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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3화 (13/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3

도대체 언제 조일신이 폭주를 할까.

내 관심은 오로지 거기에 쏠려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원나라에서는 김원지첩목아(金元之帖木兒) 등이 원나라의 내란을 막기 위해 고려의 정남병 10만을 징발할 것을 주청하였다.

원래의 역사에서는 황실에 있던 고려인이 겨우 막아냈으나 이번에는 최유를 미리 처단한 덕분인지 황제에게 주청이 닿지도 않았다.

그렇게 한 차례 고비를 넘겼으나.

당장은 원나라보다 왜적이 더 문제였다.

조만간 본격적인 침략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소규모 선단은 치고 빠지는 전략을 사용하지만, 수십 척이 넘는 대형 선단은 정말 골치 아팠다.

심각할 때는 아예 내륙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재물과 식량을 털어가는데 곱게 가는 것도 아니고 모든 걸 불태우고 노예로 끌고 간다.

심지어 현재 고려는 전문적인 수군이 편성조차 되어있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상륙해도 문제인 게 전투력에서도 밀리고 있었다.

‘타인에 의한 오랜 평화 때문이지.’

백 년 전까지는 고려가 이 정도는 아니었다.

몽골을 상대로 죽을힘을 다해서 싸우던 과거는 이미 오래전이고 항복한 후로는 역설적이게도 평화가 상당히 오래 지속되고 있었다.

북쪽에서는 쌍성총관부가 여진을 막고 있었고 남쪽의 왜구도 지금처럼 극성맞지는 않았다.

더구나 원나라의 견제도 있었기에 고려의 군대는 형태만 남아 ‘백성은 있으나 군인은 없다’는 유민무군(有民無軍) 상태가 계속되었다.

이 무렵에는 무장을 각 지역에 파견해서 농민을 징발하는 것이 유일한 방어책이었다.

그래서 나온 방안이 강무(講武)였다.

강무란 왕이 친림하여 진행하는 군사 훈련이자 수렵 대회인데 정기적으로 시행하던 조선과 달리 고려에서는 자주 행하는 편은 아니었다.

두 시대의 성격도 상당히 다른 편이었다.

사냥을 통해 군사 훈련을 하던 조선과 달리 고려는 불교의 영향 탓에 쓸데없는 살생은 하지 않고 대열(大閱)이나 습진(習陣) 위주였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강무를 하겠다고 나섰다.

당연히 그에 대한 반대가 상당히 많이 나왔다.

내가 직접 강무에 참가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보다는 그럴 만한 돈이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에는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고 원래 내가 의도했던 대로 홀치와 응양군을 위주로 편성하는 데 성공했다. 궁궐을 아예 비워놓을 수 없기에 숙위는 용호군과 순군만호부과 함께 홀치 몇 명이 남아서 맡기로 했다.

“전하, 차를 내왔습니다.”

궁궐을 떠나 강무를 나선 첫날.

승천포에 있는 승천궐에서 잠시 쉬자.

신소봉은 눈치 좋게 따뜻한 차를 내왔다.

궁궐 너머에서는 포왜사 김휘남이 동원한 서른 척 남짓한 배가 끊임없이 오가면서 강화도 쪽으로 병력을 옮겨주고 있었다.

강무가 섬에서 진행되는 것은 정말 흔하지 않은 일인데 그런데도 그곳으로 강행하는 핑계는 섬 곳곳에 나타난 야저(野猪, 멧돼지) 때문이었다.

“진짜 야저를 잡으실 거는 아니시죠?”

“못 할 것도 없지.”

“사냥을 하실 거면 그냥 매와 사냥개를 활용한 응렵(鷹獵)과 견렵(犬獵)을 하시는 게 훨씬 더 안전하고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그런 거 안 좋아하는 거 알지?”

“애초에 강무에도 관심이 전혀 없으셨던 분이죠. 전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날마다 새로운 느낌입니다.”

신소봉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나는 크게 웃었다.

이제 1년 정도 되었는데 적응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었는데 궁궐내에서 나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이는 신소봉이 유일했다.

내가 기분이 좋아 보였는지 신소봉은 슬쩍 이제현이 다시 사직 의사를 밝혔다고 알려줬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원래의 역사에서도 그랬는데 뭐가 불만인지 사직서를 품고 다니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번에는 무슨 핑계를 대던가?”

“낙마를 했다고 합니다.”

“흥! 그걸 믿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겠지. 겨우 석 달 만에 포기할 거면 아예 시작을 말았어야지. 절대로 놔줄 생각이 없어.”

그가 재야로 내려가면 문제가 생긴다.

현재 그가 가진 명성이면 순식간에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유학자를 양성할 것이다.

이미 환갑이 넘어선 고령인 이제현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차라리 죽도록 바쁘게 해서 엄두조차 못 나게 할 생각이다. 그때 정세운이 들어와 현재 상황에 대해서 보고했다.

“전하, 응양군이 도강(渡江)을 끝냈습니다.”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 차례는 내가 건너는 것이다.

그런 후에 홀치까지 넘어오면 끝인데 이게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배 한 척당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이들은 많이 잡아야 마흔 명이다.

더 많이 실을 수 있으나 식량과 게르 그리고 말까지 있으니 그 정도가 한계였다.

현재 강무에 참가한 인원은 대략 천 오백 명이니 서른 척의 배가 적어도 한두 번은 군사를 싣고 반대편으로 옮겨줘야 했다.

그렇다고 한 번에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접안 가능한 배가 한두 척이 전부라 다른 배는 닻을 내리고 멀리서 기다리다가 노를 젓는 이들이 지치면 교대를 해주고 있었다.

다리라도 있다면 정말 편할 텐데 이 시대는 비용은 둘째치고 그런 기술조차 없었다.

괜히 고종이 강화 천도를 한 게 아니었다.

생각보다 강을 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곳의 강폭은 약 5리(2km) 정도다.

멀지도 짧지도 않은 어중간한 거리였다.

이번 강무에서 호위를 책임지고 있는 최영과 신소봉 등을 대동하고 배에 올라탄 후에 조강(祖江, 한강 하구)을 건너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내가 올라탄 배가 건너편에 닿자 포왜사 김휘남은 안도하는 눈빛이었는데 배에서 내리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과인이 시킨 일은 다 처리되었소?”

“물론이옵니다. 교동(喬桐) 갑산창(甲山倉)은 비웠고 도강을 모두 마치면 벽란도 부근에서 물건을 싣고 이 부근에 정박할 것이옵니다.”

“수군도 강무를 한다고 생각하고 실전처럼 궁시와 무기를 챙기시오. 그리고 반드시 늦지 않게 와야 하오.”

김휘남은 알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 확답을 받은 후에 배에서 내리자 응양군이 숙영에 필요한 물품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 편에는 십여 마리에 말이 세워져 있었는데 당연히 그중에는 승마를 담당하는 봉거서(奉車署)에서 가지고 온 내 말도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털을 가진 흑마였는데 생각보다 영리해서 말을 탈 때면 항상 함께하고 있었다.

“일단 아영지로 갑시다. 이럇!”

내가 말에 올라타서 달리기 시작하자.

최영과 숙위군이 서둘러 뒤를 쫓아왔다.

보통은 호위하는 이들이 선두에 서야 정상이나 먼저 도착해서 이동 중인 응양군이 길 곳곳에 있어서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일단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숙영을 하게 될 궁지였는데 생각보다 상당히 넓었다.

하지만 궁궐이었다는 것이 무색했다.

멀쩡한 곳은 전혀 없이 폐허만 남아 있었다.

40년 가까이 궁궐로 사용했으나 개경으로 환도하며 모든 것을 파괴해야 했기 때문이다.

원나라에서 내건 조건이었는데 다시 또 강화에 숨어들지 못하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백 년 사이에 강화는 상당히 많이 바뀌었다.

강화 천도 후에 농사지을 곳을 만들기 위한 간척 때문이었다. 갯골을 매워 놓은 상태라 지형 자체가 완전히 달라질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 마니산이 있는 고가도는 연결되지 않았기에 미래에 내가 보던 지형은 아니었다.

“마제(禡祭) 준비를 마쳤사옵니다.”

궁지에 도착해서 주변을 살필 동안.

치우신에게 올릴 마제에 대한 준비를 마쳤다고 신소봉이 알려주었다. 마제는 보통 강무를 행하기 하루 전에 하는 의식이었다.

이걸 하기 위해서 곰 가죽으로 된 방석이며 의례용 궁시와 커다란 기까지 들고 와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런 것은 그냥 안 하고 싶었으나 사기 때문에 무시하기도 애매했다.

최대한 간단하게 마제를 마치자.

해가 떨어져서 야영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날 겪은 밤의 추위는 생각보다 엄청났다.

군대에서 경험한 혹한기 훈련보다 하드코어한 느낌이었는데 입는 옷이 부실한 병사들은 그냥 추위에 노출되어 있다고 봐도 되었다.

아직 시기가 안 맞아서 심지 못하고 있는 목화씨를 서둘러서 재배해야 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해가 뜨자 상황은 달라졌다.

기상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리자 자연스럽게 홀치를 선두로 하여 다들 달리기 시작했다.

최근 병사들의 일과는 언제나 뜀박질로 시작하고 있었는데 나도 얼어 있던 몸을 풀기 위해서 그들과 함께 땀을 흘리며 뛰었다.

“멋있는 사나이~ 많고 많지만!”

그들은 심지어 군가까지 불렀다.

내가 홍귀를 가르치며 알려준 것인데.

다시 병사들에게 전해져서 생긴 일이었다.

당연히 가사의 일부는 바꿔야 했는데 문제는 저마다 소속이 다른 탓에 홀치와 응양군은 경쟁하듯 목청껏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원래는 백여 명에 불과하던 응양군이었지만, 충원이 되어 홀치와 인원 차이는 거의 없었다.

이건 자존심의 싸움이었다.

고려 최강이라 불리던 응양군이다

하지만 그런 명성은 옛말이 된 지 오래됐다.

최근에 모의 전투가 이뤄지면 응양군은 홀치의 상대가 되지 않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훈련량과 개인 역량 차이가 상당했다.

그와 더불어 소규모 단위 전투의 조직력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홀치가 우월했다.

제각각 싸우는 응양군과 달리.

홀치는 최소 다섯 명 단위로 움직였다.

등패병은 전열에서 방어에 집중했고 환도를 쥔 이들은 방패 사이로 들어오는 이들을 막았다.

가장 중요한 역할은 창병이었는데 그들은 빈틈이 보이면 망설이지 않고 창을 찔러 넣었다.

심지어 누군가 쓰러져 빈자리가 나오면 순식간에 그 자리를 채울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일부 병사들은 무기까지 바꿔 들면서 싸우고 있었으나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더구나 주덕유가 몇 명의 홀치를 끌고 별동대를 운영하여 측면과 후면을 교란하니 응양군은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경우가 잦았다.

3일째가 되는 날까지 여섯 번의 모의 전투가 있었는데 매번 홀치가 이기자 결국에는 새롭게 편입된 응양군도 납득할 수 밖에 없었다.

평소 욕이 나올 정도로 빡빡한 훈련의 효과를 직접 눈으로 보니 불만을 제기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응양군이 늘어난 만큼이나 홍귀에게 맡겨지는 훈련량이 과할 정도로 늘어났다.

이방실에게서 강무의 성과를 보고 받던 중에 나는 그 문제를 지적했다.

“아무래도 천오백 명이 넘는 수를 열 명의 홍귀가 맡는 것은 조금 과하오.”

“적임자로 몇 명 뽑아서 양성하겠사옵니다.”

“그렇게 하시오. 허나 멈출 때를 모르는 자는 뽑으시면 안 되오.”

몸이 상할 정도로 굴릴 필요는 없었다.

사람마다 한계치도 다르기에 그 경계선을 잘 찾는 이가 홍귀에 가장 잘 어울렸다.

그 이야기까지 해준 뒤에 나는 바닥까지 떨어진 응양군의 사기를 챙겨줘야 했다.

“과인이 음식과 술을 내릴 테니 상장군은 가서 응양군의 병사들을 다독여주시구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방실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물러서자.

게르 밖에 무예 경연의 우승자가 기다리고 있다며 신소봉이 들어와서 알려주었다.

이번 강무에서는 최고의 무사를 뽑는다는 명목으로 토너먼트 형식의 대련을 했다.

두툼한 천막을 걷어내고 밖으로 나가자 두 명이 부복한 상태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종목은 검술과 궁술 두 가지였다.

검술은 당연히 변안열이 손쉽게 차지했다.

주덕유는 변칙적인 공격을 무기로 8강까지는 올라왔으나 어린 시절부터 무예를 익힌 무관을 이기는 것은 아직은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궁술은 예상외의 인물이 우승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감찰사 소속의 황상이 이길 줄을 몰랐는데 이인복이 보낸 밀서(密書)를 가져왔다가 우연히 참여해서 덜컥 우승까지 차지해버렸다.

역시 그의 활 솜씨는 명불허전이었다.

황상은 이성계 못지않은 명궁으로 유명했다.

나중에 이성계가 휘하에 들어오면 두 사람의 활 솜씨를 겨뤄봐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들에게 잘 만들어진 칼과 활을 내려주며 앞으로 고려를 지키는 데 힘쓰라며 축하해줬다.

두 사람 모두 크게 기뻐했는데 내가 쓰던 물건이라는 의미도 있었으나 최고급 무기를 구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모두가 화기애애하던 그 순간.

멀리서 말 한 필이 빠르게 달려왔다.

서쪽 해변에 세운 망루 쪽에서 오는 것 같았는데 상당히 급한 일이 생긴 것 같았다.

진영 안까지 들어온 말을 최영이 나서서 멈춰 세우고 말에 타고 있던 이와 몇 마디 나누더니 이내 내가 있는 쪽으로 급하게 달렸다.

평소답지 않게 꽤 당황한 표정이었다.

“전하! 근방에 왜구가 나타났다 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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