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2
개경 동부에 있는 정승동.
그곳에는 재상의 상당수가 산다.
괜히 마을의 이름이 정승동이 아니었다.
그곳에서도 유난히 커다란 저택이 있었다.
끝이 안 보이는 규모를 보면 누가 봐도 권신의 집으로 보였는데 개경 사람이라면 궁궐 같은 저택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이가 없었다.
고려를 좌지우지하는 기씨 가문의 수장인 덕성부원군 기철이 사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원나라 황실의 황후가 된 누이.
훗날 영안왕에 봉해질 아버지 기자오.
그들은 고려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지만, 한편으로는 원 황실에 소속된 가족이다.
고려의 왕보다 원나라에서 더 큰 우대를 받는 이들이니 위세가 등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기철의 눈에 들기 위해서 양손 가득하게 재물을 들고 찾아오는 이들이 수없이 많을 정도였다. 상황이 이러니 일부 사람들은 실질적인 고려의 왕은 기철이라 여길 정도였다.
문제는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못 할 것도 없지.’
하지만 그걸 굳이 드러내진 않았다.
허수아비 같은 왕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어차피 고려의 문무백관 모두가 원나라를 등에 업은 자신을 두려워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러니 굳이 정점에 설 이유를 못 느꼈다.
부와 권력 그리고 명예까지 모든 것을 가진 탓에 오히려 고려는 자신에게 너무 작아 보였다.
차라리 썩을 대로 썩은 이딴 고려보다.
원나라와 근접해 있는 심양왕이 탐났다.
토지의 면적이나 인구를 비교해봐도 고려에 비해서 부족하다고 여겨지진 않았다.
무엇보다 대도와 가깝다는 게 가장 좋았고 심지어 선왕이 물러난 후로 심양왕의 자리는 아직 비어있는 상태였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노복 하나가 손님이 왔다고 알려주었다.
누구냐고 묻자 노복은 前 판삼사사(判三司事)권겸과 좌정승까지 올랐던 노책이라 했다.
두 사람 모두 기철의 당파(黨派)에 소속된 이들이자 목소리를 대신하는 수하였다.
“각하를 뵈옵니다.”
방안으로 두 사람이 들어서자.
자연스럽게 엎드려 인사를 올렸다.
그런 후에 그들은 도포 자락을 살짝 들어 뜨거울 정도로 달아오른 바닥에 주저앉았다.
기철이 사는 집은 겨울이 되어도 더워서 땀을 흘릴 정도였는데 실내 장식품만 봐도 어지간한 재추의 녹봉으로는 엄두가 안 날 정도였다.
온갖 진기한 것들이 가득했는데 이 정도면 오히려 왕실보다 더 화려한 것 같았다.
“어서들 오시오. 그런데 기별도 없이 이렇게 이른 아침에 어인 일로 찾아오셨소?”
“우려되는 일이 있어서 급하게 각하와 논의가 필요할 것 같아서 달려왔습니다.”
“뭘 그렇게 심려한단 말이오?”
기철은 나른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면서 화려하게 장식이 된 퇴침(退枕)에 몸을 기대었는데 지난 밤에 묘한 꿈을 꾸어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탓에 살짝 졸렸다.
꿈속에서 그는 전에 본 적도 없는 생소한 집에 있었는데 아무리 도망치려고 애써도 갇혀서 나올 수 없었다. 그게 어찌나 생생한지 아직도 그걸 떠올리면 섬뜩할 정도였다.
잠시 정신을 딴 데 팔고 있던 그에게 권겸은 최근에 개경에서 은연중에 퍼지고 있는 소문을 언급했다.
“감찰사와 이인복의 움직임이 요즘 들어 심상치 않습니다.”
“고작 그것 때문이라면 실망이오. 첨의찬성사 전윤장이 그간 벌인 일 때문에 탄핵당할 거라는 것은 다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지 않았소.”
“그런 수준이 아닙니다.”
“다들 처음에는 의욕이 가득하잖습니까. 그냥 철모르는 주상(主上)의 과욕에 불과합니다. 이제 곧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되겠죠.”
별거 아니라는 듯이 기철이 반응하자.
권겸은 그런 게 아닌 것 같다며 말을 덧붙였다.
“궁궐에 심어둔 내관도 그렇고 감찰사에 심어둔 행정실무 말단인 서령사(書令史)도 최근 들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감찰 어사들을 이곳 정승동 근처에서 봤다는 이도 있고 심지어 대성대왕(大成大王, 광종) 때처럼 대대적인 숙청이 머지않아 일어날 거라 믿는 이들도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
광종은 피의 숙청을 두 차례나 벌였다.
당시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 구신(舊臣) 중에 살아남은 자가 40여 인에 불과했다.
하옥시킬 공간조차 터무니없이 부족해서 임시로 옥(獄)을 만들 정도였는데 일부는 그의 묘호에 미칠 광(狂)자를 붙여 광종(狂宗)이라 불렀을 정도였다.
“대대적인 숙청이라··· 왕권을 강화하려면 그게 가장 빠른 지름길이긴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될 것 같습니까?”
“절대 가벼이 볼 일이 아니옵니다.”
노책도 옆에서 권겸의 말을 거들었다.
하지만 기철은 웃고만 있을 뿐이지 귀담아듣지 않고 있었는데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이미 수년 전에 기씨 집안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정해년(丁亥年)의 일을 잊으셨소? 당시에 본인의 아우인 기주와 족제(族弟)인 기삼만을 건드렸다가 어떻게 되었지요? ”
당연히 다들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
불과 4년 전의 일이었고 그 여파는 꽤 컸다.
기삼만을 심문하다가 사망케 만든 서호와 전녹생은 행성이문소(行省理問所)에 갇혔고 원나라 관원이 고려를 한바탕 휘젓고 돌아갔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당시에 관련된 이들을 참수하거나 멀리 유배를 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책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 개경현과 경기에 분산해 놓은 사병을 모두 개경 안으로 불러들이시죠.”
“큰일 날 소리, 역모죄가 두렵지 않은가! 아무리 이빨 빠진 호랑이라도 방심하면 아니 되네.”
“그래도 손 놓고 있다가 당하게 되면···”
권겸과 노책은 불안한 표정이었지만,
기철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현재 중원과 강남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아직 원나라는 건재한 상태다. 감히 자신을 건드릴 용기를 가진 이는 고려에 없다고 여겼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기철은 그들에게 어느 때보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현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줬다.
“무슨 걱정을 그리하시오. 언제든 끌어내릴 수 있는 것이 이 나라의 임금이오. 최근 10년 사이의 일들을 벌써 모두 잊으셨소?”
* * *
1352년 2월 초하루.
드디어 즉위 교서 발표되었다.
즉위하고 처음으로 발표하는 교서였다.
그곳에 적히는 내용은 새로운 임금이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 건지 예고하는 것이 보통이다.
내가 작성한 내용도 공민왕이 배포한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는데 핵심적인 내용은 사리사욕만 채우는 간신은 혁파하겠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더불어 대언(代言)의 정기적 건의와 각 관청의 보고는 직접 받기로 했다.
당연히 업무량은 대폭 늘어나겠지만,
아직은 믿고 맡길 이가 많지가 않았다.
그나마 가장 큰 결심을 했던 것은 인사권을 독점하고 있는 정방(政房)을 혁파한 것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문무전주권(文武銓注權)은 전리사와 군부사로 나눠주고 그 자리에 청렴하기로 유명한 백문보와 안보를 내정했다.
이 시기에는 돈을 주고 관직을 사거나 승진을 하던 폐해가 너무 심각했는데 그들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도 이젠 끝이지.’
최근에 감찰사가 눈에 불을 켜고 다녔다.
눈치 빠른 이들은 벌써 몸을 사리고 있었는데 아무리 숨기려 해도 감찰사를 대놓고 정탐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덕분에 응양군에서도 일부 인력을 그쪽에 지원을 해줘야 했을 정도였다.
그런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는데 부패의 증좌를 잡아낸 탐관오리가 너무 많아서 고민될 정도였다. 있는 그대로 모두 잡아 족치면 관직에 있는 이들의 대부분이 사라지게 생겼다.
“나라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도둑이 너무 많다고 하더니 틀린 말은 아니네.”
저절로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러니 고려가 머지않아 망했던 거겠지.
괜히 왜구과 원나라만 탓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건 안에서부터 좀먹기 시작해서 기둥과 주춧돌마저 흔들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인복이 몰래 올린 서신에 쓰인 이들의 이름을 보던 나는 답답해서 더는 앉아있을 수 없었다.
선정전(宣政殿)을 나와 곧장 향한 곳은 본궐의 북쪽에 있는 후원이었다. 금원(禁園)이라고도 불리는 그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그런 덕분에 쉬기 적당해서 마음이 심란할 때면 종종 찾는 곳이었다. 개경의 후원을 대표하는 산호정(山呼亭)에 올라 기대니 살 것 같았다.
비록 정자 아래의 호수는 얼어붙었으나 오히려 풍경은 좋았다. 최근에는 날이 너무 추워져서 개인적으로 하던 운동도 잠시 쉬고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짧게나마 나와서 산책하는 것이 요즘 내가 가지는 유일한 낙이었다.
하지만 잠시의 휴식마저 방해를 받았다.
“전하, 참리 조일신이옵니다.”
신소봉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자.
조일신이 허리를 숙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무나 들어올 수 없기에 금원이라 불리는 곳인데 저런 자까지 마음대로 들어오는 것을 보니 이름값을 전혀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더구나 그를 보니 두통마저 밀려왔다.
현재 눈에 거슬리는 이들을 뽑으면 가장 윗줄에 기철과 함께 이름이 올라가는 조일신이다.
하지만 그런 표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오히려 무척이나 반가운 목소리로 조일신을 산호정 위로 불러서 맞이했다. 지금은 자신이 나의 최측근이라 착각하게 만들어야 한다.
안 그래도 수종공신 중의 하나인 전윤장을 날려 버리고 그가 부정하게 모은 재산을 압류했다.
같은 수종공신이라도 자신의 사람은 아니라 조일신에게는 전혀 타격은 없었겠지만, 언제 버려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겼을 것이다.
그 의심이 확신이 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어인 일로 후원까지 오셨소?”
“근래 들어 너무 과로하는 것은 아닌가 문무백관 모두가 염려하고 있사옵니다.”
“이제 겨우 며칠 지났을 뿐이오.”
“소신이 항상 곁에 있사오니 작은 일이라도 맡겨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흡족한 게 아니라 어이가 없었다.
고양이한테 생선 가게를 맡기란 이야기였다.
엎드려 있던 조일신은 그런 나의 표정은 보지 못했는데 겁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산호정 난간까지 다가와 나란히 기대어 섰다.
‘이게 아주 기어오르는구만!’
조일신의 이런 모습이 낯설지는 않았다.
이렇게 대놓고 건방을 떠는 것은 처음이지만, 사료에서 이런 비슷한 행동을 했다는 것은 봤다. 그런데 직접 당해 보니까 이게 생각보다 빡치는 일이었는데 당연히 내 주위를 지키고 있던 최영과 홀치는 얼굴이 붉어지며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심지어 최영은 당장 베어버릴 생각인지 허리춤에 손을 올려서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슬쩍 고개를 저으며 말렸다.
지금은 그 분노를 터트릴 때가 아니었다.
오히려 조일신에게 미소를 지어주고 먼 곳을 바라보며 땅이 꺼질 것처럼 크게 한숨을 뱉었다.
그러자 그는 왜 그러냐고 물어왔다.
“과인이 답답해서 그러오.”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지요?”
“어떻게 해서든 황제 폐하와 약조한 것들을 지키고 싶으나 쉬운 게 없구려. 뭐 하나 하려 해도 오히려 눈치를 봐야 하다니···”
“도대체 어느 불충한 자가 전하의 심기를 이렇게 흐려 놓는단 말입니까?”
“요즘 기씨 일가의 횡포 때문에 과인이 잠이 오질 않소이다. 폐하와 혈연을 맺었다고는 하나 고려인이라는 것을 잊은 듯하오. 그들이 도당에 있으니 과인이 마음대로 움직이기 어렵소.”
지금은 연기력이 필요한 순간이다.
내가 이러려고 왕이 된 거냐고 하소연을 시작하며 눈물까지 글썽일 정도로 몰입했는 조일신은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분노했다.
내 모습이 안쓰러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쌓아온 불만이 덩달아 터진 것이었다.
실제로 조일신도 기철 등의 견제 때문에 생각보다 자리를 잡는 것이 힘든 요즘이었다.
원 제국에서 환궁을 할 때만 하더라도 개경에 도착하면 모든 권력을 가질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만큼 기씨 가문의 위세는 대단했다.
그의 말 한마디가 어명보다 더 강력할 때가 있었다. 만약에 그만 없어진다면 자신의 세상이 열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 조일신은 내 눈치를 살피며 눈알을 굴리기 시작했다.
내가 이 정도의 반응을 보였으니 어느 정도 교감이 있었던 거라 오해를 하는 것 같았다.
그의 눈에 차츰 살기가 맴돌자 나는 그의 머릿속에 있는 시한 폭탄이 가동되었음을 깨달았다. 이로써 9월에 터질 임진정변이 어느 정도 당겨진 건지 알 수 없으나 그리 오래 기다리진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머지않아 폭주하기 시작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