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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8화 (8/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8

개경 서쪽에 있는 선의문.

그곳은 항상 수많은 이가 오간다.

원래 이곳의 설치 의도는 송나라의 사신을 위해 만든 곳인데 벽란도를 가려면 통과해야 한다.

선의문에는 옹성(瓮城)을 두고 남북에는 각각 편문이 설치되어 군사가 지키고 있었는데 개경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비였다.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날이었지만, 그런 고요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누구길래 저렇게 경내에서 달리는 거지?”

순군만호부의 병사 하나가 중얼거리자.

성문 위에서 근무하던 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개경 방향에서 먼지구름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저 정도의 수준이면 최소 십여 마리 이상이 함께 달리는 것 같았다.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라 잠시 그쪽을 지켜보던 낭장 하나가 다급하게 외쳤다.

“응양군 상장군의 깃발이다. 어서 길을 트거라!”

그 목소리를 듣자 다들 분주해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응양군의 상장군이다.

전하의 신임을 한껏 받는 최측근이란 뜻이기도 하기에 다들 복장을 단속하고 한껏 긴장했다.

괜히 트집이라도 잡히면 큰일이었다.

병사들이 성문 앞을 정리하자 말을 탄 이십여 명의 무리는 멈추지도 않고 빠르게 통과해 곧장 벽란도가 내려다보이는 고갯길까지 달려갔다.

고갯길에서 잠시 멈추자 이방실이 다가와서 아래 보이는 항구가 목적지라고 알려주었다.

“저기가 벽란도이옵니다.”

그의 뒤에는 최영을 비롯해 변안열과 주덕유도 함께하고 있었는데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도 안심되지 않았는지 이방실은 백여 명에 달하는 응양군을 미리 출발시켜서 길목마다 배치를 해놓았다.

‘생각보다 상당히 넓구나.’

역시 고려 최고의 항구다운 모습이었다.

벽란도는 개경에서 불과 30리(12km) 거리에 있기에 저절로 발전할 수밖에 없는 곳이다.

전국에서 올라오는 조운선과 수많은 상인이 바글거렸고 원나라뿐만 아니라 멀리 회회인(回回人)과 일본과도 교역선이 오갈 정도였다.

고려가 조선보다 더 매력적이라 생각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벽란도의 존재였다.

“교동에 있는 묘박지(錨泊地)에는 더 많은 상선이 물때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저기 설치된 잔교(棧橋)에는 배가 몇 척이나 접안이 가능한 건가?”

“동시에 접안 가능한 배의 수는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대개는 밖에서 정박해 있다가 순번을 정해서 들어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조금 아쉬웠다.

서해안에 위치한 탓에 물때를 맞춰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만약에 더 많은 배가 몰리면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내 머리를 털어내며 말을 몰았다.

지금 신경을 써봤자 거대한 토목 사업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전혀 안 되었다.

그렇게 벽란도의 안으로 들어서자.

거리에는 상점이 즐비했고 물건을 사거나 파는 사람들의 수도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

내수사의 곽충수도 거기서 만날 수 있었는데 그나마 다른 이들보다 이곳이 익숙한 그가 벽란도의 곳곳을 상세하게 안내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그는 한적한 찻집에서 잠시 앉아서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줬다.

“이곳의 뇌원차(腦原茶)가 그리 맛이 좋다고 유명합니다.”

곽충수는 적극적으로 뇌원차를 권해주었다.

원래 뇌원차는 궁중에서 음용하는 어용차였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민간에도 서서히 퍼진 것 같았는데 그가 장담했던 것처럼 뇌원차의 맛은 상당히 구수하고 끝에 남는 맛이 깔끔했다.

내가 잠시 차를 음미하고 있자 곽충수가 개경에 있는 시전을 봐본 적이 있는지 물어봤다.

“전하, 개경에 오신 후에 남대가에 있는 연립 장랑(連立長廊)은 가보신 적이 있사옵니까?”

자세하게 살펴보진 못했지만,

개경에 입성할 때 지나쳐오긴 했다.

연립 장랑은 개경의 명물 가운데 하나다.

무려 1,008간의 장랑(長廊)이 도로의 좌우에 세워져 있는데 칸을 나누어 다양한 상점이 간판을 붙이고 영업을 해서 항상 북적였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공짜로 자리를 빌려주는 것은 아니고 일정량의 세금을 받는다고 들었다.

“맞습니다. 이곳에도 시전(市廛)이 있으나 영세한 이들을 위한 비상설 시장인 장시(場市)가 마침 오늘 열렸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은 편입니다.”

“장시는 닷새마다 열린다고 했던가?”

“그러하옵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관영 상점이 꽤 많았으나 최근에는 사찰과 개인이 운영하는 상점도 상당히 많이 늘었습니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향·소·부곡이 대부분 무너진 탓이었다.

신분적인 차별을 당하면서 등골이 휘어질 정도로 많은 수취(收取)까지 있으니 도망가지 않고 지금까지 버틴 것이 용할 정도였다.

가장 큰 문제는 공급이 수요에 비해서 현저하게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아직 고려는 민간 산업이 아닌 관영 수공업을 위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고려인 중에 원나라와 교역을 하는 가장 큰 상인이 누구요?”

“개경 상인 중에는 지경탁이라는 자의 거래 규모가 가장 큰 거로 알려져 있사옵니다.”

“그자에 대한 평가는 어떠한가?”

“상인이라면 다들 비슷하겠지만, 유독 돈을 밝힌다고 정평이 나 있습니다. 돈만 된다면 가족도 팔아치울 작자입니다.”

“그러면 세간의 평가가 괜찮은 이가 있는가?”

곽충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한 명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동오라는 자가 신의가 있다고 하나 그 출신이 미천하여 아직 영향력이 지경탁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작다고 했다. 하지만 몇 척의 배를 가지고 원나라까지 상행을 다녀올 수준은 되니 작은 규모라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럼 그자를 내게 데려오시오.”

곽충수와 함께 최영도 같이 보내자.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중년의 남성 하나를 데리고 와서 내 앞에 앉혔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왔음에도 동오라는 자는 꽤 태연했다.

상당히 강심장이거나 아니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행동이었다.

“갑자기 이렇게 불러내서 미안하오.”

“초대치고는 상당히 거칠더군요. 도망치다가 배때기에 칼침 제대로 놓일 뻔했습니다.”

“이놈이! 이분이 누구신지 알고 감히 방자하게 입을 놀리더냐.”

“몇 번이나 여쭤봤는데 절대 알려주지 않으니 제가 어찌 압니까. 그런데 저는 권세 높은 나으리와는 거래 안 합니다.”

너무나 당당한 표정을 그가 답하자.

다들 어이가 없는 얼굴로 동오를 바라봤다.

내가 어딜 봐서 권세 높은 나으리 같냐고 묻자 그는 피식 웃으며 대답을 했다.

“이 정도의 사병을 이끌고 다니시는 분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40승포나 되는 세포(細布)로 만든 옷은 아무나 못 입죠.”

“눈썰미가 제법 좋구나.”

“그 정도도 못 가려내면 이 바닥에서 호구 소리를 듣기 쉽습니다. 그럼 이만 소인은 가봐도 되옵니까?”

동오는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지만,

주덕유가 재빨리 손을 뻗어 다시 앉혔다.

아무래도 쉽게 이 자리에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반쯤 자포자기한 그에게 다시 질문했다.

“왜 권력을 쥔 이들과 거래는 안 하려고 하는 것이냐. 그것부터 말하거라.”

“제대로 셈을 하는 분이 없으니까요. 제가 데리고 있는 식솔이 적다고 할 수 없는지라 먹고는 살아야죠.”

“그게 전부더냐?”

“장사치가 돈 안 되는 일을 꺼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나랏님이라도 노동을 시키면 정당한 대가를 치러야죠.”

모처럼 마음에 쏙 드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와 달리 다른 이들은 기겁을 했다.

여기서 감히 나를 언급할 줄은 몰랐기 때문인데 정작 당사자인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욕심이 과하다는 지경탁이라는 자보다 솔직한 모습의 동오라는 자가 더 쓸만해 보였다.

그래서 어용 상인으로 그를 낙점했다.

“자네, 내가 뒤를 봐줄 테니 어용 상인이 되어 볼 생각이 있으신가?”

“그럴 생각은 없다고 이미 말씀드렸는데요.”

“궁궐에 물건을 대는 일이라도 거절할 건가?”

“궁궐도 궁궐 나름이죠. 혹시 어느 궁인지 제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선경전(宣慶殿)이라면 관심이 있겠나?

내가 웃으며 답을 해주자.

동오는 아주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뒤늦게 내가 왕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선경전이라면 본궐의 정전으로 그곳의 주인이 누군지 다들 알고 있다. 그는 의자에서 자빠지듯 내려와 엎드린 채로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그런 상태로 대화하기 어려웠기에 주덕유를 시켜 자리에 앉히고 동오에게 재차 물었다.

“다시 묻겠네. 어용 상인에 관심이 있는가?”

“뭐든지 명령만 내려주시면, 충심을 다해 따르겠습니다.”

“그럼 이것부터 처리해 주시게.”

고개를 돌려 곽충수를 바라보자.

그는 보자기를 탁자 위에 올려놨다.

천천히 묶은 것을 풀어내자 원 보초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생각 이상으로 많은 금액이었는데 오히려 동오는 사색이 되었다.

“황송하오나 현재 원 보초의 가치는 사라지고 있습니다. 시전이나 장시에서도 가능하면 안 받으려고 하는 것이 보초 이옵니다.”

“자네의 말이 맞네. 그러니 원래의 가치는 신경 쓰지 말고 어떻게든 처리만 하면 되네. 다만, 이것은 벽란도가 아닌 원나라에서 처리해야 할 걸세.”

나 혼자 살자고 다 죽일 수는 없다.

이 많은 보초가 벽란도에 돌면 적지 않은 타격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가능하면 이걸 가지고 원나라에 가서 현물로 바꿔와야 했다.

생각보다 동오는 눈치가 제법 빨라서 내 의도가 뭔지 금방 알아차렸다.

“허나, 가치가 생각하신 것보다 낮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신지요.”

“상관없네. 자네도 원 보초가 있다면 어서 처분하고 원나라와 거래하는 상인에게도 슬쩍 소문을 내주게.”

“그 정도로 심각합니까?”

얼마 전까지 대도에 있다가 온 나였다.

더구나 황실과도 관계가 있는 내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동오는 꽤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해주지 않았다.

여기서 조만간 원나라가 망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신 원 보초를 가져가서 사 와야 하는 것들을 적은 쪽지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걸 본 동오는 예상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노예를 사들이란 말입니까?”

목록에 적힌 것은 단 하나였다.

나는 그렇다며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동오는 사치품을 예상했던 것 같았다.

금과 은 그리고 초석 등에 대한 거래는 철저히 원나라에서 제한하고 있었고 사치품을 제외하면 딱히 사들이고 싶은 물건도 없었다.

그럴 바에는 억지로 대도로 끌려가 노예로 살고 있는 고려인들을 다시 데려오고 싶었다.

“갑자기 고려인을 데리고 오면 원나라에서 이상한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몽골인은 제외하고 회회인이나 다른 나라 출신도 약간 섞어서 데려오면 되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여기 있는 내수사의 전수를 통해서 고려의 물품에 대한 판매도 위임할 테니 다양한 곳에 거래를 뚫어야 할 걸세.”

편도 무역보단 왕복이 좋고.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삼각 무역이다.

마음 같아서는 벽란도를 기점으로 대도와 안남 그리고 인도까지 연결해서 무역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욕심을 내긴 무리였다.

아직 그런 항해를 할 수준의 배는 물론이고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매력적인 상품도 없었다.

“자네의 몫은 이문(利文)의 3할이네.”

“2할만 받아도 충분하옵니다.”

“충분하지는 않을 걸세. 적어도 수년 이내에 개경 제일의 상인이 되어야 하네. 그리고 몰래 뒤에서 장난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겠지?”

나는 슬쩍 손가락으로 목을 긁었다.

대충 삼족을 멸하겠다는 의미였는데 동오는 그걸 곧장 알아듣고 머리를 조아렸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점점 이런 협박에 익숙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동오는 내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임금의 위신이 바닥을 찍었다지만,

벽란도에서 나보다 더 큰 뒷배는 없을 것이다.

“그럼 앞으로 기대하겠네.”

목적을 이뤘으니 미복잠행은 끝내기로 했다.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지만, 오늘만 날은 아니었기에 일어나야 했다. 세세한 것들은 곽충수와 상의하라고 말한 뒤에 일어났다.

두 사람을 찻집에 남겨두고 밖으로 나오자 짭조름한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는 응양군이라 생각되는 이들이 서넛씩 모여서 배회하고 있었다. 슬슬 궁으로 돌아가려던 중에 나는 잠시 발길을 멈췄다.

상점 위에 걸린 하나의 간판 때문이었다.

고려 가요로 유명해진 쌍화점(雙花店)이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이곳을 직접 보다니 믿기지 않네.’

개경을 처음 들어설 때도 그랬지만,

활자로만 보던 것을 직접 보니 꽤 설렜다.

그와 동시에 만두의 일종인 상화라는 음식을 판다던데 그게 무슨 맛인지 너무 궁금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고려에 와서 조금 실망한 것이 식사의 부실함이었다. 불교가 워낙 널리 퍼져 있어서인지 고기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곳으로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신소봉이 눈치 빠르게 나를 만류했다.

“회회인이 만든 음식을 드실 생각은 아니시죠?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말도 안 되다며 반박하려 했지만,

뒤쪽에서 들리는 목소리 때문에 접어뒀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이십대의 남자 하나가 부교 근처에 서 있는 상인들을 향해 허술한 원나라 말로 계속 말을 걸고 있었다.

다들 귀찮은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항구에서 일하는 이들이 그를 보고 혀를 찼다.

“오늘도 저 짓거리를 하고 있네.”

“누구길래 그래?”

“군기감(軍器監) 녹사인데 시간이 날 때마다 여기에 와서 저러는 구먼.”

“군기감 사람이 벽란도는 왜 와?”

“나도 모르지. 원나라 배만 들어오면 폭죽이란 것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고 있냐면서 온종일 귀찮게 하더란 말이지.”

그걸 들으니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안 그래도 수소문해서 찾으려던 이었다.

만약에 저 사람이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는다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이거 왠지 바닷가를 걷다가 용연향이라도 주운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이번에는 신소봉이 말릴 틈도 없이 곧장 그들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저자의 이름이 무엇이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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