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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보니 엑스트라-236화 (236/240)

# 236

반역의 불 (2)

데르킨 백작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은 얼추 예상하고 있었다.

마지막 전투였음에도 불구하고 데르킨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녀석이 칠흑의 힘을 삼킬 때에도 ‘망했다.’라는 생각만 들었을 뿐,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정도의 큰 충격은 받지 않았다.

하지만 아루토리의 개입은 거의 그 정도 충격이었다.

아루토리에게 뭐라 말을 건네기도 전에 그녀는 들고 있던 검을 아래로 내리꽂았다.

그러자 우리들 주변에 수십…… 아니,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빛이 지면에서 세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루토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눈부실 테니까 잠깐 눈을 감고 있는 게 좋을 겁니다.”

그 충고가 끝남과 동시에 밝은 빛이 번쩍였다.

아니.

‘좀 더 일찍 말해 줬으면 좋았잖아!’

* * *

아루토리의 등장.

그리고 그녀의 술수로 인해 디바인 생츄어리에는 데르킨 백작 혼자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로인도, 라스도, 그리고 라크스 공작이 이끌던 병력들도 전부 다 사라졌다.

“설마 막판에 여신이 개입할 줄이야.”

로인과 마찬가지로 데르킨 백작 또한 이번 일을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의 계획은 완벽했을 터.

로인과 라스가 칠흑을 없앤다면, 자신은 칠흑의 남은 구체를 통해서 어둠의 힘을 흡수한다.

설령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로인과 라스는 데르킨 백작의 계획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두 사람이 칠흑에게 죽임을 당하고 칠흑이 이 세계를 삼킨다 하더라도 데르킨 백작의 계획은 성공이나 다를 바 없었다.

하나 완벽한 성공은 아니다.

칠흑과 로인, 라스, 그리고 데르킨 백작을 방해할 모든 자들이 사라져야 그의 계획은 완벽하게 성공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지금의 상황은 데르킨 백작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아쉽군. 여신만 없었더라면 내 계획은 완벽하게 달성되었을 텐데.”

하나 상관은 없다.

“어차피 여신의 개입은 여기까지일 터.”

데르킨 백작도 반드와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었다.

여신이 인간계에 관여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그걸 알면서도 아루토리는 일부러 개입을 했다.

그래서 데르킨 백작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뭐, 좋다.”

데르킨 백작은 자신의 소환수들을 전부 꺼내 보였다.

검은 짐승들은 칠흑의 힘으로 더욱 강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데르킨 백작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가서 이 세계를 집어삼키거라.”

데르킨 백작의 말에 따라 검은 짐승들은 각각 다른 방향으로 빠르게 흩어졌다.

이후 그는 무기 형태의 칠흑의 조각, 소드(Sword)를 꺼내 들었다.

소드를 거꾸로 든 채 아루토리가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면에 소드를 박아 넣었다.

소드를 중심으로 대지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시간이 좀 걸릴 뿐……. 나의 계획은 변함없다.”

데르킨 백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후후, 이제 이 세계는 내 것이다……!”

최종 보스 처리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흑막.

데르킨 백작.

그가 바로 진 보스였다.

* * *

아루토리가 우리를 이끌고 대규모 순간 이동을 펼쳤다.

도착지는…….

“여긴, 나울이잖아?”

“우리가 어떻게 나울에……!”

“그보다 방금 그 빛은 뭐야?”

병력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루토리를 빤히 응시했다.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였다.

“반드의 말에 따르면 여신은 인간계에 개입할 수 없다고 했는데.”

어느 순간 아루토리 쪽으로 다가온 반드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도 아루토리의 행동을 이해 못 하는 듯했다.

“그건 전 우주의 법칙이자 세계의 이치, 순리의 법칙일 텐데. 어째서 개입했지?”

반드가 물었다.

그 와중에 아루토리의 인형 육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루토리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선물이에요.”

“선물?”

“그래요, 로인. 당신에게 여신, 아루토리가 주는 선물.”

인형의 육신이 점점 가루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루토리의 녹색 눈동자는 끝까지 나를 응시했다.

“당신은 제가 여태껏 들어보지 못한 대답을 들려줬어요. 선택지를 주면 보통은 그 선택지 안에서 자신의 결정을 내리곤 하죠. 하지만 로인, 당신은 달랐어요. 인간이면서도 여신이 만든 틀에 구애되지 않고 자신만의 선택지를 만들어 가겠다고 말했죠. 저는 그 대답이 너무 마음에 들었거든요.”

칭찬인 거 같긴 한데…….

솔직히 나는 그때 아루토리의 말에 너무나도 싫증이 나고 짜증이 나서 그냥 확 내지른 말이었다.

하나 아루토리는 내 대답이 꽤나 마음에 든 것 같다.

“인간의 존재가 지닌 가능성을 보여 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로인, 당신은 자신이 내린 대답을 이제 저에게…… 아니, 이 세계의 존재하는 모든 이들에게 증명해 보이기만 하면 돼요.”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아루토리는 내게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겼다.

“데르킨, 그자도 당신과 같으니까요.”

“……!”

그러나 그 이상의 말은 들을 수 없었다.

이미 아루토리의 조종을 받던 인형은 가루가 되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반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데르킨이 단장과 같다고? 무슨 뜻이지?”

“…….”

나는 반드의 말에 좀처럼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아루토리의 말이 사실이라면…….

“젠장!”

처음부터 칠흑을 노릴 게 아니라 데르킨부터 노렸어야 했다.

어쩐지, 중간 보스 주제에 행보가 너무 이상하리만치 비중이 높다 싶었다.

물론 아직까지 확인된 건 아니다.

‘내가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어.’

어차피 누군가는 데르킨 백작을 막아야 한다.

칠흑의 힘을 가진 자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다.

* * *

병력들을 잠시 쉬게 놔둔 사이 라크스 공작은 우리를 불러 모았다.

회의에는 이번 디바인 생츄어리 전투에 참가했던 병력들의 대표들이 참가했다.

라스 일행과 휴즈도 참가했다.

라크스 공작은 우리에게 안 좋은 소식 하나를 들려줬다.

“전 세계 각지에서 데르킨 백작이 소환한 소환수들이 도시를 파괴하고 있다고 하더군.”

난 이 정보를 마일로부터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열 마리의 소환수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델리피나 대륙을 잠식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얀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 하며 물었다.

“그, 그럼 어쩐단 말입니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지 않았나?”

라크스 공작은 우리들을 쭉 훑으면서 자신이 생각한 대답을 내놓았다.

“병력들을 열 개 부대로 분산시켜 소환수들을 막는다. 그리고 하나 더. 최정예 멤버들을 선정해 부대를 구성한다. 그 부대는…… 데르킨을 없애러 디바인 생츄어리로 간다.”

녀석은 아직 디바인 생츄어리에 있다.

마치 그곳에서 일부러 남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올 테면 오라는 식으로.

그런다고 우리가 안 갈 줄 안다면 큰 오산이다.

리오나가 라크스 공작에게 물었다.

“별동대는 어떻게 꾸릴 거죠?”

“각 부대에서 능력 있는 자들을 선별해 모으면 될 거다. 상대는 칠흑의 힘을 삼킨 데르킨 백작이니 조심, 또 조심해야 할 거다.”

첸버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단장. 우리 쪽 인원을 저쪽 별동대로 많이 빼야 할 거 같은데.”

“아니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별동대는 필요 없습니다.”

“필요 없다고?”

“네.”

어차피 이번 일은 모두 계획되어 있었다.

데르킨 백작을 상대해야 하는 사람 또한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저 혼자 디바인 생츄어리로 가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놈의 소환수들을 막아 주세요.”

“자, 잠깐만!”

“지금 제정신인가?”

“데르킨 백작을 혼자서 상대하겠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게!”

여기저기서 강한 반발이 일었다.

이런 반응이 나올 거라고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고집을 꺾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러는 게 가장 현명한 분배 방식입니다. 라크스 공작님.”

“…….”

나는 라크스 공작에게 말머리를 돌렸다.

결정권은 라스크 공작이 대부분 가지고 있는 상태다.

라스크 공작은 내게 물었다.

“혼자서 가려는 이유가 뭐지?”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글레드의 가호를 받지 않은 자가 떼로 덤벼 봤자 칠흑의 힘을 가진 존재에겐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을 겁니다. 효율적인 전투를 진행하려면, 글레드의 힘을 가지고 있는 제가 혼자서 데르킨을 마크하는 것이 좋습니다.”

“좋네. 그럼 두 번째는?”

두 번째 이유가 핵심이다.

“그자가 저와 같기 때문입니다.”

“같다고? 그게 무슨 뜻이지? 자네, 우리에게 뭔가 감추고 있나?”

여태껏 감춰 왔던 나만의 비밀.

이들에게 지금껏 숨겨 온 진실을 전부 오픈하기로 했다.

“전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입니다.”

* * *

내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는 사실은 나와 테이른, 그리고 휴즈밖에 없다.

테이른은 죽었으니, 이제 나와 휴즈밖에 없는 셈이다.

휴즈는 나를 말없이 바라봤다.

내가 이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말고는 오롯이 나의 결정에 따른다.

왜냐하면 이건 내 일이니까.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은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라스만이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쩐지……. 그랬군.”

“알고 있었어?”

“로인, 네가 어비스 레기온에서 나에게 소리칠 때, 잠깐 너의 과거가 보였거든. 내가 아는 그런 세계의 모습이 아니었지.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군.”

어비스 레기온에 그런 기능도 있었나?

뭐, 상관은 없다.

어차피 다 오픈한 마당에 그게 뭐가 중요하겠나.

나는 이들에게 그간의 사정을 들려줬다.

다른 세계에서 편집자로 일했던 것. 그리고 테이른이 보내온 《델리피나 전기》라는 책을 접하게 되고 차원 이동을 해서 이곳까지 오게 된 일을 비롯해 라바인 전투에서 용신단을 삼킨 것 등.

나에 관한 모든 걸 다 들려줬다.

리오나는 충격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내게 물었다.

“왜 그런 걸 다 이야기해 주는 거야? 숨겨도 무방했잖아?”

이유가 있었다.

“내가 데르킨에게 질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되면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을 것이다.

그전에 나는 그동안 감춰 왔던 ‘강시언’이라는 내 본래의 모습을 이들에게 알려 주고 떠날 생각이었다.

“그동안 숨겨서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네.”

라크스 공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거 같으니까. 만약 자네가 처음부터 전면으로 나서려 했다면, 오히려 칠흑의 표적이 되어서 자네가 먼저 죽게 되는 결과가 되었을지도 몰라. 뒤에서 움직이면서 칠흑과 우리 인류가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려 준 것만으로도 훌륭한 업적이었네. 자네의 행동은 비난이 아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해.”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님.”

내가 한 모든 행동들이 헛수고는 아니었다.

어쩌면 나는 이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해 온 모든 것들, 그리고 내가 해 온 모든 노력들이 누군가에게 인정받는다는 건 나 자신의 존재에 가치가 있음을 입증하는 것과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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