번 전투에서 사망한 이들과 다친 이들에게 작게나마 보상을 줬다.

재정만 넉넉하다면 평생 먹고살 걱정은 없을 정도로 해주고 싶었으나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이번에 강무를 강행하느라 내수사의 재물을 써야 했는데 그 덕분에 창고가 바닥을 보였다.

병사와 장수에게도 보상은 했지만,

관직을 제수하거나 그런 것은 거의 없었다.

원래의 역사대로면 김휘남은 정3품인 좌상시(左常侍)를 제수받아야 정상이었으나 그는 왜구를 잡는 포왜사에 남기를 원했다.

이번에 나포한 왜선 외에도 머지않아 전선을 추가로 건조해서 최대 백 척의 함대를 그에게 줄 거란 나의 회유에 넘어온 것이었다. 반면에 이방실과 변안열 등은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그들의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당분간은 현재의 자리를 유지해야 했다.

지금 군권을 교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제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에서 고려를 좀먹고 있는 벌레를 처단할 시간이었다.

얼마 전에 조일신에게 심어 놓은 뇌관이 언제 터질지 모를 일이었다. 그 덕분에 지뢰 위에 발을 얹어 놓고 사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불화의 씨앗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터졌다.

개경의 동남쪽에 있는 진촌.

그곳은 임진강의 하구와 개경의 북동쪽에서 발원하는 사천(沙川)이 만나는 지점이다.

나루터 근처에 있는 이십여 채가 전부인 작은 마을이었지만, 오늘따라 그곳은 십여 명이 내는 고함과 욕설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말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그 기세가 굉장히 흉흉했다.

“네 이놈! 덕양군 나으리를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면 썩 비켜서거라.”

“대대로 이 땅은 우리 영감마님의 것이었어. 이렇게 방자하게 나오고 무사할 듯싶으냐.”

“당치도 않다.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무지한 하릅강아지가 짖어대고 있구나.”

“뭐! 개 짖는 소리?”

조일신의 가노인 두침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는 기분이 들었다. 영감마님이 대도에서 귀국한 후에 아무도 그를 업신여기지 않았다.

그만큼 조일신이란 이름 석 자에 실린 힘이 적지 않았다. 잘 보이려고 보내오는 뇌물이 쌓여 창고는 터질 지경이었고 개경에서 제법 이름 알려진 권문세족도 문지방이 닳도록 오갔다.

그런데 덕양군의 가노인 저 망할 녀석들만큼은 쉽게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은 1 결도 안 되는 땅 때문이었다.

평소부터 두침은 진촌에 있는 땅을 눈독 들이고 있었다. 그 토지는 몰락한 귀족이 소유하고 있어서 쉽게 탈점(奪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이 많은 할머니와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아이만 있는 집이라 너무 쉽게 봤던 걸까.

오늘 담판을 지으려고 왔는데 하필이면 기철의 바로 아랫 동생인 덕양군 기원의 가노가 자신이 침 발라 놓은 곳에 와서 덕양군의 땅이라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이런 일은 생각보다 흔하기는 했다.

땅 하나를 놓고 대여섯 명이 서로 자신이 땅의 주인이라고 우기는 일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이렇게 말이 안 통하는 경우는 없었다.

보통 권력과 위세가 높은 집안이 이기는 편인데 지금까지 두침은 그런 시비가 벌어져도 줄곧 이기는 쪽이었다.

‘그냥 이것들 모두 임진강 바닥 깊숙하게 담가버릴까?’

못 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이미 그런 경험도 적지 않게 있었다.

과연 물속에서도 지금처럼 혓바닥을 놀릴 수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아무리 두침이라도 기씨 가문의 위세는 쉽게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설 수도 없는 일이다.

이번 달에 영감마님이 정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어떤 벌을 받을지 모르는 일이다.

정월에도 가노 하나가 죽어 나갔다.

그를 대신하고 있는 게 자신인데 글씨를 깨우치고 일 처리를 잘한다는 덕분이었다.

만약에 실수를 하게 되면 자신 역시 그런 꼴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이판사판이란 생각이 들자 두침은 사정없이 손에 쥐고 있던 몽둥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퍼억! 퍽!

갑작스러운 기습이었다.

두침의 곁에 서 있던 동료들도 얼떨결에 그와 함께 매타작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덕양군의 가노들은 깨진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들 역시 지금까지 감히 이런 일을 저지르는 이를 만나지 못했기에 방심했던 것 같았다.

초주검이 될 정도로 두들겨 패던 두침은 그들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주의를 줬다.

“카악 퉷! 여기서 알짱거리다가 또 내 눈에 띄면 그때는 정말 죽는다.”

*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된다던가.

기원은 뒤늦게 소식을 듣고 크게 노했다.

심지어 가노 하나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평소 가노를 엄청나게 아끼던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이름을 밝혔는데도 이렇게 오만방자한 모습을 보였다니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더구나 요즘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조일신의 가노가 한 짓이라니 더 참을 수 없었다.

당연히 기원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는 당장 사병을 조용히 불러들였다.

“가서 이번 일에 관련된 고얀 놈들을 모두 끌고 오거라!”

병사들은 곧장 개경 곳곳에 흩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침을 잡아 왔다.

조일신의 저택에서 나오는 것을 반쯤 기절시켜 끌고 온 것이었다. 마당에 널브러져 있던 그에게 우물에서 떠온 물을 붓자 두침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머리를 흔들며 물기를 털어내다가 바로 옆에 피떡이 되어 쓰러진 이들의 얼굴이 보였다.

피로 범벅이 되고 얼굴이 퉁퉁 부었으나 평생을 함께 지낸 이들이라 못 알아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두침은 화가 치밀었다.

“어찌 사람을 이렇게 함부로 다룰 수 있단 말이오. 국법이 무섭지 않소?”

“나는 그래도 된다.”

“당신은···”

그제야 두침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청마루 위에서 내려다보는 이가 누군지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현재 고려에서 가장 기세가 등등하다는 기씨 일가의 셋째 아들인 덕양군이었다. 섬뜩한 그의 눈빛을 보니 오늘 살아서 이곳을 나가긴 그른 것 같았다.

그런 그의 표정을 읽었는지 덕양군은 두침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나무라기 시작했다.

“나를 업신여기는 것은 우리 가문 전체를 업신여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너희 주인이 그래도 된다고 가르치더냐?”

“아니옵니다. 절대 그렇지 않사옵니다.”

“그럼 어찌해서 나의 가노를 해쳤나?”

“소인이 잠시 화를 참지 못하여 실수를 하였습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양팔이 뒤로 묶인 상태로 두침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권세를 믿고 날뛰는 것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감히 덕양군 앞에서 영감마님의 이름을 팔아 봤자 화만 돋굴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는 지금 이 순간에 결정될 것이기에 두침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가노로 살았던 세월이 길었기에 이럴 때는 죽을힘을 다해서 비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보내줄 거라면 잡아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덕양군은 매질을 해서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뭐 하느냐. 어서 저놈을 매우 쳐라!”

그때부터 두침은 심한 매질을 당했다.

아까 그에게 당했던 이들이 직접 몽둥이를 들고 있어서 손에 사정을 전혀 두고 있지 않았다.

새우처럼 몸을 둥글게 말아서 머리에 손을 올리고 있던 두침이 아무런 미동이 없자 그제야 덕양군의 가노들이 슬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느낌이 싸한 것이 잘못된 것 같았다.

흰머리의 나이가 지긋한 가노 한 명이 슬쩍 그의 코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사색이 된 얼굴로 벌떡 일어나 상태를 아뢰었다.

“대감마님. 아무래도 죽은 것 같습니다.”

“겨우 그걸 못 버티고 죽다니. 어서 저것을 가져다가 근처 야산에 버리고 오거라.”

“지시대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놈들은 어찌할까요?”

“괜히 알려져 봐야 좋을 게 있더냐. 너희들이 알아서 처리하거라.”

덕양군이 애매모호하게 말했지만,

어떻게 해야 되는 지는 다들 잘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살인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아무리 덕양군이라도 뒤탈이 일어날 것이다.

결국에는 깨끗하게 처리하라는 말이었다.

가노들이 머뭇거리고 있자 덕양군 아래에서 사병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칼을 들었다.

그는 마치 닭의 모가지를 자르는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바닥을 뒹굴고 있는 조일신의 가노들의 목 깊숙하게 칼을 찔러 넣었다.

이미 피떡이 되어 기절한 이들을 처치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렇지 않게 마지막 한 명까지 모두 처치한 그는 칼을 휘둘러 피를 털어내고 가노들을 바라봤다.

“어서 치우지 않고 뭐 하는 건가?”

그때부터 가노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수레를 가져와 네 구의 시신을 모두 싣고 개경 남쪽의 회빈문을 통해 진봉산 부근으로 갔다.

회빈문의 경계를 서는 순군만호부의 무관은 기씨 가문과 깊은 인연이 있는 자가 담당한다.

당연히 별다른 검문 같은 것도 없이 통과됐다.

그런 그들의 뒤에는 죽립을 눌러쓴 두 명의 남자가 뒤따르고 있었다.

그중의 한 명은 감찰어사 황상이었다.

황상은 덕양군의 집에서 나온 수레가 의심되어 한참을 뒤따라왔는데 그러다가 가노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하는 대화를 들었다.

그 덕분에 수레에 실려 있는 시신이 조일신의 가노라는 것을 알아냈는데 상황이 심각했다.

황상은 서둘러 함께 움직이고 있는 감찰사 소속 관원인 소유(所由)를 바라보며 소리 낮춰서 지시를 내렸다.

“자네는 어서 가서 감찰 대부 어르신께 이 사실을 알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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