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5
고려의 간신, 최유.
그를 죽여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강간 등의 온갖 추잡한 짓을 하고 고려에서 도망쳐서 원나라에 들어갔던 것을 차치해도 훗날 내게 상당히 위협이 될 인물이다.
최유가 가진 고려에 대한 앙심은 컸다.
도대체 그가 공민왕을 호종하던 중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그가 다시 원나라로 돌아간다면.
최유는 황제에게 고려에서 정남병(征南兵) 10만 명을 징발할 것을 주청(奏請)할 것이다.
만약에 원 황실에 있던 고려인들이 필사적으로 황제를 설득하지 않았다면 안 그래도 얼마 안 되는 군사를 모두 잃어버릴 위기였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이후에도 기 황후를 등에 업고 덕흥군을 왕으로 내세워 직접 고려를 공격하기까지 하니 괜히 매국노가 아니었다.
그런 그를 놓칠 수는 없었다.
신소봉에게 그를 데려오라고 하자.
잠시 뒤에 뱀처럼 음흉하게 생긴 최유가 접객실 안으로 들어와서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고개를 숙이면서도 눈알을 굴리는 것이 첫인상부터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자였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할 필요는 없었다.
“전하. 즉위를 감축드리옵니다.”
“취성군이 상당히 유능하다는 소문은 과인도 익히 들었소이다.”
“과찬이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과인을 찾아오신 겁니까?”
“제게도 전하의 어가(御駕)를 호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네가 가기 싫다고 하더라도 억지로 끌고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이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
어가(御駕)는 순식간에 꾸려졌다.
가져갈 것도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어지간한 것은 그냥 두고 떠날 생각이었다.
나와 부다시리 공주가 머물던 저택은 당분간 고려에서 원나라에 보내는 사신과 유학을 온 학자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될 것이다.
그나마 아이가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만약에 부다시리 공주와 나 사이에 아들이 있었다면 나처럼 뚤루게로 남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놓고 갈 수는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모아 놓은 서적은 가져가야 하는데 수레에 싣고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건 너무 비효율적이었다.
적어도 수레 두어 개는 더 끌어야 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배에 싣고 가는 게 빨랐다.
그나마 대도는 동남쪽에 있는 항구도시 직고(直沽, 톈진)와 가까워서 개경까지 배를 타고 오가는 상인을 어렵지 않게 섭외할 수 있었다.
만약에 현대적인 배였다면 귀국도 배편으로 하고 싶었으나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했다.
아무리 육로보다 더 빠르더라도 이 시대의 배는 위험성이 너무 컸다.
“이제 이곳도 안녕이군요.”
나름 짐은 최소화한다고 했는데.
예전에 비해서 집안이 휑하게 보였다.
그걸 본 부다시리 공주는 꽤 아쉬워했다.
이곳에서 그녀가 보낸 시간은 불과 1년이지만, 그래도 상당히 많이 정이 든 것 같았다.
가족과 함께 살던 위왕부(魏王府)와 달리 이곳은 온전히 그녀와 나의 보금자리였다.
더구나 이곳 대도는 그녀를 찾아오는 지인이라도 있었지만, 고려는 부다시리 공주에게 나 외에는 의지할 곳이 없는 타지였다.
말은 안 했으나 걱정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잠시 아무런 말 없이 그녀의 곁에 있어 주자 신소봉이 들어와서 어서 출발해야 한다며 보챘다.
“더 늦기 전에 출발하셔야 합니다.”
나는 알겠다며 손짓을 한 뒤.
공주와 함께 저택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백여 명이 넘는 이들이 서 있었다.
모두 나와 함께 돌아갈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의 곁에는 십여 개가 넘는 수레가 세워져 있었다.
우리가 나와서 말에 올라타자 그때부터 서서히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려의 수도인 개경까지 3천 리가 넘는 여정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일행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대도 밖에는 이백여 명의 병사가 기다렸다.
그들은 황실에서 차출해서 보내준 호위인데 이곳에서 심양까지 함께할 이들이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출발은 잠시 미뤄야 했다.
성문 안쪽에서 죽을힘을 다해 말을 타고 달려오는 정세운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럿의 남자와 함께 달려왔는데.
내가 함께 보낸 이들도 보였고 처음 보는 이들도 섞여 있었다. 그런 탓에 주원장이 무리 사이에 있는 건지 실패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얼마 되지 않아 정세운이 행렬을 따라잡자 병사들이 다급하게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멈추시오!”
황실의 공주와 부마의 행렬이다.
만약 손톱만 한 상처라도 나면 그들 모두 죽은 목숨이나 다를 게 없기에 꽤 살벌한 기세였다.
안 그래도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한시도 긴장을 놓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내 지시를 받고 달려간 신소봉이 병사를 다급하게 물리자 말에서 내린 정세운이 달려와 내 앞에서 부복(仆伏)했다.
“전하께서 내리신 과업(課業)을 마치고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어명을 제때 지키지 못한 소신을 엄히 벌하여주시옵소서.”
“고생이 많았소.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소?”
“간신히 찾아냈습니다. 어서 와서 인사드리지 않고 뭘 하는 게냐.”
정세운이 슬쩍 고개를 돌려 말하자.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내려서 정세운의 조금 뒤편에서 똑같이 부복했다.
그런데 자금성에서 직접 보았던 그의 초상화와 비슷한 구석이 전혀 없었다. 그곳에 그려진 주원장의 모습은 곰보투성이에 기괴했다.
평소 의심이 많아 자신의 얼굴을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그리게 했을 거란 가설도 있었는데 지금 보니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아니면 엉뚱한 사람을 데려왔거나.’
적어도 둘 중의 하나겠지.
가야 할 길이 바쁜 것은 알지만,
이게 훨씬 더 중요하기에 말에서 내렸다.
덕분에 삼백 명이 넘는 행렬이 기다려야 했지만, 내게 뭐라고 할 간이 큰 이들은 없었다.
왕이 되니 이것 하나만큼은 좋은 것 같았다.
천천히 걸어서 정세운이 데리고 온 주덕유에게 다가가서 한 가지의 질문을 했다. 만약에 이 자가 훗날 주원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명나라의 초대 황제가 되는 이라면 확인할 방법은 많았다.
“춘부장(春府丈)의 이름이 뭔가?”
“저희 아버지를 아시나요? 그런데 이미 돌아가신 지 몇 해 되었습니다.”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주세진이라 하옵니다.”
빙고! 정세운이 진짜를 찾아왔다.
주원장의 아버지 주세진은 명나라가 건국된 후에 황제로 추존되는 인물이다.
나름 이 시대에 대한 논문을 쓴 나기에 당연히 주원장의 계보(系譜) 정도는 꿰고 있었다.
내가 상당히 기분 좋은 표정을 짓자 정세운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의 노력이 헛되진 않았다.
주덕유를 데려오면서도 혹시나 잘못된 이를 데려온 것이 아닌가 반신반의했던 그였다.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니 만약 마지막으로 황각사를 들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번 임무는 실패했을 것이다. 더구나 정세운은 내가 지시한 목화씨를 봇짐 하나를 가득 채워서 가져오기까지 했다.
“수고 많으셨소. 갈 길이 바쁘니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듣겠소이다.”
이러다 성문 앞에서 노숙하게 생겼다.
서둘러 이동하자고 신소봉에게 말하자 그는 곧장 선두로 달려가서 내 지시를 전달했다.
그러자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호종 세력간의 반응은 정말 제각각이었다.
정세운과 친분이 있는 김용은 그의 복귀를 반겼으나 조일신의 패거리는 무척이나 떨떠름해 보였다. 이미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 견제하기 시작했다는 방증(傍證)이었다.
하지만 대놓고 갈등을 드러내진 않았다.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자.
행렬은 생각보다 빨리 이동했다.
확실히 옛날 사람들은 걷는 것이 일상이라 그런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잘 걸었다.
원래는 80일 만에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 도착했으나 더 일찍 도착할 것 같았다.
오히려 말을 타고 장거리를 이동하는 게 처음인 내가 힘들어서 죽을 지경이었다.
비행기나 기차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증기 기관 하나조차 만들 수 없는 시대인 걸 생각하면 상당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잠자리도 생각보다 문제가 많았다.
도시에서 쉴 때는 그나마 괜찮았지만,
대부분은 몽골식 텐트인 게르에서 자야 했다. 벌레는 둘째치고 밤이 되면 생각보다 추웠다.
그렇게 열흘을 쉬지 않고 이동하자 진시황이 불로장생약을 구하기 위해 500명을 보냈다던 진황도(秦皇島)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여기서 더 들어가면 곧 심양이 나온다.
거기부터는 요동이라 볼 수 있기에 그전에 서둘러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날이 점차 어두워지자 신소봉을 불러 주덕유를 은밀히 불러오라고 시켰다.
잠시 후에 게르 안으로 들어온 주덕유는 어떤 예를 취해야 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에게 일단 자리부터 권했다.
어차피 이 자리가 낯선 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요즘에 고려인들과 함께 훈련을 받는다고?”
“그거 외에 딱히 할 게 없으니까요.”
“할 만하던가?”
주덕유는 딱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싫어하는 것 같은 표정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내가 보통의 귀족도 아니고 원 황실의 부마라는 것에 극도로 거부감을 느끼던 그였다.
원나라의 학정으로 부모와 형제가 굶어 죽었고 묻어줄 땅 한 평도 없어 서러움을 겪은 그였다.
하지만 고려라고 다를 것이 전혀 없었다.
백 년 전에 침략 당해 고려가 어떻게 싸웠으며 수많은 수탈을 당해 힘들어하는 사정을 듣자 주덕유도 조금씩 경계하던 마음을 풀고 있었다.
더구나 지금껏 걸인으로 살며 굶주린 삶을 살던 그에게 내가 내민 손은 동아줄 같은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공통점이 있는 거 알고 있는가?”
“그게 무엇입니까?”
“원나라에 대한 증오.”
“황실의 부마께서 할 소리는 아닌 듯합니다.”
“과인은 고려가 더는 원나라에 복속하지 않게 만들걸세. 아마 머지않아 수도 없이 많은 싸움을 하게 되겠지. 자네도 그 일에 함께 했으면 하는데 관심이 있는가?”
주덕유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떠보는 건가 의심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뭔가 결심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에는 원나라의 뿌리를 뽑는 일이라면 모든 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그럼 그 시작은 이걸로 하지.”
나는 그에게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최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주덕유가 글씨를 못 읽는 것은 아니지만,
잠시 내 눈을 바라보다가 이내 허리를 숙였다.
상당히 무례한 짓이라 이 자리에 다른 이가 있었다면 목이 떨어져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이 사람을 없애라는 뜻입니까?”
다행히 그는 눈치가 빨랐다.
그 이름을 건넨 의미를 금방 알아차렸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은 그 외에 딱히 이런 일을 해줄 만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았다.
호종하는 이들 중에 무예 실력이 뛰어난 이는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추잡하다 여겨서 직접 나설 이는 찾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주덕유는 확실히 뭔가 달랐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일을 시킬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합당한 이유를 알려줘야 하기에 최유가 어떤 인물인지 차분하게 설명을 해줬다.
앞으로 고려의 반대편에 서서 벌이게 될 일을 제외해도 징치(懲治)해야 할 죄목은 많았다.
그중에서도 주덕유가 가장 분노한 것은 동료 관원이 죽자 아내가 상복도 벗기 전에 강간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다른 관원을 폭행한 후에 원나라까지 도망 온 상태다.
그쯤 되자 주덕유의 눈에는 살기가 맴돌았다.
내가 알던 주원장답게 탐관오리에 대한 분노가 상당히 강해 보였다.
“반드시 최유라는 망종(亡種)을 제 손으로 처단하겠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