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239화 (239/240)

# 239

싸움의 끝, 그 후

칠흑이 사라진 후.

델리피나 대륙 전체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칠흑이 델리피나 대륙을 싹 쓸어버린 탓에 여기저기에 피해가 속출했다.

칠흑과의 전투를 통해 수많은 자들이 영웅이 되었고, 수만은 영웅들이 이름을 남기고 죽었다.

라바인 전투와 같았다.

영웅으로 칭송받게 된 남자, 라스.

그리고…….

나, 로인.

하나 영웅 놀이에 심취할 때가 아니었다.

나를 위해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블루로즈 용병들과 레드 라인 기사단원들의 합동 장례식이 치러졌다.

전사한 자들의 이름은 이터블에 새겨졌다.

나울에도 이들을 기리기 위한 이터블이 새워졌다.

“…….”

나는 블루로즈단을 상징하는 파란 장미와 레드 라인 기사단을 상징하는 붉은 장미를 각각 한 송이씩 놓아 두었다.

이후에 제나드와 리오나, 그리고 게럴이 순차적으로 각자의 소속 집단에 맞는 꽃송이를 올려뒀다.

내 시선은 제자리로 돌아온 제나드에게 향했다.

그는 루크와의 전투에서 한쪽 팔을 잃게 되었다.

외팔이 된 제나드였으나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으로 목숨을 건졌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본인이 만족한다면 나야 뭐…… 할 말은 없지만.

합동 장례식을 치룬 이후, 나는 남은 일들을 하나씩 처리하기로 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건 드레드의 존재였다.

케프리는 합동 장례식이 열리기 전날, 나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드레드가 스스로 잠들기를 원한다고.

장례식이 끝난 후 나는 내 개인 사무실로 케프리와 드레드를 따로 불렀다.

드레드는 평소처럼 짐승의 얼굴만 드러낸 채 나에게 말했다.

“칠흑을 먹어 치우려 했건만, 녀석이 없어지고 말았으니 나도 더 이상 이 세계에 볼일은 없다. 그러니 너의 ‘불’로 날 없애라.”

나는 아직 글레드의 불을 가지고 있었다.

드레드가 스스로 죽음을 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이대로 드레드가 계속해서 케프리의 몸속에 남아 있는다면, 케프리는 언젠가 제2의 데르킨 백작이 될 것이다.

그래서 드레드는 스스로를 희생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케프리를…… 자신의 파트너를 그 정도로 아끼는 칠흑의 조각이라…….

나는 드레드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케프리,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어?”

“…….”

케프리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눈시울을 붉힌 지는 이미 오래다.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드레드는 그런 케프리의 얼굴에 자신의 머리를 부비면서 말했다.

“슬퍼하지 마라, 파트너. 태양이 떠 있을 때에는 낮의 시간이다. 나 같은 어둠이 있어야 할 밤의 시간이 아니지. 칠흑이 사라졌으니 델리피나 대륙은 앞으로 태양의 축복을 받으면서 번성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런 와중에 어둠의 존재인 내가 계속 남아 있어 봤자 방해만 되겠지. 파트너, 너에게도 말이다.”

“드레드……!”

결국 케프리는 눈물을 보였다.

드레드는 문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이 엘프, 파트너를 잘 부탁하마.”

베라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며 답했다.

“알았어요. 그리고…….”

“뭐지?”

“……매번 당신을 부정한 것이라 불러서 미안했어요.”

“끌끌끌! 칠흑의 잔재인 내가 하이 엘프에게 사과를 다 받다니, 웃긴 일이 다 있군.”

고개를 돌린 드레드는 내게 말했다.

“작별할 시간이다, 불을 지닌 자여.”

“넌 내가 아는 칠흑의 조각 중 최고로 멋지고 쿨한 녀석이었다, 드레드. 그동안 케프리를 지켜 줘서, 그리고 내 부하들을 지켜 줘서 고맙다.”

글레드의 불길이 드레드를 집어삼켰다.

소멸되기 직전, 드레드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천만에.”

이것이 델리피나 대륙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칠흑의 잔재’의 최후였다.

* * *

케프리를 달랜 뒤에 베라는 따로 나를 찾아왔다.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평화가 도래했네요.”

“그러게 말이야. 베라, 너도 정말 고생 많았어. 그리고 미안해, 하이 엘프의 마을로 돌아가려는 너를 억지로 이곳에 붙잡아 둬서 말이야.”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결정을 내린 건 저 자신의 의지에요. 제가 남기로 결심한 것이었으니 단장님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렇게 말해 주니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이제 엘라시아랑 같이 하이 엘프의 마을로 돌아갈 거야?”

“엘라시아 아가씨만 돌아가기로 했어요.”

“응? 너는?”

“저는 당분간 이곳에 남아서 인간계에 대해 공부하려고 해요. 그리고…… 돌봐 줘야 할 사람도 있고요.”

하긴 그렇지.

드레드는 베라에게 케프리를 잘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다시 혼자가 된 케프리를 베라가 못 본 척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 잘 결정했어.”

나는 베라의 결정을 존중하기로 했다.

* * *

나는 라그너와 함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들을 상담했다.

“차원 이동 마법 연구가 늦어도 3년 뒤에는 완성될 거라고 합니다.”

“그래? 그럼 3년은 있어야겠네.”

“3년 이 지난 후에는 이곳을 떠나실 생각이십니까?”

솔직히 아직도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과연 내가 이곳 세계의 주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계속 여기에 머물러도 되는 걸까?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뭐…….

“3년 동안 천천히 생각해 볼게.”

“하하하. 이럴 때에는 로인 님답지 않게 우유부단하시군요.”

“그럼 넌 내가 떠났으면 좋겠어?”

“처음에는 계속 여기에 계시기를 원했지만, 저의 고집으로 붙잡아 둘 수 있는 그런 분은 아니시니까요. 로인 님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습니다.”

라그너의 대답을 듣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라그너와 함께 나란히 거리를 걷던 와중이었다.

“로인.”

리오나가 나를 찾아왔다.

오늘따라 날 찾는 사람들이 왜 이리도 많은 걸까?

라그너는 눈치껏 자리를 비켜 줬다.

“무슨 일이야?”

“너한테 말할 게 있어서.”

“뭔데?”

“나, 블루로즈단을 탈퇴할까 해.”

예상치 못한 결정이었다.

“갑자기 왜?”

“갑자기는 아니야. 예전부터 쭉 생각하고 있었어.”

“가문의 후계자에 관해서?”

“응.”

라크스 가문의 후계자는 리오나로 잠정적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리오나는 라크스 공작의 결정을 번복시키게 만들기 위해서 블루로즈단에 입단했다.

자신의 존재가 라크스 가문의 오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라크스 공작은 리오나를 자랑스러운 자신의 첫째 딸임을 계속해서 강조했다.

결국 라크스 공작의 정성이 리오나의 마음을 움직이게 된 것이다.

“칠흑과의 전투도 끝났으니 지금이 딱 말하기 좋은 시기인 거 같아서.”

“그렇긴 하지.”

“받아들여 줄 거야?”

나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안 받아 주면 라크스 공작님이 나에게 잔소리를 엄청 해 댈걸?”

딸 바보 라크스 공작의 성격을 내가 모를 리가 있나.

리오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런 뒤 그녀는 내게 부탁했다.

“내가 다시 돌아오기 전에 다른 곳으로 가 버리면 평생 미워할 거야.”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리오나는 발끝을 세우면서 내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을 내 입술에 포갰다.

“리오나, 너…….”

“……이건 약속의 증표. 약속했으니까 절대로 어기지 마. 여자의 입술을 담보로 약속을 했으면서 그 약속을 어기는 남자는 델리피나 대륙에서 가장 최악의 남자라는 말이 있어. 그거 잊지 마.”

그렇게 말하고서 리오나는 빠르게 장소를 이탈했다.

아니, 그러니까 말이지…….

“그런 말, 듣도 보도 못했는데.”

* * *

3일 후.

리오나는 정식으로 대장직을 내려놓고 라크스 가문으로 향했다.

떠난 이가 있으면 다시 돌아오는 이도 있게 마련.

“오랜만에 뵙습니다, 로인 님.”

간만에 가면을 쓰고 등장한 마일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왔냐, 스타폴의 왕.”

“그건 이미 관뒀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예전처럼 일곱 가문이 공동으로 통치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그러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절대적인 지도자가 존재하면, 스타폴의 힘을 악용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 지도자가 네가 되면 되잖아.”

“사람이 자리를 만드는 게 아닙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입니다. 저도 사람인 이상, 분명 권력의 유혹에 넘어가 안 좋은 길로 빠져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기 전에 그냥 베르투의 대현자로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역시 대현자답게 매우 현명한 선택을 보여 줬다.

“로인 님의 담당 현자답게 제가 방금 얻은 정보 하나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뭔데.”

“라스 님과 릴리안 님이 결혼하실 예정입니다.”

“현자로 복귀하자마자 어마어마한 소식을 가져왔네.”

하긴 라스가 주인공이고 릴리안은 히로인이니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려도 이상하지 않다.

서로 호감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 정보입니다.”

“이번에도 누가 결혼한대?”

“아니요. 지금 문 밖에 레이샤르 님과 반드 씨가 있습니다. 로인 님에게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시는 거 같더군요.”

“알았어. 일단 너는…….”

“자리를 비켜 드리겠습니다.”

내가 말하기도 전에 마일은 알아서 사라졌다.

잠시 후 레이샤르와 반드가 나를 찾아왔다.

독특한 조합이었다.

레이샤르는 그렇다 치더라도…….

‘반드는 왜?’

순간 반드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고생했다, 이 세계의 주인공이여.”

내가 알던 반드의 목소리가 아니다.

남자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여자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아니 어린아이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하고 나이 든 자의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뭐라고 말로 형용하기 힘든 목소리였다.

그때, 내 뇌리를 스치는 이름이 있었다.

“라드리치……인가?”

“눈치가 전혀 없진 않군.”

아루토리와 함께 세계를 관장하는 신이라 불리는 라드리치.

원래는 반드가 만들어 낸 중2병 설정인 줄 알았으나…….

이 설정은 진짜였다.

레이샤르는 반사적으로 한쪽 무릎을 굽혔다.

그 역시 반드가 라드리치임을 알아차린 듯했다.

라드리치는 옷소매를 걷어 올렸다.

반드의 팔은…… 아루토리와 마찬가지로 구체 관절 인형의 구조처럼 되어 있었다.

이걸 눈치채지 못했다니.

반드 또한 아루토리의 인형 소녀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로인, 너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이 세계에 깊게 관여할 수 없다. 그래서 아루토리와 나는 이렇게 우리의 힘을 작게나마 담아 둔 인형을 몰래 심어 뒀지.”

“무슨 목적으로 인형 소녀와 반드를 심어 둔 거지? 칠흑을 없애기 위해서?”

“아니, 애초에 우리 신들은 델리피나의 멸망이니 뭐니 하는 것에 관심 없다. 그 증거로 아루토리도 처음부터 너를 도우려 하진 않았지. 중간에 변심이 든 것 같지만 말이야. 물론 나 역시 이 세계가 칠흑에게 먹히든 말든 상관없었다. 인형을 심어 둔 이유도 별거 없다. 심심할 때마다 인간계에 놀러 와서 구경이나 하려고 만들어 둔 거지.”

유흥이 목적이었나.

라드리치란 존재도 참 문제덩어리다.

반드의 몸이 서서히 가루가 되어 가기 시작했다.

사라지기 직전에 반드는…… 아니, 라드리치는 내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나를 재미있게 만들어 줬으니 아루토리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너에게 선물로 어떤 정보를 하나 들려주도록 하지.”

“뭔데. 말해 봐.”

“칠흑은 이제 다음 세계를 노릴 것이다. 그 세계는…… 너에게도 매우 익숙한 세계일 터. 어떻게 할지는 너의 결정에 맡기마.”

그 말을 끝으로 라드리치의 인형은 자취를 감춰 버렸다.

라드리치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거 참.

‘쉬지도 못하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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