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4
그날 이후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부다시리 공주가 말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9월이 끝나가기 전에 왕기의 즉위가 원 황실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와 관련된 소문은 순식간에 널리 퍼졌다.
황실에 있는 고려 환관이 한두 명이 아니었고 원나라에서 관직을 받아 일하는 이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왕기의 저택에는 뒤늦게 호종을 자처하는 이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간 계속해서 호종하던 이들뿐만 아니라.
한동안 발길을 끊었던 이들까지 모두 몰려왔다.
덕분에 저택에는 항상 손님으로 넘쳐났고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들의 얼굴에는 이제 입신양명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가득했다.
보통 호종을 하던 이들은 측근으로 여겨서 공신첩에 오르는 동시에 주요 관직을 차지하는 것이 지금까지 관습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당연히 기대가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10월이 되자 마침내 기다리던 원 황실의 호출이 왔다. 황실에서 나온 환관 한 명이 관리 몇 명을 대동하고 나를 찾아왔다.
“폐하께서 강릉 대군을 찾으십니다.”
*
그날 나는 고려의 왕이 되었다.
황제 토곤 테무르는 현재의 고려왕인 충정왕을 대신해서 내게 왕권을 주고 썩어가고 있는 고려를 다시 일으켜 세우라고 지시를 내렸다.
이 순간을 위해 황태자의 단본당(端本堂)을 수없이 드나들었던 보람이 있기는 했다.
원 제국에서는 생각보다 고려의 개혁에 대한 의지가 강했는데 이미 충목왕 때부터 고려의 폐정(弊政)과 재정의 파탄을 우려하고 있었다.
심지어 기 황후까지 그 뜻에 힘을 보탰다.
고려가 걱정된다던 그녀의 말은 정말 역겨울 정도였으나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니들이 한 짓은 기억 안 나냐!’
욕설이 안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이 고려에서 뜯어간 물자며 인구가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공녀로 끌려갈 바에 그냥 죽겠다며 자진한 이들도 수없이 많았다.
고려 혼자서 이 지경까지 온 게 아니다.
그나마 최근에는 원 제국의 폭발적인 영토 확장이 다소 주춤하며 수탈이 줄었으나 홍건적의 난으로 인해 얼마 후면 다시 그 짓이 시작된다.
이 무렵의 고려는 거의 원나라의 원정 공격을 위한 수혈팩이나 다를 게 없을 정도였다.
당연히 나는 개혁을 이뤄내겠다며 약조했다.
다만, 누굴 위한 건지는 말하지 않았다.
앞으로의 모든 일은 원나라가 아닌 고려를 번성시키기 위함이고 역사에 기록된대로 당하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거라고 내심 다짐했다.
더구나 지금 원 제국이 다른 누굴 걱정해줄 때가 아니었다. 그들 내부의 문제도 곪아 터져서 더는 어쩔 도리 없이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수년 전에 방국진이 일으킨 해상 반란을 시작으로 백련교가 홍건적을 일으켜 대규모 반란이 강남의 곳곳에서 터졌다. 날이 갈수록 홍건적의 세력은 점차 불어날 것이다.
심지어 서수휘는 황제를 자청하며 천왕국이라 불렀고 유복통은 집안 대대로 백련교의 교주인 한산동의 아들을 내세워 왕으로 세웠다.
본격적인 홍건적의 난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저택으로 돌아올 무렵에는 완전히 지쳐서 쓰러질 것 같았다.
유일하게 황실까지 대동했던 신소봉도 비슷한 상태였다. 나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그는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전하.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저는 항상 믿고 있었습니다. 경하드리옵니다.”
“아직 즉위식도 하지 않았다. 벌써 전하라고 부르는 거는 이르지 않은가.”
“그래도 저는 그렇게 부르렵니다.”
“허허! 맘대로 하거라.”
슬쩍 녀석의 말에 장단을 맞춰주며.
저택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서른 명에 달하는 이들이 나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동시에 고개를 숙이며 미리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맞춰 축하의 인사를 해왔다.
그중에는 지금까지 곁에서 호종을 하느라 고생한 이들도 있었지만, 중간에 충정왕과 충목왕으로 갈아탔던 이들도 몇 명이 보였다. 속이 뻔히 보이는 행동이었으나 굳이 지금 여기서 그걸 지적하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전하! 즉위를 경하드리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다들 내보내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물심양면으로 나를 호종해오던 이들을 그렇게 푸대접을 하기도 어려웠다. 피곤함을 잠시 뒤로하고 오늘의 일은 그들의 덕분이라는 치사(致詞)를 해줘야 했다. 잠시 담소를 나눈 후에 그만 쉬고 싶다는 말을 남기며 일어났다.
“고맙소이다. 그런데 오늘은 피곤하니 이만 들어가서 쉬었으면 하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소신들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아! 급하게 처리할 게 있으니 순부(純夫) 선생은 잠시 남아주시지요.”
여러 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유숙만 남기려고 하자 조일신과 김용 등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그들은 시기 어린 시선을 감추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내 말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객관적으로 봐도 여기 있는 서른 명의 이들과 유숙은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이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유숙은 과거에 합격해서 고려를 위해 일하던 이였다.
유숙과 함께 접객하는 용도의 공간에 들어선 나는 자리를 권하고 가장 먼저 그의 모친에 대한 안부부터 물었다.
“자당께선 평안(平安)하신가요?”
“신경 써주신 덕분에 쾌차하셨습니다.”
“천만다행입니다.”
올해 유숙은 잠시 고려에 있었다.
편찮으신 노모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그나마 늦지 않게 돌아와서 다행이었다.
지금 이곳에서 이런 일을 의논할 수 있는 유일한 이가 바로 유숙이었다.
그는 내게 있어 스승이나 마찬가지였다.
“저를 좀 도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명하시옵소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장 고려로 사람을 보내 전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제현을 섭정승 권단정동성사(攝政丞權斷征東省事)로 삼겠다고 전해주십시오.”
“참으로 현명하신 처사 이옵니다.”
유숙은 내 결정을 무척이나 반겼다.
이제현이라면 다들 반감이 없을 것이다.
임시직인 섭정승을 그에게 주는 이유는 내가 고려에 돌아가기 전까지 정치적인 공백을 메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제현을 중용한다는 것은 지난 일을 잊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제현은 충목왕이 죽었을 당시에 내가 아닌 왕기를 왕에 추대하려고 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내 유숙은 관리 임명을 위한 비목(批目) 이야기를 꺼내자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이들이 주요 관직에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일신을 첨의부의 참리(參理)로 앉히시다니요. 그런 자에게 재상 자리를 주시다니 천부당 만부당하신 조치 이옵니다.”
충분히 그런 반응이 나올 만했다.
첨의부는 모든 관리의 서무를 관장한다.
중앙 행정에서 가장 높은 자리나 마찬가지다.
더구나 참리는 종2품의 재상직인데 과거조차 합격하지 못한 조일신을 대뜸 앉힌다면 여러 말이 나올 것이 뻔했다.
그의 공이라고는 원나라에서 나를 호종한 게 전부였다.
하지만 이번에 내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그가 들인 공헌이 적지는 않았기에 아예 모르는 척하기도 어려웠다.
더구나 내게는 그것 외에도 변명거리가 분명 있었다.
“저도 그리 달갑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 그를 배제해도 원 승상 토크토아가 다시 자신의 사람을 들이밀 것입니다.”
“하오나 전하···”
“대신 나를 호종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에게 관직을 나눠줄 생각은 없습니다.”
이미 배제할 이들은 정해놨다.
최화상와 장승량, 고충절 그리고 조익청과 김보처럼 능력이 없거나 부원배는 중용하지 않을 거라 밝히자 유숙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러나 여전히 김용처럼 약한 자를 업신여기고 음흉한 이들이 남아 있는 것에 우려를 표했다.
애초에 유숙은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는 따로 계획이 있었다.
조일신과 김용은 그 계획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당분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활개 치겠지만, 그리 오래가진 않을 거다.
적어도 몇 개월 안에는 해결할 생각이나 유숙에게 미리 말해줄 이유는 없었다.
“그들이 어떤 자리에 어울릴지 의견을 내주시면 과인이 숙고하여 결정하겠습니다.”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본국에 귀국하면 순부(純夫) 선생이 저를 위해 일을 해줄 이들을 모아주셨으면 합니다.”
“문무백관이 모두 전하를 위하여 일을 하는 자들입니다. 더구나 군자는 사사로이 당을 만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유숙은 불가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원래의 역사대로면 매우 현명한 처사다.
공민왕은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세력을 얻은 신하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처치했다.
조일신도 그랬고 김용과 신돈을 비롯해서 심지어 최영까지 제거하려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고려의 도당에는 왕권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인 뒷배경이 전혀 없었다.
내 말을 무조건 들어줄 이가 필요했다.
공민왕이 괜히 측근 정치를 했던 게 아니다.
이제현이 사리사욕을 부리는 이는 아니었으나 개혁에 목숨을 걸고 참여하진 않을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중도에 가까운 존재였다.
더구나 고려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기씨 가문과 같은 부원 세력을 견제할 필요가 있다.
이야기가 거기까지 이르자 유숙은 잠시 고민하더니 더는 원 제국에 흔들리지 않도록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말에 넘어왔다.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충분히 만족할 만한 답이었다.
조금 쉬어야겠다는 말을 꺼내자.
유숙은 고민이 많은 얼굴로 나갔다.
그와 동시에 신소봉이 평소 즐겨 마시는 차를 참외 모양의 주자(注子)에 담아서 들고 왔다.
이야기가 길어질 줄 알았던 것 같았다.
“소봉아. 정세운에게 온 연락은 아직 없더냐.”
“달포 전에 온 서신이 마지막입니다.”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적어도 10월 전에는 돌아오겠다고 마지막 서신에 남기셨으니 일단은 기다려 보시지요.”
그것도 벌써 초엿새나 지났다.
지금쯤이면 주원장도 곧 홍건적에 가담한다.
그렇게 되면 내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진다.
지금 당장 돌아오라고 말하고 싶어도 사방팔방 돌아다니는 정세운과 연락할 방도가 없었다.
오늘 칙서도 받았으니 며칠 이내에 이곳을 정리하고 본국으로 향하는 귀국길에 올라야 하는데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변고라도 생긴 것은 아니겠지?”
그때 노복 하나가 들어왔다.
나를 찾아온 손님이 있다고 했다.
그러자 신소봉이 일어나 자신이 알아서 돌려보내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그 이전에 누가 나를 찾아온 건지 궁금했다. 이름이라도 들어볼 생각으로 묻자 노복은 예전에 종 2품인 참리를 제수한 최유라고 밝혔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살생부에서 가장 첫 줄을 이름이 올라가 있는 이가 제 발로 나를 찾아왔다. 원래의 역사에서도 공민왕이 본국으로 돌아갈 무렵에 찾아와서 호종을 요청했다더니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당시에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요동 부근에서 원나라로 도망갔다고 했다.
아마도 뭔가 빈정이 상했거나 다른 수종 공신과 알력 다툼을 하다가 사이가 틀어져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이유였든지 내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을 생각이다.
‘스스로 죽을 자리를 찾아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