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237화 (237/240)

# 237

최후의 전투 (1)

늦은 저녁.

회의를 마친 나는 밖으로 나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밤하늘도 어비스 레기온과 마찬가지로 검은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어비스 레기온의 검음과 밤하늘의 검음은 달랐다.

밤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보였다.

빛이 존재하기에 어둠 또한 존재한다.

하나 어둠만 존재하는 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더 이상 ‘세계’라 부를 수 없는 영역일 것이다.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로인.”

리오나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어. 왜? 나한테 따로 할 말 있어?”

리오나는 라크스 공작과 함께 데르킨 백작이 소환한 소환수 중 가장 어려운 열한 번째 조각, 드래곤(Dragon)을 상대하러 떠날 예정이다.

혹시 검은 용에 대한 정보를 물어보려고 나에게 말을 걸어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데르킨 백작과 자주 싸웠으니까.

그러나 리오나는 다른 이야기를 언급했다.

“저번에 내가 너한테 물었던 거, 기억 나?”

“뭐였지?”

“칠흑과의 전투가 끝나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아, 그거?”

리오나는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여기에 계속 남아 있을 거야?”

“…….”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의 나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

아니면…….

여기에 계속 머물기를 바라고 있는 걸까?

난 아직도 이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소설 속으로 막 들어왔을 때의 나는 당연히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 델리피나 대륙에서 점점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면서 언제부턴가 나는 강시언이 아닌 로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리오나는 내 앞에 나란히 마주 섰다.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궁금해서 물어봤어.”

“미안. 아직 결정 못했어.”

“응. 그래 보이더라.”

나는 피식 웃었다.

소설 속으로 들어오고 나서 거의 초창기에 만났던 캐릭터 중 한 명이 바로 곁에 있는 리오나였다.

설마 그녀에게 내가 원래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픈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이번엔 내가 리오나에게 물었다.

“내가 여기 세계의 주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까 어때?”

“그냥 아무렇지도 않아.”

“겁나거나 그러진 않고?”

“내가 왜 너를 보고 겁먹어야 하는데? 날 해치기라도 하려고?”

“아니, 그럴 리는 없지만.”

“거 봐, 이유도 없는데 겁부터 먹을 필요는 없지.”

리오나는 역시 강한 여자다.

이 마인드는 참으로 본받을 만하다.

문득 이런 역으로 이런 질문을 하고 싶어졌다.

“너는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남아 있는 게 좋아? 아니면 원래 세계로 가는 게 좋아?”

“…….”

이번에는 리오나 쪽이 말문이 막혀 버렸다.

어려운 질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네.

한동안 입을 굳게 걸어 잠그던 리오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에……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 내가 보고 싶어서?”

이번에는 장난식으로 물었다.

그러나 문제는 돌아오는 대답이 장난이 아니었다는 거였다.

“……맞아.”

엥?

나도 모르게 리오나를 바라봤다.

리오나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 분위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주 잘 안다.

나도 어른이니까.

이런 분위기도 못 읽는다는 건 말이 안 되겠지.

리오나가 먼저 살며시 눈을 감았다.

거 봐라.

그거잖아, 그거.

그 뭐시기냐…….

K로 시작해서 S로 끝나는 거.

하지만 지금은 사양하기로 했다.

이런 플래그가 있다.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좋아하는 이성과, 혹은 연인과 키스를 하면 그 등장인물은 전투에서 죽는다는 이상한 법칙 말이다.

플래그가 서는 일은 막고 싶었다.

“일단 전투를 모두 끝내고 돌아오고 나서 생각할게. 그때 대답해도 늦지 않겠지?”

“어? 어…… 마음대로 해.”

리오나는 괜히 무안해진 모양인지 다시 내게서 거리를 벌렸다.

미안하다, 리오나.

난 멀쩡히 살아서 돌아오고 싶다고.

돌아오면 키스든 그 이상이든(?) 뭐든 다 하자.

……말하고 보니 좀 이상하네. 어흠!

* * *

이른 새벽.

나는 조용히 집에서 나왔다.

디바인 생츄어리로 향할 준비를 모두 갖췄다.

괜히 피곤할 텐데 다른 사람들 깨우지 않고 조용히 나 혼자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집 밖을 나서자마자 바로 무산되었다.

“단장님!”

블루로즈단과 레드 라인 기사단, 그리고 레이샤르를 비롯해 라크스 공작 등등.

내가 아는 등장인물들이 두 줄로 서서는 나에게 길을 터 주고 있었다.

“이게 다 뭐야.”

마일이 대표로 답해 줬다.

“로인 님이라면 분명 혼자서 조용히 떠날 거 같아서 제가 사람들을 다 깨웠습니다.”

이 녀석, 쓸데없는 짓을…….

마일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단장님, 혼자서 말도 없이 떠나시려고 하다니,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하다못해 인사는 하게 해 주세요!”

“섭섭합니다, 단장님!”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일에게 괜한 짓을 했다고 잔소리를 하려 했지만, 막상 이렇게 모두가 나를 배웅해 주니 기쁘긴 했다.

나는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모든 사람들과 한 명씩 인사를 주고받았다.

마지막 차례인 라스와 손을 맞잡았다.

“함께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로인.”

“괜찮아. 처음부터 이런 운명이었을지도 모르지.”

라스는 모든 불의 힘을 소진했다.

나와 같이 디바인 생츄어리로 간다 하더라도 큰 도움이 되진 못할 것이다.

라스는 내게 물었다.

“내가 소설 속 주인공이라고 했지?”

“어. 내가 봤을 때에는.”

“칠흑을 쓰러뜨릴 때까지의 이야기의 주인공이 나였다면, 이제부터 이 세계의 주인공은 바로 너야, 로인.”

그 순간.

오랜만에 메시지 갱신 소리가 들렸다.

-띠링! 로인 님의 인물 등급이 변경되었습니다.

-엑스트라에서 주인공으로 인물 등급이 조정되었습니다.

-히든 칭호를 얻습니다.

-칭호 : 이제는 내가 주인공이다.

-효과 : 주인공 보정 효과를 받습니다.

엑스트라에서 주인공으로!

설마 했던 일이 벌어졌다.

나는 라스를 보면서 씨익 웃었다.

“고마워. 덕분에 좋은 선물을 받았어.”

“선물? 난 준 게 없는데?”

“그런 게 있어. 여하튼 그동안 함께 해서 즐거웠어. 나중에 살아서 만나게 된다면, 못다 한 이야기나 마저 나누자고.”

나는 라스를 비롯해 모든 인물들에게 손을 흔들어 줬다.

그리고 말에 올라 타 디바인 생츄어리를 향해 나아갔다.

눈 떠보니 엑스트라에 불과했던 나.

하지만 지금은…….

‘내가 주인공이다!’

* * *

디바인 생츄어리로 향했을 때,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도 신들이 머물다 간 장소라 불리는 성소였다.

하지만 이건 ‘한때’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디바인 생츄어리는 어둠에 물들어 검게 변색되었다.

하늘 또한 짙은 검은 연기가 자리 잡았다.

‘지독하네.’

데르킨을 찾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왔군, 로인……. 아니, 강시언.”

데르킨 백작은 단번에 내 이름을 알아맞혔다.

역시. 아루토리가 한 말 그대로였다.

“내 본명을 어떻게 알았지?”

“내가 직접 내 입으로 알려 줘야 알 수 있나?”

“……아니.”

굳이 데르킨 백작의 대답을 듣지 않아도 된다.

왠지 알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네 눈에도 ‘인물 정보 창’이 보이는 거냐.”

“잘 아는군.”

데르킨 백작은 나와 같은 능력을 지닌 남자였다.

순간 시스템 메시지 소리가 들렸다.

-데르킨 백작의 정보가 갱신되었습니다.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녀석은 일부러 자신의 정보를 공개했다.

스스로 감출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여태껏 정체를 숨겨 왔잖아. 왜 이제 와서 진짜 정보를 공개하려는 거지?”

“모르는 건가? 이전 세계에 있던 나도, 그리고 지금 데르킨 백작으로서의 나도. 모두가 거짓은 아니다. 둘 다 진짜 정보라 할 수 있지.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

강시언과 로인.

둘 다 나다.

데르킨 백작도 같은 생각이었다.

나는 데르킨 백작의 새로운 정보를 확인했다.

-최백현

-인물 등급 : ???

-종합 능력 : ???

-칠흑의 힘을 삼킨 자. 델리피나 대륙으로 넘어와 데르킨 백작으로 활동 중이다. 이전에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거주하던 일반 시민이었다.

“너도 한국인이냐?”

“그런 셈이지.”

설마 여기서 내 나라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최백현.

물론 나는 모르는 사람이다.

내가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을 다 아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언제부터 이 세계로 넘어온 거지?”

내가 가장 궁금했던 게 바로 이거였다.

최백현이 데르킨 백작이 된 시점.

그는 기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칠흑이 테이른을 잠식시켰을 때다.”

최초의 잠식 대상자가 나타났을 때, 그때 최백현은 이곳 델리피나 대륙으로 넘어오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칠흑이 너를 이곳으로 데려온 건가?”

“그런 셈이지.”

그랬군.

이제야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

칠흑은 자신의 밑에서 충실한 부하 역할을 할 등장인물이 필요했다.

칠흑이 찾던 인재상에 가장 부합한 조건을 가진 자가 바로 최백현이었을 터.

그는 나보다 먼저 이곳으로 넘어왔다.

“강제로 이곳에 소환된 건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칠흑이 제안했고, 내가 그것을 받아들였다.”

“어째서지? 굳이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잖아.”

“대한민국에 남아 있다고 한들. 고생을 안 한다는 보장이 있나? 난 오히려 그곳이 더 지옥 같게 느껴지던데.”

“…….”

자꾸 할 말을 잃게 만드네.

부정하고 싶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데르킨 백작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어렸을 때 부모님은 나를 버리고 집을 나갔지. 나는 혼자서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 고생만 하던 나에게 같이 창업을 해 보자고 제안을 해 온 자가 있었지. 쥐구멍에 볕 들 날이 있다는 말을 나는 철썩 같이 믿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자들은 내가 그동안 내가 피땀 흘려 모아놓은 돈을 가지고 튀었지. 사기를 당함과 동시에 살아갈 목적도, 이유도 잃어버렸다. 모든 걸 포기하고 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던 찰나에 달콤한 속삭임이 들려오더군.”

“그게 칠흑이었나?”

“정답이다.”

절망에 빠진 자의 빈틈을 파고드는 방식.

그것이 곧 칠흑의 방식이다.

“이 세계에서의 나는 최백현이었을 때의 나와 다르다. 돈! 명예! 그리고 권력! 이제는 세계까지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지!”

데르킨 백작은 양손을 활짝 펼쳤다.

“쥐구멍에 볕 들 날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오직 어둠만이 나를 구원해 줬지. 나는 이 어둠을 통해 세계를 재정립할 것이다.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공평한 그런 세계를 만들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 버림받고 공사판만 전전하다가 사기를 맞아도 충분히 살 수 있는 그런 공평한 세계를 내 손으로 직접 창조하는 거지! 그러기 위해선 기존의 모든 것들을 파괴해야만 한다. 그 위에 세워질 유토피아를 위해서!”

내가 데르킨 백작, 아니 최백현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다.

“지랄 떨지 마. 미친 위선자 녀석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