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4
그 소식이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강무의 최종 목적은 왜구 소탕이었다.
있지도 않은 야저를 핑계로 굳이 포왜사까지 동원해서 강화에 온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내가 모든 왜구의 침략을 다 기억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이번에 교동과 강화를 침략하는 것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원래의 역사에서는 개경의 코앞까지 왜구가 왔다며 개경의 백성이 혼비백산하였다고 했다.
실제로 계엄령이 떨어져 응양군까지 모아서 내보냈다고 하니 상당히 심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강무를 핑계로 왜구와 싸울 정예 병력을 미리 강화도로 옮겨 놓은 상태였다. 더구나 실전은 최고의 훈련이니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와 더불어 왜구의 배도 꽤 탐나는 물건이다.
이 시기의 고려가 보유한 전선(戰船)은 고작 백 척에 불과했다. 과거 여원 연합군을 꾸려 일본 원정을 가던 시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은 한 척의 배라도 아쉬운 시기였다.
“전하! 어서 환궁하셔야 하옵니다.”
최영이 전령의 이야기를 전달하자.
사색이 된 신소봉이 다급하게 외쳤다.
이 시대의 왜구는 거의 귀신 같은 존재다.
단병접전에서 같은 수로 붙으면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그들의 칼솜씨는 뛰어났다.
그런 이들이 머지않은 곳에 있는데 내가 이곳에 머물고 있으니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과인한테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란 말이더냐!”
“허나 침구해온 왜구가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도 모르는 상황이옵니다.”
“이럴 시간에 알아보면 되지 않소.”
내가 나무라는 어투로 신소봉을 다그치자.
이방실은 곧장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재빨리 망루에서 이 소식을 가지고 온 병사에게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물었다.
“네가 확인한 왜구의 수가 어느 정도더냐!”
“적어도 수십 척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정확하게 적의 수도 헤아리지도 않고 온 것이냐.”
“송구하옵니다.”
이 시대에 망원경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는 했으나 대충 어느 정도 규모인지 알고 있는 나로서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아니었다.
‘스무 척 정도밖에 안 될 텐데.’
많아야 스물다섯 척 정도일 것이다.
이 당시에는 배 한 척에 평균 서른 명 정도가 탄다고 했으니 저들의 병력은 600명에서 아무리 많아 봐야 800명 정도라 추정됐다.
현재 강화에 강무 중인 천오백 명의 병사가 있으니 거의 두 배 정도는 된다고 보면 되었다.
왜구의 단병접전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두 배나 되는 고려 정예병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상대할 수 없을 정도였다면 내가 먼저 서둘러서 환궁하자고 했을 것이다. 더구나 돌아가고 싶어도 그럴 방법이 딱히 없었다.
포왜사 김휘남의 배는 내일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지금 그를 찾아올 시간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이방실은 내가 내린 출병 명령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응양군과 홀치를 출병시키기 위해서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쯤에서 나는 주덕유를 따로 불렀다.
“병사들을 이끌고 당장 달려가서 왜구가 상륙하려는 마을의 백성을 대피시키거라.”
*
왜구가 탄 배는 교동부터 들렸다.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성과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어찌 된 일인지 곡식 창고는 텅 비어 있었고 마을에 있어야 할 사람들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건 마치 자신들이 올 거란 사실을 알고 모두 피한 것 같아 보였는데 딱히 털어갈 것도 없고 노예로 잡아갈 이들마저 없으니 화가 치밀었다.
이러려고 목숨까지 걸고 거친 바다를 뚫고 긴 시간 항해해서 온 게 아니었다.
“제길! 이게 도대체 뭐지.”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텅 비어있는 경우는 처음 봅니다.”
“그래도 요동에 떨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잖아. ”
이번 노략질의 대장인 우키다가 말하자.
그의 휘하에 있는 부하들은 모두 동의했다.
가장 최악의 상황은 빈곤한 요동에 떨어지는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고려에 왔다는 것이 최상의 결과물이라 보기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들이 원래 향하려고 했던 곳은 원나라의 절강행성(浙江行省) 부근의 항구였다.
그곳에 가서 크게 한탕 해서 돌아가려고 스무 척이나 넘는 배를 모아서 출발한 상태다.
우키다는 그들 모두를 동료라 생각하지 않았다.
출발 전에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나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랜 시간 함께한 부하밖에 없었다.
이미 이곳에 도달하기 전에 세 척의 배를 풍랑에 의해서 잃어버린 후였다. 그런데 성과를 내지 못하면 언제 등에 칼을 꽂을지 모르는 일이다.
‘이게 모두 신풍(가미카제)이 도와주지 않은 탓이다.’
어쩌면 공물이 부실했던 것 같았다.
이 시기에는 바람이 이끄는 대로 움직여야 하기에 출항하기 전에 동녀(童女)를 둘이나 공물로 바쳤는데 그걸로는 부족했던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우키다는 인근에 있는 다른 섬부터 털면서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크게 한 방은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발품을 팔면 배를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부하 하나가 과한 욕심을 부렸다.
“저 너머가 벽란도라고 합니다. 기왕이면 그곳을 치는 것은 어떻습니까?”
“미친놈아! 그곳이라면 개경의 코앞인데 너 같으면 임금이 사는 곳을 무방비로 두었겠냐. 죽을 거면 혼자 가서 뒈져.”
“하긴 두목의 말이 맞기는 하지.”
다들 벽란도 이야기를 꺼낸 이를 노려봤다.
아무리 칼을 휘둘러서 먹고사는 이들이라고 하더라도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해적 생활을 하면서 얻은 교훈이 있었는데 능력도 없는 주제에 너무 과하게 욕심을 부리면 그 끝이 항상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개경은 백여 척이 넘는 대규모 선단이라도 쉽게 넘보기 어려운데 겨우 스무 척에 불과한 지금 규모로는 솔직하게 엄두도 나지 않았다.
거기에는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벽란도의 위치가 생각보다 안 좋았다.
강의 하구에 있는 그곳까지 들어가는 길은 완전히 미지의 세계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나마 여기까지는 지난해에 와본 이들이 있었기에 괜찮았는데 조류도 심하고 수심도 낮아서 언제 암초에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그런 것까지 감수하며 벽란도를 노리고 싶은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 저쪽의 섬부터 가시죠.”
그때 길잡이 하나가 동쪽의 섬을 가리켰다.
조금 전에 들린 곳보다는 훨씬 큰 섬이었다.
이쪽 지리에 밝은 이들이 해준 말에 의하면 과거 고려가 세운 궁궐이 있었던 곳이라고 했다.
확실히 조금 전에 들렸던 섬보다는 해안가에 있는 촌락의 규모도 커 보이기는 했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우키다가 그쪽으로 배를 돌리자 나머지 배도 그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배를 접안할 만한 곳을 찾으며.
그들이 탄 배는 해안을 따라 올라갔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작은 규모의 항구가 보였는데 몇 척 정도밖에 못 들어갈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아무리 열악한 곳이라도 배에서 내려 상륙하는 것은 그들의 장기였다. 해적이라면 적어도 그 정도의 실력은 있어야 먹고 살 수 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강화의 정포였다.
이곳 외포리에서는 가장 큰 마을이지만,
수십 가구가 모여 사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왜구들은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마을을 시작으로 섬 전체를 한 차례 돌며 돈이 될만한 것은 다 쓸어올 생각이었다.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쓸어라. 노예로 팔 수 있는 이들은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죽인다!”
공포는 꽤 효과적인 무기다.
우키다는 그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가는 곳은 언제나 피와 시체가 넘쳤다.
그래야 다음에 들려도 저항할 의지마저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된다. 더구나 배에 태울 수 있는 자리가 부족해 모두 노예로 데려갈 수도 없다.
가장 좋은 것은 기술을 가진 장인이었고 그 다음이 미색을 갖춘 고려의 여인이었다.
우키다가 검은 동면구를 쓴 뒤.
말을 타고 마을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자.
수십 명의 기마병과 수백의 왜구가 뒤따랐다.
그들의 손에는 기다란 칼이 쥐어져 있었는데 누구도 두려워하는 표정은 하지 않았다.
도적처럼 살고 있으나 그들 모두는 온갖 전쟁과 약탈을 통해 만들어진 정예병에 가까웠다.
심지어 말을 타고 있는 우키다와 부대장급들은 고가의 갑옷을 입고 있어서 어지간한 화살과 칼은 들어가지도 않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젠장(くそたれ)! 아무도 없잖아.”
“여기도 눈치채고 도망간 거 아냐?”
“어쩐지 인기척이 하나도 안 보이더라니.”
“가는 섬마다 텅 비어 있는 것이 이상합니다.”
하지만 조금 전에 들린 마을과는 달랐다.
그곳은 사람들을 아예 육지로 옮긴 것 같아 보였으나 이곳은 오랫동안 비운 게 아니었다.
몇몇 집의 아궁이에는 불길이 아직 타오르고 있었고 심지어 밥을 먹다 말고 자리를 떴는지 상까지 차려놓은 채 그대로 남겨진 집도 있었다.
모두가 한순간에 갑자기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마을 사람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십중팔구 근처에 숨어 있기 마련이다.
우키다는 잠시 마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마을 뒷편에 있는 산에 시선이 꽂혔다.
사람은 대부분 위기 상황에서 비슷한 선택을 한다. 지금까지 그의 경험상 산 부근에 있는 골짜기와 동굴 같은 데 숨어 있을 거다.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일단 마을에서 챙길 수 있는 것부터 챙긴 뒤에 인간 사냥을 간다. 서둘러라!”
그의 지시가 떨어지자.
왜구들은 마을을 탈탈 털기 시작했다.
돈이 될만한 것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하지만 포구 마을에 별다른 게 있을 리 없었다.
기껏해야 말린 생선과 해산물 그리고 쌀과 잡곡 정도가 전부였다. 바다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굳이 가져갈 이유가 없었다.
이곳까지 오며 질리도록 먹은 게 생선이다.
슬슬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우키다는 마을에 불을 놓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꼭꼭 숨겨놔서 못 찾은 거라면 아무도 가질 수 없게 하는 것이 속이라도 시원할 것 같았다.
하지만 몇 걸음 움직이기도 전에 멀리서 날아온 화살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화살 특유의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뱀이 숨을 내뱉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그제야 우키다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크아악!”
“제길, 도대체 어디서 쏘는 것이냐?”
“다들 집 뒤편으로 피해라!”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며 우키다가 외치자.
병사들은 저마다 살길을 찾아서 흩어졌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말을 탄 이들의 대부분이 낙마를 하고 말았다. 화살의 상당수가 그들을 노리고 있었던 탓이었다. 대부분은 갑옷을 뚫지 못하였으나 말까지 보호할 수는 없었다.
그 결과 수십 마리의 말 중에 대다수가 화살에 맞아 쓰러졌고 기병 대부분이 땅을 뒹굴었다.
우키다는 그걸 보고 아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전투용으로 쓸 수 있는 한 필의 말은 어지간한 사람의 목숨값보다 더 비쌌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수십 명에 달하는 왜구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는데 그들 중에 대부분이 방패를 들고 있지 않았기에 피해가 상당히 컸다.
고통에 신음하는 이들을 서둘러 옮기자.
날아오던 화살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쯤 돼서 고개를 내민 우키다는 깜짝 놀랐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어느 사이에 바다를 제외한 삼 면에서 마을을 완전히 포위하고 서 있는 수많은 고려군이었다.
다리가 세 개인 검은 까마귀가 그려진 삼족오 깃발을 들고 완전 무장한 병사가 대열을 맞춰서 다가오는 모습은 정말이지 등골이 오싹했다.
그때 멀리 흑마를 탄 남자가 보였다.
입고 있는 옷만 봐도 상당히 고귀한 신분인 것 같았는데 주변에 있는 호위가 적지 않은 거로 봐서는 확실히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의 외모가 조금 이상했다.
상투나 변발은 전혀 없고 다들 머리카락이 짧았는데 그렇다고 승병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일단 그들이 입고 있는 갑옷이나 무기가 정규군 수준은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평소 한참 아래로 여기던 고려군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들은 방패를 들고 다가오면서도 틈틈이 화살을 쏘았는데 그 수가 많지 않아도 고개를 내밀고 있는 이들을 정확하게 맞췄다.
심지어 등 뒤에서 화살이 날아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잡을 수도 없는 것이 자리를 벗어나면 어김없이 화살 세례를 받고 있었다.
우키다에게도 몇 대의 화살이 날아와 투구의 상단을 비켜 맞아서 튕겨 나갔을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 삼족오 깃발은 오십 보 거리까지 다가왔고 그쯤 되자 흑마를 탄 남자가 칼을 치켜들며 외쳤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돌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