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
반역의 불 (1)
각성한 라스를 본 칠흑의 표정은 삽시간에 굳어졌다.
“……무슨 짓을 한 거냐?”
“아무런 짓도 안 했다. 오히려 나보다 로인이 뭔가를 하긴 했지.”
이 녀석 봐라?
주인공 주제에 엑스트라 쑥스럽게 만드네.
내가 한 건 별거 없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주인공이랑 말 놓고, 그리고 ‘정신 차려라, 이 새끼야!’라고 소리 몇 번 쳐 준 게 다다.
라스는 테이른의 어깨를 부축했다.
테이른의 얼굴을 바라본 라스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는 그리움과 아쉬움, 그리고 슬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
“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라스…….”
테이른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미 피의 색은 더 이상 붉은색을 띄지 않았다.
검은 색 피였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테이른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자신의 목숨과 맞바꿔서 우리를, 라스를 구해 준 것이다.
칠흑이 검은 연기를 쏘아 냈다.
그러나 라스의 화기 때문에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이미 라스는 칠흑과 검은 태양의 힘을 뛰어넘었다.
라스는 조심스럽게 테이른을 눕혔다.
“조금만 쉬고 계세요, 아버지. 금방 끝내고 오겠습니다.”
라스의 말을 듣자마자 칠흑이 크게 분노했다.
“끝낸다? 끝내는 건 내가 할 일이다!”
검은 가시와 촉수, 짐승의 머리들이 셀 수도 없이 형성되어 라스를 덮쳤다.
그러나 라스는 손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칠흑의 모든 공격을 무효화시켰다.
그런 뒤, 이렇게 말했다.
“더 이상 네게 주도권은 없다. 나에게 있지.”
“건방진 녀석……!”
칠흑의 모든 관심은 이미 라스에게 쏠려 있었다.
그 사이에 라스는 나와 휴즈에게 외쳤다.
“검은 태양을 맡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저는 이 녀석을 상대하겠습니다!”
지금의 라스라면 혼자서 충분히 칠흑을 압도하고도 남을 것이다.
나와 휴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태양의 위치부터 찾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공교롭게도 나는 그 해답을 발견했다.
라스가 어둠의 벽에 갇혀 있을 때였다.
“스승님.”
“어. 왜 그러냐.”
“아까 벽 안에 갇힌 라스의 모습이 보였죠?”
“나? 보였다마다.”
나는 글레드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어둠을 꿰뚫어볼 수 있는 안목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휴즈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
글레드의 힘도 테이른에게 일시적으로 소량만 빌렸을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즈는 나와 같은 ‘시선’으로 라스가 지닌 어둠의 본질을 꿰뚫어봤다.
휴즈가 가진 ‘진실의 눈’ 덕분이었다.
“스승님의 눈은 거짓된 것을 가리고 사물의 진실된 면모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실의 눈을 사용하면 이 거짓된 어둠 속에 숨어 있는 검은 태양의 ‘진짜 위치’를 알아낼 수 있다는 뜻과 같습니다.”
“과연, 그런 거로군!”
휴즈의 한쪽 눈동자에서 녹색 빛이 흘러나왔다.
여신 아루토리가 가지고 있던 바로 그 진실의 눈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주변을 빠르게 살피던 휴즈가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다!”
우리는 재빨리 이동을 개시했다.
그때, 칠흑이 본능적으로 위기를 직감한 모양인지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네놈들이 감히……!”
감히는 개뿔!
나는 글레드를 펼쳐 장막을 만들어 냈다.
칠흑의 기습은 내 글레드 장막에 그대로 막혔다.
“잊었냐, 검은 녀석.”
나도 모르게 씨익 웃었다.
“나 또한 글레드에게 선택받은 자라는 사실을!”
지상 최강의 엑스트라인 나, 로인을 얕보면 쓰나!
그러다가 큰코다치지!
나는 남은 글레드를 전부 휴즈에게 넘겼다.
“스승님! 글레드를 활용하면 검은 태양은 쉽게 부술 수 있을 겁니다! 전 라스와 함께 칠흑을 막을 테니 뒷일은 맡기겠습니다!”
“오냐! 책임지고 임무 완수하마!”
권왕 휴즈라면 믿고 맡길 만하다.
내가 칠흑을 막아서는 동안, 라스는 어느새 다가와 화염으로 날을 만들어 칠흑의 상반신과 하반신을 잘라 냈다.
원래 이런 공격은 칠흑에게 통하지 않았다.
하나 그건 라스가 각성하기 이전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크윽!”
칠흑의 입에서 처음으로 침음이 흘러나왔다.
많이 아프겠지.
글레드에 주인공 각성 능력까지 담긴 일격을 정통으로 맞았으니까!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이거나 먹어라!”
용의 숨결…… 아니, 글레드의 숨결을 발동시켰다.
빛이 크게 번쩍하더니 칠흑의 상반신 절반을 날려 버리는 데에 성공했다.
라스의 각성 능력이 워낙 잘 먹혀서 그렇지, 아직 칠흑에게 글레드의 힘 또한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로인……!”
칠흑은 나를 보면서 이를 바득 갈기 시작했다.
녀석은 마지막까지 나를 삼키기 위해 입을 벌리면서 내게 달려들었다.
난 녀석을 발로 뻥! 차 버렸다.
“꺼져라, 빌어먹을 자식아!”
멀리 튕겨나간 칠흑의 상반신은 이내 빠른 속도로 복구되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라스의 불이 놈의 몸을 휘감았다.
“크아아아악!”
칠흑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저놈도 비명을 지를 줄 아는군.
처음 알았다.
아무리 라스가 각성해서 강해졌다 하더라도 이런 소모전은 무의미하다.
게다가 어비스 레기온은 칠흑에게 계속해서 무한한 힘을 공급한다.
결국 파훼법은 검은 태양을 없애는 일이다.
한창 전투를 치르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검은 천장에 커다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균열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스승님이 성공했구나!’
본능적으로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휴즈는 검은 태양의 잔재를 들어 올리면서 우리에게 외쳤다.
“나머지는 너희에게 맡기마!”
“감사합니다, 스승님!”
나는 라스와 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내가 먼저 칠흑에게 달려들었다.
칠흑은 나를 향해 검은 연기를 발사했다.
무수한 연기들이 내 몸을 감쌌다.
다 죽어 가는 마당에 이런 힘을 쓸 수 있다는 게 대단하게 느껴졌다.
‘하긴. 이러니까 최종 보스겠지!’
하지만 우리는 글레드의 불로 검은 연기들을 몰아냈다.
그러고는 거대한 불의 창을 만들어 놈에게 있는 힘을 다해 날렸다.
푸우욱!
불의 창은 칠흑의 가슴을 꿰뚫었다.
이윽고 라스가 불에 감싸인 손을 뻗어 칠흑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작별이다, 칠흑.”
콰직!
그대로 칠흑의 머리를 터트려 버렸다.
놈의 몸은 재가 되어 사라졌다.
칠흑에게 2페이즈는 존재하지 않았다.
라스의 손에 무기력하게 소멸된 것이다.
이것이 최종 보스의 최후였다.
* * *
칠흑이 사라짐과 동시에 어비스 레기온 또한 자취를 감췄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깨진 검은 태양뿐.
어비스 레기온이 사라지자 어둠에 잠식되었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리오나가 나를 보면서 물었다.
“칠흑은? 어떻게 됐어?”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다 끝났어.”
최종 보스는 쓰러졌다.
하나 그 과정에서 희생이 발생했다.
“아버지!”
라스는 테이른이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뛰어갔다.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상태였다.
테이른은 손을 뻗어 라스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
그러나 도중에 그의 손은 멈췄다.
라스의 얼굴에 검은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라스를 올려다보던 테이른은 이내 숨을 거뒀다.
하고 싶은 말이 참으로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은 테이른에게 그런 시간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아버지……!”
라스는 테이른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는 동안에 라스의 주변에 일렁이던 글레드의 불길은 점점 소멸되었다.
칠흑을 쓰러뜨리기 위해 라스는 가지고 있던 글레드의 모든 힘을 소진했다.
인페르노 하트 역시 글레드와 함께 소멸되었다.
최후의 일결을 다해 칠흑을 쓰러뜨린 라스.
대신, 그는 주인공으로서의 강함을 잃게 되었다.
하나 상관없다.
어차피 칠흑은 쓰러졌으니까.
검은 태양도 사라지려는 모양인지 연기 형태로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자세히 보니 흩어지는 게 아니었다.
어느 한곳으로 집결하려는 움직임을 펼쳤다.
“뭐, 뭐야?”
“저 검은 연기들…… 움직이는 게 뭔가 수상하지 않아?”
뒤늦게 사람들은 검은 연기의 움직임에 이상함을 느꼈다.
검은 연기는 한곳으로 모이더니, 이내 작은 검은 태양으로 다시 재구성되었다.
“설마……!”
“칠흑이 다시 살아나는 거야?”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분명 라스의 손에 쓰러졌을 터!
그러나 검은 태양은 점점 형태를 갖춰 가기 시작했다.
아직…… 칠흑의 심장은 파괴되지 않았다!
“젠장!”
다급하게 글레드의 힘을 다시 끌어 올렸다.
그러나 힘이 부족했다.
라스는 더 이상 글레드의 불을 소환할 수 없다.
테이른 역시 글레드를 모두 소진하고 숨을 다했다.
이중에서 글레드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다!
‘나 혼자서 칠흑을 막을 수 있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검은 용이 나타나 검은 태양을 입에 문 채 어디론가 향했다.
많이 봤던 용이었다.
잠시 후 용은 검은 태양을 한 남자에게 바쳤다.
나는 남자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데르킨!”
여태껏 코빼기 하나 보이지 않았던 데르킨 백작이 막판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녀석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나 대신 칠흑을 없애 주느라 고생 많았네, 로인. 그리고 라스.”
“‘나 대신’이라고?”
순간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도 잠시 뒤 검은 구체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데르킨! 내게 너의 검은 용을 바쳐라! 잠식할 수 있는 육신만 있으면 난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칠흑의 목소리였다.
역시 녀석은 아직 살아 있었다.
하나 칠흑은 아직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한 듯했다.
데르킨 백작은 한 손에 담을 정도로 작아진 검은 태양을 바라봤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데르킨, 설마 네놈……!
“그동안 수고 많았다, 칠흑. 이제 너의 힘은…… 내 것이다!”
데르킨 백작은 검은 구체를 마치 사과 먹듯이 우적우적 씹어 먹기 시작했다.
칠흑은 절규했다.
그러나 그 절규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검은 구체를 전부 삼킨 데르킨 백작은 옅은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후후후…… 그렇군. 이것이 바로 칠흑의 힘이로군!”
“저, 저 녀석……!”
“칠흑을 삼켜 버렸어!”
병력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나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데르킨 녀석, 처음부터 칠흑을 배신할 생각이었나!’
《델리피나 전기》 내에선 이런 내용은 없었는데?
하기야 데르킨 백작이 후반까지 살아남은 것도 원래는 원작에 없었던 내용이다.
데르킨 백작이 칠흑의 힘을 손에 거머쥠으로 인해서 그는 막강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놈이 우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우선은 가장 방해가 될 로인, 자네부터 없애도록 하지.”
“큭……!”
글레드를 소환하려 했지만 너무 늦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간신히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 최종 보스까지 쓰러뜨렸는데!
마지막을 예감하며 눈을 질끈 감으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빛의 기둥이 내려왔다.
기둥에서 나온 존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존재였다.
‘아루토리가 어째서 여기에……!’
여신이 강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