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엑스트라-233화 (233/240)

# 233

검은 태양 (1)

라스가 잠시 이탈하긴 했지만, 그래도 할 만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게 다 용신단 100레벨을 만들어 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글레드를 묻힌 불덩이들을 사정없이 던졌다.

칠흑은 검은 연기로 장막을 만들어 내며 글레드를 막아 내려 했다.

그러나 글레드의 불은 역으로 장막을 불태우면서 칠흑의 신체 일부를 증발시켰다.

레이샤르와 벨라시오닉의 합동 공격이 바로 이어졌다.

드래곤들의 브레스를 정면으로 받아 내는 칠흑.

그는 한쪽 무릎을 굽힌 채 글레드에 이은 드래곤들의 브레스를 간신히 막아 내고 있었다.

이 틈을 노려 베라와 케프리가 달려들었다.

“측면을 노리세요!”

“알고 있어!”

베라와 계속해서 훈련을 거듭한 덕분에 케프리는 ‘전략’이라는 걸 곁들인 싸움 방식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예전에 비하면 확실히 싸움 방식이 정갈해졌다.

처음 만났을 때 당시에는 그냥 주먹구구식으로 싸우던 녀석이었는데 말이다.

베라와 케프리가 각각 오른쪽, 왼쪽으로 흩여져 칠흑의 사이드를 공략했다.

아무리 칠흑이라 하더라도 여타 다른 검은 괴물들이 보여 준 것처럼 검은 심장을 뽑아 파괴하면 녀석을 쓰러뜨릴 수 있을 터!

휴즈도 카오스 필드에서 칠흑의 그러한 약점을 노려 봤지만, 그때 당시에는 심장의 위치를 찾을 수 없어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과연……?

베라의 단검이 칠흑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케프리의 발톱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칠흑의 심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도대체 심장을 어디다 숨긴 거야, 이 빌어먹을 녀석!”

결국 욕지거리를 내뱉는 케프리.

나도 케프리와 같은 심정이다.

무슨 토끼와 거북이 전래동화도 아니고.

설마 심장을 어디 다른 곳에 꼭꼭 숨겨 둔 건 아니겠지?

칠흑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우리를 비웃었다.

“멍청한 녀석들이군. 먹잇감 주제에 감히 내 심장을 탐하려고 하는 건가?”

칠흑의 모습이 다시 라우르시스의 모습으로 변했다.

공중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하는 라우르시스 버전 칠흑.

나는 벨라시오닉을 향해 외쳤다.

“위로 올라타겠습니다! 괜찮죠?”

-언제는 네가 나한테 허락 받고 뭐 한 적 있었나!

하긴 맞는 말이다.

공중으로 크게 도약해 벨라시오닉의 등에 얌전히 올라탔다.

설마 드래곤을 타고 칠흑과 싸우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칠흑의 근처에 검은 탄들이 형성되었다.

무수한 탄들은 우리를 비롯해 아군들에게 날아들었다.

마법사들이 장벽을 쳐 봤지만, 칠흑의 탄을 막아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녀석을 막기 위해 글레드를 던지려 했다.

하나 그 전에 나보다 먼저 칠흑을 향해 ‘선빵’을 날린 사람이 있었다.

우우웅!

거대한 검기가 라우르시스를 일도양단(一刀兩斷) 내 버렸다.

검기의 주인인 라크스 공작이 우리에게 외쳤다.

“로인! 지금이다!”

“틈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크스 공작님!”

생각해 보니 우리는 라스 못지않은 능력을 지닌 존재가 있었다.

바로 라크스 공작이었다.

라크스 공작의 칼질 한 방에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나 버린 칠흑.

나는 놈이 재생하지 못하게 빠르게 글레드를 날렸다.

화르르르륵!

글레드의 흰 불길이 라우르시스의 몸을 태워 가기 시작했다.

라우르시스는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놈에게서 검은 연기가 빠르게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레이샤르가 침음을 흘렸다.

“라우르시스를 버렸군……!”

그 말은…….

아래에 추락해 재가 되어 사라진 건 칠흑이 아닌 잠식되었던 라우르시스임을 뜻했다.

혼돈을 추구하는 자의 어이없는 최후였다.

레이샤르와 벨라시오닉은 한동안 라우르시스의 사라진 흔적을 응시했다.

동족의 죽음이 이들에게 주는 충격은 전혀 없지 않았다.

하나 지금은 슬픔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검은 연기에서 다시 본래의 인간형 모습으로 돌아온 칠흑은 화가 잔뜩 난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줬다.

“거슬리는 놈들……! 봐주려고 했건만, 슬슬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는군!”

“너에게도 인내심이라는 게 있냐?”

인내심은 개뿔!

보자마자 살아 있는 거든 죽어 있는 거든 무조건 먹어치울 생각밖에 안 하던 녀석인데, 인내심이 어디 있을까.

칠흑은 코웃음을 쳤다.

녀석의 모습이 다시 변하기 시작했다.

검은 연기가 수십 개의 입으로 변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을 전부 다 집어삼킬 기세로 입들이 날아들었다.

칠흑의 입들에게 무자비하게 잡아먹히는 병력들.

칠흑의 포식 본능은 멈추지 않았다.

수백, 수천 개의 입들이 하늘을 가득 매웠다.

그때, 라스의 글레드가 입들의 과반수를 불태웠다.

“로인 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인공 양반!

라스의 합류를 확인하자마자 나 역시 글레드를 얇게 펼쳐 사방으로 날려 보냈다.

글레드에 닿는 족족 입들은 불타 사라졌다.

칠흑에게 글레드가 약점인 이상, 놈의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칠흑은 우리를 매섭게 노려봤다.

자, 이제 어쩔 거지?

칠흑이 이끄는 검은 괴물 군단은 거의 궤멸 직전이다.

루크도, 마리도. 그리고 칠흑의 조각으로 잠식시켰던 카이딘조차도 제정신을 차리고 다시 칠흑에게 칼을 겨누기 시작했다.

라스가 무사히 살아남은 덕분에, 그리고 글레드라는 존재를 발견한 덕분에, 나는 《델리피나 전기》에 적혀 있는 베드 엔딩 루트를 피할 수 있었다.

외통수다!

그렇게 생각을 할 무렵…….

“……후후후.”

칠흑은 낮게 웃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나는 그 웃음이 허세를 부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칠흑이 이 많은 병력을 상대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칠흑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봤자 나와 라스가 있는 이상 검은 연기의 힘은 통하지 않을 테고, 여차하면 라크스 공작을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들이 우리에게 힘을 빌려줄 것이다.

그런데…….

웃고 있다고?

‘실성한 거겠지.’

나는 라스와 눈빛을 교환했다.

우리는 글레드의 힘을 키워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칠흑에게 마무리 일격을 가하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하늘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반사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에 떠 있어야 할 태양 대신…….

검은 태양이 떠 있었다.

검은 구체가 태양을 가리기 시작했다.

구체에서 뻗어 나오는 검은 연기의 양은 장난이 아니었다.

나는 저것을 보자마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저건……?”

내 중얼거림을 들은 모양인지 칠흑은 이렇게 답했다.

“그래. 네 추측대로다.”

녀석은 검은 구체의 정체를 스스로 발설했다.

“너희가 그토록 찾던 내 심장이다.”

* * *

검은 태양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칠흑의 심장.

당연한 말이지만, 저렇게 큰 검은 괴물의 심장은 처음 봤다.

칠흑의 심장이라는 말에 나를 비롯해 모든 인물들은 멍하니 검은 구체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저게……!”

“심……장이라고?”

“말도 안 돼! 저렇게 큰 게 어떻게 심장이야?”

말이 왜 안 되나.

칠흑은 상식이라는 것 자체가 통하지 않는 존재다.

저렇게 큰 구체가 심장이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녀석이다.

오히려 잘됐다.

저것이 정말로 칠흑의 심장이라면…….

‘저 검은 구체만 없애 버리면 된다는 뜻이잖아!’

나는 인정사정 볼 것도 없이 바로 글레드 덩어리들을 날렸다.

검은 태양을 향해 빠르게 날아드는 글레드 덩어리들.

칠흑의 약점이 글레드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이 정도 공격만으로도 충분히 검은 태양을 파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검은 태양 근처에 또 하나의 불이 형성되었다.

검은 불.

칠흑은 다시 한번 웃은 후에 말을 이어 갔다.

“‘불’은 너희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나 또한 ‘불’을 가지고 있지.”

부정한 것들을 불태우는 불이 있다면…….

‘그 반대도 있다는 뜻인가?’

당연한 말이지만 《델리피나 전기》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내가 못 본 5권 후반부에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지식 내에선 칠흑이 ‘불’을 가지고 있다는 정보가 없었다.

그 불은 우리를 집어삼킬 기세로 날아들었다.

검은 불은 우리에게 빛을 앗아 갔다.

검은 불은 우리에게 시야를 앗아 갔다.

……그리고 검은 불은 우리에게 희망을 앗아 갔다.

글레드가 통하지 않는 불의 존재를, 왜 깨닫지 못했던 걸까.

온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이 나를 옥죄어 오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지옥이 있다면, 지금 이곳이 지옥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보이는 거라고는 오로지 어둠, 어둠, 어둠뿐.

심연의 방이 절로 떠올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나는 발버둥 쳤다.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검은 불은 내 몸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대로 허무하게 죽을 순 없는데……!’

어쩌면…….

아무리 내가 발버둥을 친다 하더라도 이미 《델리피나 전기》의 결말은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드니 갑자기 억울함이 몰려왔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노력은?

처음부터 다 물거품이었단 말이야?

‘이런 씨×!’

억울함은 분노로 변모했다.

분노는 오기로 바뀌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주마! 살아서 반드시 해피엔딩으로 만들어 주겠어!’

그간 해 왔던 나의 노력들을 개고생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똑같은 결과라면…….

‘발버둥이라도 쳐 보자!’

나는 글레드의 힘을 최대한 뿜어냈다.

화르르르륵!

흰 불과 검은 불이 서로 맞붙었다.

그때, 검은 가시 하나가 내게 날아들었다.

푸우욱!

“……!”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이 몰려왔다.

검은 가시는 내 왼쪽 허벅지에 박혔다.

피가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검은 가시는 이내 연기로 변해 흩어졌다.

건너편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단한 정신력이군. 어비스 레기온(abyss region)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인간이 또 있을 줄이야. 역시 글레드가 택한 자답군.”

칠흑이었다.

그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이곳은 심연의 가장 깊은 곳이다. 덧붙여 나의 힘의 원천이 되는 곳이기도 하지. 검은 태양…… 내 심장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어비스 레기온을 펼칠 수 있다. 내 약점이 글레드라는 것까진 알아냈지만, 내 심장의 정체와 능력까진 알아내지 못한 모양인가 보군.”

알 리가 있나!

글레드의 존재도 어쩌다가 알아차리게 된 건데.

나는 간신히 정신을 유지하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처음부터 이런 공격을 하지 않았던 거냐?”

리플란이나 스카이 랜드처럼 나나 라스를 없앨 수 있는 기회는 여러 차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최후에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심장을 보여 주는 걸 아껴 왔던 이유가 뭔지 그게 궁금해졌다.

솔직히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다.

그러나 칠흑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해서 그런 모양인지 나의 궁금증을 모두 해소시켜줬다.

“심장을 꺼내는 건 위험한 일이니까. 그래서 최대한 기회를 엿본 거다. 그리고 기왕 쓸 거, 귀찮게 굴 녀석들이 한꺼번에 모였을 때 사용하는 게 좋지 않겠나?”

여기서 난 정보를 하나 얻을 수 있었다.

검은 태양, 칠흑의 심장은 확실히 녀석의 약점이다.

칠흑은 검은 가시들을 여러 개 꺼냈다.

“이제 더 이상 할 말은 없나 보군. 잘 가라, 로인.”

검은 가시들이 나를 덮쳤다.

아니, 덮치기 직전이었다.

갑자기 내 앞에 글레드의 장벽이 세워졌다.

그 사이로 두 남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내가 아는 이들이었다.

‘테이른…… 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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