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234화 (234/240)

# 234

검은 태양 (2)

테이른과 휴즈를 설마 이 타이밍에, 그것도 어비스 레기온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두 사람의 등장 덕분에 칠흑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또 네놈들인가!”

테이른은 칠흑의 말에 대답조차 할 가치를 못 느낀 모양인지 대뜸 공격부터 하고 봤다.

그의 손에서 글레드가 뿜어져 나왔다.

여태껏 보지 못했던 화기다.

테이른은 나와 라스완 다르게 글레드를 마음껏 활용하지 못하는 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힘을 끌어낸다는 건…….

‘죽음을 각오한 건가?’

테이른이 칠흑을 상대로 시간을 버는 동안, 휴즈는 나를 부축했다.

“여태껏 잘 버텼다, 로인.”

“스승님을 여기서 보니 정말 반갑군요. 그보다 여기서 어떻게 움직이실 수 있는 겁니까?”

글레드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곳이 바로 이곳, 어비스 레기온이다.

실제로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즈는 어비스 레기온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있었다.

“테이른, 저 친구가 나에게 임시로 글레드를 줘서 그렇다.”

“본인이 사용할 양도 얼마 없을 텐데…….”

휴즈도 테이른이 스스로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휴즈와 테이른에게 정보를 하나 흘리기로 했다.

“라스를 구해야 합니다. 아직 살아 있을 거예요.”

칠흑은 나를 봤을 때 어비스 레기온에서 제정신으로 버티고 있는 사람이 ‘또’ 있다고 했다.

그 말은 곧…….

‘라스도 아직 멀쩡히 있음을 뜻하는 거겠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라스다.

라스를 어떻게든 구해 내야 한다.

그리고 칠흑을 상대로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

양손에 글레드의 불길을 가득 소환한 테이른이 우리 두 사람에게 외쳤다.

“가서 라스를 찾아라! 여긴 내가 맡고 있을 테니까, 어서!”

“하지만 자네……!”

“이대로 가면 모두 검은 태양에게 잠식되고 말 게야! 그전에 라스를 먼저 구해야 해!”

“…….”

휴즈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 움직일 수 있나?”

“예. 이제 괜찮습니다.”

용신단의 회복력은 아직 건재했다.

검은 가시에 허벅지를 관통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회복되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글레드와 용신단 덕분에 회복 속도는 더욱 빨랐다.

나는 벨라시오닉을 불렀다.

‘벨라시오닉! 제 목소리 들립니까?’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레이샤르도, 라크스 공작도.

모두가 다 감감무소식이었다.

“젠장……!”

전부 다 검은 태양에게 먹혀 버린 건가.

칠흑 그 자체인 어둠을 뚫고 라스를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화르륵!

글레드의 불씨를 더 키웠다.

이런 식으로 계속 글레드를 낭비하면 큰일인데.

‘그보다 테이른이 칠흑을 상대로 얼마나 시간을 벌어 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

오래 버티진 못할 것이다.

글레드의 불빛 하나에 의존해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앞을 향해 가던 찰나였다.

퉁!

뭔가가 발끝에 걸렸다.

‘설마 이거…… 벽인가?’

앞을 만져 봤다.

틀림없다. 벽이었다.

글레드의 불빛을 비췄다.

점점 가까이 가져가니 벽 너머가 보이기 시작했다.

안에는 검은 불길에 사로잡힌 채 정신을 잃은 라스의 모습이 보였다.

“스승님! 여기입니다!”

휴즈도 안에 라스가 갇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주먹을 힘 있게 말아 쥐었다.

“뭔가를 부수는 건 내 특기지!”

힘껏 주먹을 휘두르는 휴즈.

권왕이라 불리는 그의 주먹이라면 제아무리 칠흑의 벽이라 하더라도 무너뜨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터엉!

휴즈의 주먹은 도리어 벽에 가로막혀 반동으로 튕겨 나왔다.

“음?”

휴즈는 순간 방금 벌어진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부수지 못하는 벽은 없을 터!”

다시 한 번 도전해 봤으나 결과는 아까와 마찬가지였다.

Ctrl + C, Ctrl + V 같은 ‘복사’, ‘붙여넣기’를 보는 줄 알았다.

그 정도로 굉장히 흡사한 결과가 반복되고 또 반복되었다.

이쯤 되니 휴즈의 자존심에 도리어 금이 가는 듯했다.

벽에 금이 가야 하는데, 이상한 쪽에 균열이 생겨 버렸네.

휴즈는 내 쪽을 슬쩍 바라봤다.

“나의 제자여.”

뜬금없이 이럴 때에만 제자라고 하네.

“너라면 스승이 못다한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 믿음, 스승님의 자존심처럼 부서질 수도 있는데요.”

“괜찮다. 네가 해낸다면 내 자존심도 지킬 수 있으니까.”

사실 휴즈보다 내 펀치력이 더 강하긴 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휴즈는 인간이고, 나는 드래곤의 육신이 지닌 능력을 가지게 된 특별한 인간이니까.

휴즈도 그걸 잘 알기에 나한테 바통을 넘긴 것이다.

손에 글레드를 잔뜩 묻혔다.

그냥 맨주먹으로 때리는 것보다 이러는 편이 더 잘 먹힐 거 같아서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다.

“후우.”

심호흡을 내쉬었다.

있는 힘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쿠웅!

소리만 크게 날 뿐, 벽은 멀쩡했다.

“안 되겠는데요?”

나는 빠르게 항복 선언을 했다.

몇 차례 더 해 보라는 휴즈의 말이 있었지만, 나는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이건 우리가 아무리 때리고 때려도 부술 수 없는 벽이란 사실을.

칠흑이 인위적으로 만든 벽이 아니다.

이건…….

“라스가 만든 벽이에요.”

* * *

인간은 누구나 마음속에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다.

인간인 이상 반드시 착한 생각만 하고 지내는 건 아니니까.

라스도 마찬가지다.

소설 속 주인공이라고 만능이 아니다.

먼치킨이라 하더라도 완벽한 존재는 있을 수 없다.

주인공도 실수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안 좋은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마음속에 자리 잡은 어둠.

애써 모른 척해 왔던 어둠은 누구나 마음속에 존재한다.

나 역시도 똑같다.

하물며 라스라고 없을까?

라스는 소설 속 주인공으로서 여태껏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부담감과 싸워 왔다.

지금까지는 잘 이겨 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조금만 건드려도 폭발하는 폭탄과도 같다.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폭탄.

주인공의 이런 고충은…… 단순히 소설을 읽는 것만으론 이해할 수 없다.

소설 속으로 들어와서 주인공의 고뇌를 직접 듣고 눈으로 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다.

편집자인 나 또한 소설 속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주인공의 고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라스.

그 또한 인간이다.

마음속에 내제되어 있는 어둠 또한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은 주인공이 그 어둠에 사로잡혀 먹힐 때가 아니야!’

주인공이면 주인공답게 이런 위기 정도는 금방 해쳐 나오라고!

나는 다시 한번 주먹을 내질렀다.

그리고 외쳤다.

“라스! 언제까지 마음 편히 그 속에서 쳐 자고 있을 거냐!”

존칭 따윈 그새 잊어버렸다.

지금 세계가 칠흑에게 먹히게 생겼는데 그게 중요한가?

천만에!

자극적인 말을 해서라도 라스를 깨우는 게 우선이다!

나는 또 다시 벽을 두드렸다.

사정없이.

라스가 깨어날 때까지!

라스는 그제야 조금씩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실눈을 뜨고서 나를 바라봤다.

“로……인……?”

나를 알아보긴 하는 것 같다.

“정신 차려, 라스! 지금 그렇게 태평하게 자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어서 이 벽을 없애! 너라면 할 수 있잖아!”

주인공 보정을 받는 라스다.

어떤 위기 상황에서라도 그가 의지만 발휘하면 해결될 것이다.

이런 벽 따위도 라스 앞에서는 종이짝에 불과할 터.

문제는…….

“그런다고 해도 의미가 있을까?”

“뭐?”

“어쩌면 칠흑에게 잠식당하는 게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 새끼,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야!

라스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나 하고 있는 걸까?

“그토록 증오하는 칠흑에게 잡아먹히겠다는 소리나 하고 있는 거냐! 복수할 거라며! 네 불은 그 복수의 증거 아니냐!”

“……내가 칠흑을 없앤다고 한들, 아버지는 돌아오시지 않아. 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발버둥 쳐야 하는 거지? 내가 이런다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닐 텐데.”

그래. 이해는 한다.

죽어라 복수를 해 봤자 이미 떠나 보낸 소중한 이는 다시 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작중에서도 라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죽은 줄로만 생각하고 끝을 맞이하게 된다.

그럼 여기서 이야기를 비틀어 볼까!

“네 아버지, 살아 있다.”

“……뭐라고?”

라스가 내 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휴즈는 나에게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그런 복잡한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나도 안다.

테이른이 끝까지 자신의 존재를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했던 거.

하지만 그 부탁을 들어주다가 세계가 멸망하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않은가.

그리고 라스가 불쌍하지도 않나?

여태껏 아버지가 죽은 줄로만 알고 절망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 간신히 버티고 있는데. 적어도 희망의 끈 정도는 내려 보내 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라스에게 ‘희망’이라는 것을 주기로 했다.

“지금 네 아버지가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칠흑과 홀로 맞서 싸우고 있다! 네가 이렇게 그 안에서 궁상 떨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상황은 많이 안 좋아질 거야!”

쩌적!

벽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잘 들어, 라스. 네 불은 너만의 것이 아니다. 네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그리고 델리피나 대륙을 구해 달라는 모든 바람들이 뭉쳐 생겨난 불이야. 이들의 바람을 저버리지 마라. 네 사명을 다해. 네 역할을 다해! 그것이…… 지금 네가 할 일이니까!”

쩌저적!

균열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나와 휴즈는 뒤로 물러섰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주인공이 각성할 때임을!

퍼어엉!

벽이 폭발했다.

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터벅터벅 걸어 나오는 한 남자.

그의 주변에는 범접할 수 없는 글레드의 강렬한 화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어둠조차 지금의 라스에겐 함부로 접근하지 못했다.

이것이…… 내가 바라던 주인공의 각성이다.

라스는 내쪽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아버지가 있는 쪽은?”

그래, 이 소설의 주인공은 라스다.

엑스트라인 내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따라와. 안내해 줄게.”

주인공을 엔딩의 길로 안내하는 것.

* * *

테이른의 불이 점점 꺼져 가기 시작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첫 전투 때부터 참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검은 태양의 존재를 깨달은 순간, 테이른은 섣불리 전투에 나설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로인 일행에게 검은 태양의 정보를 알리려 했으나 이미 전투는 시작된 때였다.

너무 늦었다.

칠흑은 테이른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넌 언제나 늦는군, 테이른!”

“……칠흑!”

테이른의 글레드가 칠흑을 덮쳤다.

그러나 자신의 심장인 검은 태양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어 글레드와 맞먹는 불의 능력을 사용하게 된 칠흑에겐 더 이상 테이른의 힘이 통하지 않았다.

그를 쓰러뜨리려면 좀 더 강력한 불이 필요하다.

하나…….

지금의 테이른은 검은 불을 능가하는 불을 가지지 못했다.

‘여기까지인가…….’

테이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해다오, 라스…….’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마친 순간, 백색의 불이 검은 불을 몰아냈다.

테이른이 가진 불보다도 강하고…… 따스한 불.

“이제부터는 내가 상대하마, 칠흑.”

각성한 주인공, 라스의 등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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