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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9화 (9/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9

쇠와 가죽을 다루는 군기감(軍器監).

그곳은 항상 뜨겁고 시끌벅적한 곳이다.

오늘도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한겨울인데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일하는 이들은 다들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정도였다.

군기감에서 만드는 것은 상당히 다양했다.

갑옷, 꽹과리, 궁시 그리고 실과 같이 군대에서 쓰이는 모든 물건은 그곳에서 만든다.

그때 환관 한 명이 무사 몇 명과 함께 군기감이 있는 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당연히 장인들의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환관 같은 이가 오는 일은 정말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그중의 몇 명은 환관의 얼굴을 알아봤다.

“저 사람 혹시 신소봉인가 하는 그이 아닌가.”

“전하에게 가장 총애를 받는 그 환관?”

“그런 사람이 왜 여길 오겠나.”

“하긴 불티가 날리는 이런 곳에 올 만한 이는 아니지.”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어긋났다.

군기감에 방문한 환관은 신소봉이었다.

그는 좌우를 한번 살피다가 자신을 흘깃거리며 바라보는 이들에게 다가갔다.

“여기에 최무선이란 자가 있소?”

장인들은 그를 왜 찾는지 궁금했지만,

신소봉 뒤에 서 있는 응양군 무사들의 기에 눌린 건지 곧장 연장(鍊匠)들이 모여 일하는 곳을 가리키며 그쪽에 있다고 알렸다.

솔직하게 말하면 신소봉도 궁금했다.

갑자기 왜 군기 녹사 따위를 찾으시는 걸까.

군기감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이도 아니고 겨우 녹사에 불과한 말직이었다.

하지만 그런 의문은 의미가 없었다.

자신은 시키는 일만 잘 처리하면 된다.

전하께서 자신에게 해준 말이 있기 때문이다.

환관으로서 지켜야 할 선만 넘지 않는다면 항상 곁에 두겠다는 약조였다. 신소봉도 원 제국에서 보낸 시간이 많았기에 무슨 말인지 잘 안다.

대부분의 환관은 자연스럽게 권력의 덫에 빠지게 되고 그 끝은 언제나 처참했다.

“가서 찾아보시오.”

함께 온 응양군의 무사에게 말하자.

그들은 연장들 사이로 들어가더니 머지않아 상당히 젊은 청년 한 명을 데리고 나왔다.

최무선은 물론이고 같이 일하던 연장과 군기감에 있는 장인들 상당수가 무슨 일인지 깜짝 놀란 얼굴로 멀리서 지켜봤다.

신소봉은 앞으로 나서며 최무선에게 물었다.

“자네가 영주(永州) 출신의 최무선 맞는가?”

“맞습니다. 혹시 제가 무슨 죄라도 지은 겁니까.”

“그런 거는 아니고 당장 가볼 곳이··· 흐음! 일단 그 의관부터 단정하게 갖추고 나오게.”

최무선의 옷은 상당히 지저분했다.

조금 전까지 작업하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얼굴에는 숯검정까지 묻어 있기에 이대로 전하에게 데려가는 것은 힘들 것 같았다.

그는 일단 최무선의 의관을 갈아입힌 뒤에 내가 있는 보평청으로 그를 데리고 왔다.

“군기녹사 최무선이 전하를 뵈옵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딱 봐도 상당히 긴장한 것 같아 보였다.

들어설 때 얼굴을 살짝 살펴보니 아직 나이가 상당히 젊어 보였다. 그래도 눈이 부리부리하고 고집이 센 기질도 살짝 엿보였다.

잠시 계산을 하니 나보다 다섯 살쯤 많았는데 그래 봐야 아직 20대 후반 정도에 불과했다.

훗날 그가 오랜 설득 끝에 화통도감이 설치된 것이 1377년이니 원래는 25년쯤 지난 뒤에야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고 봐도 되었다.

“소문에 의하면 자네가 폭죽에 상당히 관심이 많다고 들었다.”

“그러하옵니다. 소신이 어린 시절부터 화산희(火山戱)에서 사용하는 폭죽에 관심이 상당히 많았사옵니다.”

“그래서 벽란도에서 원나라 상인을 붙잡고 화약의 제조법을 묻고 다닌 건가?”

“죽여주시옵소서!”

최무선은 곧장 머리를 처박았다.

이 시대의 화약은 국가의 비밀이었다.

아직 고려에서는 대량으로 화약을 제조하는 방법은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원나라를 통해 들여오는 화약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문제는 이걸 빌미로 원나라에서 트집을 잡을 수 있기에 상당히 심각한 일로 여겨질 문제였다.

그런데 그걸 캐묻고 다녔던 것을 들켰기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랬던 건가?”

“작게는 원나라에서 비싸게 사 오는 폭죽을 직접 만드는 것이옵고 크게는 그들이 개발한 화포를 우리도 준비해야 한다고 사료되옵니다.”

“화포가 그리 중요한가?”

“근래 들어 왜구가 세력을 크게 키워 준동하기 시작했고 여진도 호시탐탐 우리 고려를 노리고 있사오니 그 어느 때보다 외침에 대한 방비가 필요합니다.”

최무선의 의견이 틀린 곳은 없었다.

실제로 훗날 그가 만든 화포로 직접 왜구를 크게 물리쳐서 한동안 고려를 향한 대규모 침략이 대폭 줄어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현재 최무선이 가진 화약에 대한 지식은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다.

당연히 아직 기초 단계도 못 벗어났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화약의 제조는 어디까지 배웠는가?”

내 질문에 최무선은 답을 주저했다.

그러다가 부끄럽다는 듯이 머리를 조아렸다.

예상대로 그는 아직 화약의 기본 원리조차 거의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 관심을 가지고 있는 단계였던 것 같았다.

지금 당장 그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가 20년 가까이 겪었던 시행착오를 대폭 줄여줄 방법이 있기는 했다.

“현재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

“화약에 들어가는 재료가 염초와 숯 그리고 황이라 합니다. 그런데 그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고 염초를 구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과인이 원나라에 있을 당시에 염초장을 몇 번 만날 일이 있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적어둔 것이 있으니 참고하거라.”

고개를 돌려서 신호를 보내자.

환관 안도치가 그에게 쪽지를 건넸다.

거기에 적힌 내용은 내가 기억하는 대략적인 화약의 혼합 비율과 함토를 이용한 염초 제작 방법에 대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초전이나 화약을 코닝하는 방법은 적어두지 않았다.

거기까지 가려면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내가 비록 사학과를 다녔지만,

그래도 이 시대의 사료는 거의 읽었다.

최무선과 그의 화포가 가지는 의미가 작다고 말할 수 없기에 정확하진 않아도 어느 정도는 기억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화약을 만들어 보진 않아서 부족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건 이제부터 그가 보완해야 할 것이다.

최무선은 내가 준 쪽지를 보고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걸로 끝은 아니었다.

아직 놀라기는 조금 성급한 감이 있었다.

“군기녹사 최무선을 금일부로 내수사의 부사로 임명하니 앞으로 화약의 개발에 힘쓰거라.”

화약의 개발은 극비에 부쳐야 했다.

보는 눈이 많아 군기감에서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내수사의 관리로 임명하여 별도의 공간과 재원을 마련해주기로 했는데 외부에는 폭죽을 만드는 곳으로 위장을 할 생각이었다.

당연히 녹사에 불과했던 최무선이 정5품에 해당하는 부사 자리를 마다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관직보다 본격적으로 화약을 만질 수 있다는 것에 더 기뻐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리고 이걸 가지고 개경 북서쪽에 있는 계정골로 가서 화약을 연구할 수 있는 시설을 최대한 은밀히 만들 거라.”

나는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서 건넸다.

그 안에는 은병(銀甁)이 몇 개 들어 있었다.

내수사에 있던 얼마 안 되는 재물이었다.

함께 일할 이를 선정하는 것도 그에게 맡겼는데 다른 어떤 것보다 안전 수칙을 강조했다.

“연구하는 내용은 매번 정확하게 기록하여 모두에게 공유하되 혹시나 사고로 그 기록을 잃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하시오. 그리고 이 일을 외부에 누설하는 이는 반역의 죄로 다스리겠소.”

평소답지 않게 엄하게 말을 했으나.

그게 그냥 하는 말은 절대 아니었다.

만약에 그런 일이 생기면 피를 보더라도 처결할 생각이었다. 아직 원나라에 휘둘리는 시기라 이번 일은 극도로 조심해야 했다. 최무선도 그걸 알아차리고 바짝 엎드린 채로 대답을 했다.

“소신, 명심하겠사옵니다.”

*

최무선에게 지시가 내려진 뒤.

계정골 깊숙한 곳에 집이 세워졌다.

개경의 북서쪽에 있는 계정골은 상당히 외진 곳으로 최무선과 다섯 명의 동료를 제외하면 아예 접근조차 못 하게 계곡 전체를 막아놨다.

입구에는 이방실이 차출한 응양군 서른 명이 철저하게 지켰고 아예 그 부근을 금산(禁山)으로 지정하여 금양(禁養)하게 했다.

집을 짓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기존에 지어졌으나 비어있던 집이 있어서 보강 공사를 살짝 하는 것으로 끝낼 수 있었다.

최무선까지 모두 합쳐 여섯 명은 그곳에서 먹고 자며 계속해서 화약만 연구하게 될 것이다.

확실히 그들의 열정은 대단했는데 곧장 최적의 조합 비율을 찾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할 것도 많았다

함토를 가지고 염초를 뽑아내야 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일단은 주변 지역의 함토부터 채취해서 끓이기 시작했는데 그 덕분에 계정골은 항상 연기가 자욱할 정도였다.

하지만 당장 성과가 나올 것 같진 않았다.

“솔직히 기대하긴 어렵지.”

국가적인 규모의 지원이 있다면 모를까.

적어도 수년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도 내가 준 약간의 지식이 있기에 원래의 역사보다는 훨씬 빠르게 화약이 대량 생산이 국내에서도 가능할 거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화약만 있다고 화포를 쏠 수는 없다.

적어도 총통과 심지 그리고 탄환 등도 연구해서 개발해야 한다. 한숨을 쉬며 최무선이 보내온 서신을 다시 접어서 내려놨다.

그러자 신소봉이 다른 서신을 내밀었다.

“내수 전수 곽충수의 개신(開申) 이옵니다.”

신소봉이 내민 것을 받아 펼치자.

최근 내수사의 일과 어용 상인 동오에 관련된 사항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구체적인 숫자가 적힌 것은 아니지만, 상황이 그리 좋진 않았다.

최무선에게 들어가는 자금이 적은 편은 아니다.

당연히 내수사에서도 꽤 타격이 있었다.

그나마 좋은 소식은 동오가 내수사의 물품을 싣고 절강행성(浙江行省)으로 떠났다는 것이다.

오가는 일정을 고려하면 적어도 서너 달 이상은 걸릴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한동안 그걸 쥔 채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 부다시리 공주가 간단한 다과를 들고 들어왔다.

얼마 전부터 나는 그녀를 가진이라 불렀다.

공주가 고려식 이름을 지어달라고 해서 왕가진(王佳珍)이라 지어줬는데 마음에 들어 했다.

작명은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원래의 공민왕이 ‘아름다운 보배’라는 뜻으로 지어준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출출하던 참인데 고맙소.”

“얼마 전에 벽란도에서 상인을 만나셨다고요.”

“그건 또 어떻게 아셨소?”

“마침 그날 제 겁령구 가운데 하나가 그곳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제가 도울 일이 없습니까? 궁에 앉아서 하는 일도 없이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진 않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시오?”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대충 감이 왔다.

하지만 혹시 모르기에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원나라의 황족들과 마찬가지로 교역에 상당히 관심이 많이 있었다.

이 무렵의 원 황실은 막대한 자금을 회회인 등에게 투자하여 서아시아 등에서 진귀한 물건을 사들이는 오르탁 무역이 유행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무역을 하겠다는 것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현재의 고려는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재정이 없다.

가진은 내 표정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설마 제가 보석 같은 거를 사들일 생각으로 그걸 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럼 무엇을 하고 싶은 겁니까.”

“저도 이 나라가 어떤 상태인지 잘 압니다.”

하긴 틈만 나면 그녀에게 이 시대의 문제점과 현실에 대해 자주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그 탓인지 그녀는 다른 원나라의 공주와 달리 상당히 검소하게 지내고 있는 중이었다.

따지고 보면 누구보다 더 현대적인 관점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것이 그녀였는데 상업과 기술의 중요성까지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차라리 제가 전면에 나서는 것이 전하와 고려의 입장에서는 더 안전하실 겁니다.”

그 말에 도저히 반박할 수 없었다.

원나라와 문제가 생기더라도 일단 완충해주는 역할은 충분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그녀는 원나라 황실의 습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며 고가치 물품에 대한 안목도 높은 편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문제 될 만한 것도 없었고 오히려 그녀만 한 인물이 없었다.

“그렇게 하시지요. 내수 전수에게는 과인이 말해 놓겠소이다. 대신 과인에게도 준비하던 것들이 있으니 앞으로 자주 의논을 했으면 합니다.”

“물론이지요. 요즘 용안을 뵙기가 힘들었는데 덕분에 같이 담소 나눌 시간이 늘어나겠군요.”

“흐흠··· 그건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소이다.”

때로는 곰 같아 보이던 가진이지만,

종종 말속에 예리한 뼈가 보일 때가 있었다.

요즘 워낙 바쁘게 지내고 있는 탓에 잠을 잘 때를 제외하면 얼굴도 보기 힘들 정도였다.

심지어 자정을 넘겨서 침소에 드는 때도 허다해서 찔리는 구석이 너무 많았다.

그녀의 시선을 피해서 상당히 난감한 표정을 하며 딴청을 부리고 있던 나를 구해줄 사람은 역시 신소봉밖에 없었다.

“전하, 이방실 장군이 궐밖에서 대기하고 있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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